소설리스트

281화 (281/521)

*

‘이거 좀 비참하네.’

가르엘의 손에 석상처럼 질질 끌려 돌아온 카델이 쓴웃음을 지었다.

“새로운 작전을 짠 건 가요, 단장님? 뭐가 됐든 라이돈 경이 이 이상 날뛰기 전에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카델을 부드러운 땅 위에 단단히 고정시킨 가르엘이 라이돈이 있는 방향을 일별했다. 희뿌연 눈보라가 그들과 기사단의 사이에 경계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는, 라이돈과 팔라익의 웃음소리, 해머의 울림, 얼음이 쏘아지는 파공음 등이 어지럽게 뒤섞이는 중이었다.

언제 공격이 튀어도 이상할 게 없는 난폭한 싸움이다. 카델 역시 라이돈에게 전투를 온전히 일임할 생각은 없었다.

“아까 너희도 봤겠지만, 숲 쪽으로 세 개의 기둥이 날아갔어. 분사기다. 셋 중 하나만 진짜고, 진짜 분사기는 석화를 일으키는 입자를 흩뿌리지. 우리가 전부 당하기 전에 그 분사기를 부숴야 해.”

“숲을 탐색해야 하는 건가? 위치를 특정 짓지 못하면 시간이 오래 걸릴 거야. 그동안 저 마족이 봉인진을 부술지도 모르고.”

“그래. 그러니까 위치부터 특정 지어야지.”

카델의 시선이 요젠을 향했다.

“요젠, 할 수 있겠어?”

카델 쪽으로 고개를 돌린 요젠은 의미 모를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그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팔라익의 등장과 동시에 그에게 암기를 묻혀 둔 상태였다. 요젠이 보는 세계는 기운의 윤곽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기운의 기척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전투에는 무리가 없었다. 다만, 형태의 세밀함을 느끼고 싶다거나, 대상을 추적할 일이 있을 땐 암기를 묻혀 두어 자신의 ‘그림자 세계’에 추가하곤 했다.

카델이 그 오래된 버릇을 파악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럼 네가 안내해 줘. 반, 루멘, 가르엘. 너희 셋은 지금부터 요젠의 안내를 따라 분사기를 찾아가서 부숴.”

“안내를 따르라니……. 요젠 경은 한 명인데요, 단장님.”

가르엘이 의아한 얼굴로 카델을 보았으나, 카델은 대답 대신 요젠을 응시할 뿐이었다. 요젠은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툭툭 허벅지를 건드리다, 이내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마족이 들고 있던 물건에 암기를 묻혀 뒀어. 내 분신을 따라가면 돼.”

요젠의 손끝에서 퍼져 나간 암기가 바닥을 새까맣게 물들였다. 걸쭉한 액체처럼 꿀렁이던 암기가 훅 치솟으며, 곧 그와 똑같은 형상을 한 분신으로 탈바꿈했다.

세 개의 분신을 만들어 낸 요젠이 몸을 일으켜고. 반과 루멘, 가르엘은 불길하기 짝이 없는 암기의 덩어리를 하나씩 차지하고 섰다.

“셋 중 한 명은 진짜 분사기를 발견하게 될 거야. 석화 당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위험하면 무리하지 말고 빠져. 요젠의 분신이 신호를 보내 줄 수 있으니까, 나머지는 신호를 보낸 쪽으로 지원 가도록 해.”

카델의 말이 끝나자마자 요젠의 분신이 세 방면으로 흩어져 달려가기 시작했다. 부하들 역시 빠르게 분신을 따랐다.

멀어지는 그들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돌린 카델이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보았다.

“……비가 올 것 같네.”

해가 저문 하늘 위로 먹구름이 끼고 있었다. 비가 온대도 석화 가루는 영향을 받지 않겠지만, 부하들의 전투가 까다로워질까 걱정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분사기를 부수기 전에 이쪽이 먼저 팔라익을 해치우는 편이 좋겠지.’

전력이 분산된 이상 석화된 몸뚱어리라도 전투를 쉴 수는 없다.

“요젠. 우리도 슬슬 합류하자.”

냉기와 화염이 작렬했다. 동시에 몰아치는 눈보라와 불꽃은 서로를 잡아먹는 대신, 서로의 길을 터 주며 힘을 극대화했다.

전신을 파고드는 냉기는 감각을 둔화시킨다. 극심한 동상엔 손가락 한두 개가 떨어져 나가도 알아채지 못하는 법이다. 현재의 팔라익이 그러했다. 모든 공격을 시각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그마저도 거센 눈발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그 빈틈을 노리고 들어온 것이 카델의 불꽃. 암흑 마력과 섞인 그의 불꽃은 빛과 기척을 최소한으로 줄이며 팔라익의 사각지대를 파고들었다. 그마저도 타격당한 뒤 한참이 지나서야 서서히 번지는 열감을 통해 알아채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공격만으로도 충분히 골머리가 썩건만. 정작 팔라익이 가장 많은 상처를 허락한 공격은 바로 암기였다.

“헛수고! 이 팔라익은 결코 인간에게 무너지지 않는다!”

근육질의 몸 곳곳에 깊은 자상의 흔적이 남았다. 너덜거리는 몸뚱이엔 폭발로 터져 나간 상처와 암기에 꿰뚫린 구멍, 흐르지 못하고 얼어붙은 피가 낭자했다.

우악스럽게 해머를 휘두르며 지면을 난타하는 그의 기세는 대단했다. 현 몸 상태를 대입해 보자면, 언뜻 최후의 발악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실상은 조금 달랐다.

“요젠!”

“……소리 지르지 않아도 돼. 이 정도론 죽지 않아. ”

카델은 딱딱하게 굳어 버린 요젠의 발목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봉인진에 남은 카델, 라이돈, 요젠. 이 세 남자의 몸은 이미 상당 부분 석화가 진행된 상태였다.

카델의 몸은 이제 겨우 얼굴과 오른팔이 남았을 뿐이다. 팔라익을 상대로 시간을 끌었던 라이돈은 관절마다 석화를 당해 한 걸음 떼기도 버거운 상태. 그나마 두 사람은 원거리 공격이 주였기에 요젠을 위한 보조가 가능했었다.

‘결국 요젠까지 발이 묶인 건가.’

라이돈과 자신이 견제하고, 요젠이 공격을 박아 넣는다. 20분간 이어진 격전은 요젠이 행동력을 잃음으로써 종지부를 찍게 됐다.

“크하하! 이제야 전부 얌전해졌군! 이 팔라익이 납작하게 찌그러뜨려 줄 테니, 두 눈 꽉 감고 있거라!”

이제 팔라익은 거슬릴 것이 없었다. 몸이 굳은 마법사는 전황을 살필 수 없고, 발이 묶인 암살자는 기습할 수 없다. 남은 것은 말 그대로 그들을 ‘찌그러뜨려’ 죽이는 것뿐.

팔라익이 해머를 들어 올리자 흐릿한 빛을 뿜던 달이 가려지며, 대지 위로 완전한 어둠이 내려앉았다. 카델은 서둘러 부하들의 위로 불의 장막을 둘렀으나,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앞으로 10분. 그 안에 석화를 풀지 못하면, 누군가는 당하고 만다.

*

“이런, 꽝이었네.”

곤란한 미소를 지은 가르엘이 입가를 문질렀다. 그의 앞엔 두 동강 난 분사기가 자리했으나, 그것은 조금씩 풍화되어 가루로 흩날리는 중이었다.

“이왕이면 내가 처리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지……. 역시 운이 안 따라 줘.”

접근하자마자 모래 같은 가루를 뿌려 대기에 당연히 진짜인 줄 알았다. 열심히 가루를 피해가며 공격한 자신만 우스운 꼴이 됐다.

잠시 벗어 두었던 안대를 다시 착용한 가르엘이 고요한 사위를 둘러보았다. 다른 동료의 신호는 보이지 않고, 요젠의 분신은 분사기를 부수자마자 사라졌다.

“다른 분사기를 찾아가는 게 좋을지, 단장님한테 돌아가는 게 좋을지 모르겠네. 신호가 없으니 도움은 필요 없다는 건가. ……흠, 부하의 판단이란 건 어렵군.”

잠시 고민하던 가르엘은 결국 본진으로의 복귀를 택했다. 돌아가는 동안 신호를 발견하면 그때 합류해도 상관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무렵, 루멘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각오가 무색하군.”

흩어지는 가루를 보자마자 이 분사기가 진짜라고 생각했다. 공기 중에 퍼져 나간 석화 가루를 전부 피하며 부수는 것은 불가능. 몸이 전부 굳어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분사기를 부수겠노라, 결의에 차 검을 휘둘렀건만.

가루는 그저 모래 먼지였고, 부릅뜬 눈만 조금 시큰거릴 뿐이다. 루멘은 풍화되는 분사기에서 시선을 떼어 하늘을 올려 보았다.

아직까지 신호는 없다. 진짜 분사기를 이미 처리했거나, 처리에 무리가 없다는 뜻이겠지. 그게 가르엘일지 반일지는 모르지만…….

“그 녀석이라면 조금 불안하긴 한데.”

반 헤르도스.

그날 밤 보았던 정신 나간 녀석의 상태가 아직도 눈앞에 아른거렸다.

“……할 일은 하겠지.”

카델을 보자마자 순식간에 태세를 바꾸고 멀쩡하게 굴던 녀석이다. 명령에 불복해 카델을 위험에 빠뜨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몇 분 정도 신호를 기다리며 대기하던 루멘은, 가르엘처럼 본진으로 복귀하기를 택했다. 그렇게 두 남자가 가짜 분사기를 처리한 시점.

진짜 분사기를 맞닥뜨린 반은, 빈말로라도 그들의 도움이 필요 없다 할 수 없는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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