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델은 해머를 피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피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의 양다리는 이미 석화 상태에 진입해 있었다. 허벅지까지 타고 오른 암석이 카델을 속박해 움직이지 못하도록 묶어 두었다.
“무, 무식한 새끼……!”
장막에 마력을 퍼붓고 있음에도 해머의 압력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악다문 잇새로 얇은 핏줄기가 흘렀다. 독기 가득한 시선은 뒤편의 부하들이 아닌 팔라익을 향했다.
‘분사기를 품은 상태로 전투를 해? 게임에선 있을 수 없는 전략이라고, 망할 마족 같으니.’
분사기를 품속에 넣고 방어막 대용으로 사용했다. 석화 가루의 경로는 팔라익이 임의로 조정 가능하나, 가루가 날아드는 데 드는 시간이 있다. 만약 분사기를 멀리 설치해 뒀다면 불가능했을 전략이었다.
‘그래도 이젠 분사기의 위치를 알아.’
분사기만 부술 수 있다면 팔라익 토벌은 별것 아니었다. 남은 문제라 할 건…….
슬쩍 고개를 숙인 카델이 제 다리를 내려보았다. 불의 장막이 해머를 막아 내자마자 팔라익이 석화 가루를 뿌린 결과였다. 카델이 장막을 버리고 몸을 피하는 것보다 발이 굳는 게 더 빨랐다.
‘접근전은 안 돼. 팔라익과 가까워질수록 석화 가루에 침식당하는 속도도 빨라질 거다. ……녀석이 먼저 분사기를 내놓도록 유도해야 해.’
그전까진 원거리 공격에 의지하는 수밖에. 결정한 카델이 휙 고개를 돌려 큰 소리로 외쳤다.
“접근하지 마! 그 거리를 유지해!”
해머의 압박감은 구역질이 날 만큼 대단했으나, 그렇다고 못 버틸 정도는 아니었다. 이래 봬도 8성 마법사. 고위 마족의 공격 하나 버티지 못할 리 있겠는가.
“지금부터 원거리 공격으로 팔라익을 치는 거다. 원거리가 불가능하다면 떨어져서 체력을 비축해 둬. 라이돈! 지금부턴 네가 장막을 둘러!”
단호한 명령에 잠시 주춤하던 기사들도 빠르게 위치를 찾았다. 카델은 그들이 지켜 줘야 할 약자가 아닌, 그들이 따라야 할 단장이었다. 전장에서의 그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기사들을 보호하던 바람 장막이 사라지며, 라이돈의 얼음 장막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라이돈, 장막이 너무 두꺼워서 앞이 안 보이잖아. 두께 조절해.”
장막보단 장벽에 가까운 두께에 루멘이 눈살을 찌푸리자, 라이돈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원거리 공격도 못 하는 루멘이 시야 확보해서 뭐 하게? 그냥 거기 갇혀서 내가 활약하는 모습이나 지켜봐.”
팔랑팔랑 손을 흔들며 멀어지는 꼴을 보고 있자니 절로 이마에 핏대가 솟았으나, 반박할 말은 없었다.
그렇게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반과 라이돈, 가르엘이 선두에 섰다. 후방에 남은 것은 루멘과 요젠뿐이었다.
“……그쪽도 원거리 공격이 불가능한가?”
“가능해.”
“그럼 왜…….”
“교란은 특기가 아니라서.”
대기하면서 본인이 활약할 타이밍을 재겠다는 건가. 요젠의 속 모를 얼굴을 들여다보던 루멘이 이내 고개를 돌렸다. 뒤이어 비치는 카델의 모습에 절로 인상이 구겨졌다. 거대한 해머 아래서 홀로 그 무게를 버텨 내는 대장의 뒷모습은 그다지 감동적이지 못했다.
‘대체 뭘 어떻게 할 생각인지.’
믿음과 동시에 들어차는 불안감. 루멘이 그 양가감정 사이에서 괴로워할 무렵.
“크하하! 제법이군! 어디 얼마나 오랫동안 버틸 수 있는지 지켜보마!”
더는 부풀 수 없을 것 같던 팔라익의 팔 근육이 풍선처럼 팽창하며, 우렁찬 기합 소리가 대기를 울렸다. 처음보다 배는 늘어난 힘이 카델을 짓눌러 왔다.
콰드득. 콰직.
석화된 다리가 바닥을 뚫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몸이 점점 내려앉는 것이 느껴졌으나, 카델은 입을 꾹 다문 채 묵묵히 장막의 마력을 늘렸다.
자신이 최전방에서 팔라익의 석화를 감당해야 했다. 부하들이 뒤에 있는 한, 석화 가루는 무조건 자신이 있는 방향을 지나쳐 간다.
‘전부 막아 주진 못하더라도 부하들의 피해는 최소한으로 줄여야 해.’
이쪽에서 팔라익 공략을 위한 길을 터 주어야 했다. 결연한 눈빛이 번뜩이며, 장막 아래로 바람 마력이 흘러들었다. 묵직한 풍압이 해머를 들어 올리듯 솟구치고. 들썩이는 해머의 움직임을 감지한 팔라익의 눈썹이 꿈틀했다.
“잔재주를…….”
힘과 힘의 싸움이라면 자신이 저 작은 인간에게 패배할 리 없다.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다시 한번 해머에 힘을 주려던 팔라익이 일순 멈칫했다.
‘냉기……?’
냉기가 느껴졌다. 외부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아니다. 팔라익의 핏발 선 눈이 제 가슴께를 바라보았다.
‘내부에서부터 냉기가 퍼지고 있다.’
아주 미미한 변화였으나, 팔라익은 알아챌 수 있었다. 여유롭던 그의 시선이 날카롭게 벼려지며 어느 한 곳을 노려보았다.
라이돈. 날개를 석화시켜 움직임을 봉한 요정이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붉은 눈동자가 보내는 섬뜩하리만치 흔들림 없는 시선. 팔라익은 자신의 육체에서 무언가 범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눈치챘다.
“……흐응, 눈치가 빠르네. 꼴에 고위 마족이란 거야?”
팔라익과 눈이 마주친 라이돈이 가볍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가 눈치채기 전부터, 라이돈은 이미 팔라익을 공격하고 있었다.
[시혼빙극].
이전 에르고와의 전투에서 사용했던 기술. 상대의 체내에 마력을 심어 터뜨리는 고급 마법이었다.
팔라익이 조금만 방심했다면, 시혼빙극의 마력은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퍼져 나가 팔라익의 육체를 찢어발겼을 테다.
아쉽다는 듯 혀를 차면서도 기술은 거두지 않았다. 팔라익은 조금씩 번져 가는 냉기를 소멸시키기 위해 체내의 마기를 끌어 올렸다.
하지만 그가 다른 곳에 집중하는 것을 허락지 않겠다는 듯, 붉은 검기가 연달아 날아들었다. 팔라익은 재빨리 검기의 타격 범위를 석화시켜 공격을 방어했으나.
“……마기라고?”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마기를 감지했다. 대체 어떤 겁 없는 놈이 이 팔라익의 앞에서 마기를 들이민단 말인가?
검기 사이사이의 공백을 메우듯 찔러 드는 마기에선 만만치 않은 힘이 느껴졌다. 팔라익의 살벌한 눈빛이 곧장 가르엘을 찾아냈다.
놈의 왼쪽 반신을 물들인 어두운 기운은 변명할 여지도 없는 마기. 고위 마족인 자신이 마기를 헷갈릴 리는 없다.
“고결한 마족의 피를 이은 자가 하등한 인간의 길을 택했단 말인가…….”
감히!
분개한 팔라익의 안광이 빛났다. 체내의 마기가 용광로처럼 달아오르며 순식간에 냉기를 지워 냈다.
“네놈부터 죽여 줘야겠구나!”
마법사부터 해치울 계획이었으나, 이젠 아무래도 좋았다. 당장 저 반쪽짜리 마족을 죽이지 않는다면 평정심을 유지하기 힘들 것 같았으니.
팔라익은 카델을 짓누르던 힘을 거두고 해머를 들어 올리려 했다. 그러나.
“허허……. 끝까지 잔재주를 부리는군.”
카델의 마력이 헤드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 장막에 불과하다 여겼던 불꽃이 어느새 헤드를 몽땅 집어삼킨 채 버티고 있었다.
결코 자신의 동료를 공격하게 두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이는 대목이었다. 잠시 카델을 응시하던 팔라익이 광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재미있군. 허나! 이 팔라익의 수가 그뿐이라고 생각지는 마라!”
팔라익이 품속의 분사기에 마기를 불어넣었다. 요정을 노린 첫 번째 공격을 제외하곤 내내 방어용으로만 사용했다. 인간들의 능력을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젠 충분하다. 확실히 흥미롭기는 했으나, 저들의 틈에 마족의 배신자가 섞여 있는 한. 놀이는 끝이다.
분사기에서 빠져나온 석화 가루의 입자가 카델 너머의 인간들을 노리며 일렁였다. 마법사는 녀석의 동료를 전부 석화시킨 뒤 해치워도 상관없었다. 가루는 카델이 있는 경로를 완전히 비껴가며 가르엘을 노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정신을 집중한다 해도 공중에 남은 흙먼지의 입자와 석화 가루를 구분할 순 없다. 회피는 불가능…….
“……?”
분명 그리 생각했으나, 석화 가루는 일정 거리 이상을 넘어가지 못한 채 자꾸만 밀려났다. 다른 쪽으로 경로를 조절해도 마찬가지였다. 예상 밖의 사태에 잠시 당황하던 팔라익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석화 가루가 밀려 나오는 경계선. 그 경계선의 중앙에, 카델이 있었다.
“바람인가…!”
카델을 경계로 성벽처럼 드리운 세찬 바람이 석화 가루를 돌려보내고 있었다. 저것이 장막이었다면 석화 가루는 더디더라도 너머를 수월하게 뚫고 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카델의 마법이 만들어 낸 것은 단순 풍압. 게다가 범위를 가늠하기도 어려운 초대형 바람 마법이었다.
부하들이 카델의 뒤에 있는 한, 석화 가루는 그의 바람을 온전히 넘어갈 수 없다. 마치 자신의 능력을 완벽히 파악한 듯한 방어에 팔라익이 이를 갈았다.
그리고 카델은, 분하게 일그러진 팔라익의 얼굴을 보며 기분 좋은 웃음을 터뜨렸다.
‘게임에선 바람 불어서 석화 가루 막는 공략 같은 건 없었지. 하지만 그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게임 내 지식만으로는 부족하다. 상대가 본인의 힘을 십분 발휘하겠다면, 이쪽도 게임 공략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
강풍에 흩날리는 흑발 아래, 잿빛 눈동자가 매섭게 번뜩였다.
“어디 누구 머리가 더 잘 돌아가는지 시험해 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