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6화 (276/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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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릴 산보다 완만한 경사, 평탄한 지형, 낮은 고도. 보통이라면 고요의 산맥을 넘을 때보다 체력 소모가 덜해야 옳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의 목적지인 리셀라 고원은 외부 봉인 구역이었다. 내로라하는 기사들도 출정을 꺼리는 곳. 자연환경이 혹독하지 않다면, 다른 부분이 혹독한 것이다.

“라이돈! 저 녀석들 발을 묶어!”

카델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라이돈의 [대동토]가 펼쳐졌다. 비탈길을 뒤덮은 얼음에 도망치던 고블린 무리가 주르륵 미끄러지고, 대동토의 한기가 놈들의 발목을 얼어 붙인 순간.

사아악.

무리를 통째로 양단하는 푸른 섬광이 새겨졌다. 한 박자 늦게 단면이 밀려 나며, 반 잘린 시체들이 우수수 굴러떨어졌다. 한 방에 10마리가 넘는 마물을 처리했으나, 끝은 아니었다.

‘마물 수가 장난이 아니야.’

여기저기서 오라와 마기, 암기가 출몰하며 마물들을 도륙했다. 하지만 겨우 숨을 돌리려 하면 기다렸다는 듯 새로운 마물이 등장했다.

군단이라고 하기엔 그 수가 적었으나, 사방에서 툭툭 튀어나오는 탓에 정신은 더욱 예민해졌다.

“봉인이 이미 손상된 건가?”

루멘이 짧게 혀를 차며 감각을 곤두세웠다. 끊임없이 마물을 베어 내며 전진했음에도 중턱밖에 오르지 못했다. 만약 봉인이 손상되고 고원엔 이미 마물과 마족이 포진해 있다면, 이런 식으로 체력을 낭비하는 건 좋지 못한 선택이었다.

“봉인의 틈에서 나왔다기엔 마물의 종류가 너무 평범해. 원래부터 이곳에 살던 놈들인 것 같아. 아니면 고원에 풀려난 마계 마물한테 밀려나서 여기까지 내려온 걸 수도 있고.”

여러 가정을 떠올릴 수 있었으나, 전부 부정적이었다.

‘고위 마족이 등장할 거면 차라리 소환진에서 나와 줬으면 좋겠는데. 봉인을 뚫고 나온 거면 상대해야 할 적이 너무 많아져.’

이번에 나올 고위 마족의 스테이지에 졸병들이 많았던가? 그것까진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봉인이 깨졌든, 아직 건재하든. 지금은 이런 잡졸들을 상대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뒤쫓아오는 마물만 죽인다! 해가 지기 전에 조금이라도 고원과 가까워져야 해. 서둘러!”

그야말로 전쟁 같은 산행이었다. 기사단은 해가 완전히 떨어진 뒤에야 겨우 야영지를 선점할 수 있었다.

수도 없이 마물을 상대한 탓에 그 라이돈마저 기가 질린 상태였다. 이럴 때일수록 체력 보충이 절실하다. 그들은 카델이 나눠 준 물약과 가져온 음식을 먹고, 불침번의 순서를 정했다.

겨우 정한 야영지의 주변에도 마물의 기척이 만연했기에, 두 명씩 짝을 짓기로 했다.

첫 번째 조는 라이돈과 가르엘, 두 번째 조는 반과 루멘, 세 번째 조는 카델과 요젠이었다. 각 조가 두 시간에 한 번씩 교대하기로 했으나, 첫 번째 조의 교대는 조금 빨랐다.

“네 악취 때문에 마물 냄새가 묻히잖아, 가르엘. 어떻게 할 거야? 저 멀리 떨어져.”

“굳이 냄새로 구분할 필요가 있나요. 하도 많아서 어디에 공격을 날리든 전부 명중일 것 같은데.”

“멍청해라! 난 그냥 네 냄새가 싫은 거야!”

“이런, 제 손수건이라도 드릴까요? 가지고 다니면서 제 체취에 익숙해지는 거죠. 으음, 속이 조금 거북하긴 하지만 라이돈 경을 위해서라면야.”

“아하하! 더는 살고 싶지 않은 가봐?”

바로 두 남자의 쉼 없는 잡담 때문이었다. 완전히 곯아떨어진 카델을 제외한 나머지 단원들은 둘의 시끄러운 대거리 속에서 잠을 청할 수 없었다.

“나오십쇼.”

서늘한 루멘의 시선이 가르엘을 향했다. 나름의 변명을 하려던 가르엘은 옆에서 라이돈을 끌어내는 반의 짜증 가득한 표정에 겸연쩍게 물러났다.

“꼭 라이돈 경 옆에만 있으면 비슷한 취급을 받는단 말이죠.”

반과 루멘이 강제로 교대를 마치자, 요젠도 손끝을 물들이던 암기를 거뒀다. 잘도 떠들던 라이돈과 가르엘 역시 입을 다물고 얕은 잠에 빠져들었다.

두 번째 조는 보초 서기라는 행위에 충실했다. 말없이 모닥불의 화력을 유지했고, 주변의 소리에 집중했다. 움직이는 마물을 전부 처리할 필요는 없다. 야영지에 가까워지는 녀석들만 골라내는 것이 체력적으로도 좋았다.

그렇게 다음 교대 시간이 한 시간 정도 남았을 무렵.

“…….”

무감한 얼굴로 모닥불을 들쑤시던 루멘의 눈이 가늘어졌다.

“……꽤 많이 모였는데.”

여기저기 몇 마리씩 뭉쳐 있던 마물이 한 곳으로 모여든 것이 느껴졌다. 딱히 야영지를 노리는 것 같지는 않았으나, 쉽게 무시할 수 없는 숫자이기도 했다.

‘미리 처리하는 게 나으려나.’

그러지 않으면 다음 조인 카델이 직접 나서야 할지도 모른다. 그리 생각한 루멘이 소탕에 나서려던 순간.

“내가 간다. 넌 여기 있어.”

반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대답도 듣지 않고 대검을 챙긴 그가 마물들이 모인 방향으로 이동했다. 루멘은 그의 뒷모습이 어둠에 먹혀 사라질 때까지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다시 고개를 돌린 그의 얼굴엔 묘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40분.

반이 마물을 처리하러 간 지 40분이 지났다. 루멘이 처음 감지했던 마물의 기척은 이미 15분도 전에 사라졌음에도.

‘설마 마물 상대하다 쓰러지기라도 한 건가? 귀찮게 구는군.’

짧게 혀를 찬 루멘이 몸을 일으켰다. 교대 전까지 20분밖에 남지 않았다. 당연히 그 전에 알아서 복귀하리라 생각했지만, 얌전히 기다릴 수가 없었다.

마물에게로 떠나기 전, 반이 보였던 눈빛. 그 얼어붙은 눈빛이 마음에 걸린 탓이었다.

‘대장한테 차이기라도 했나.’

한결같이 짜증스러운 녀석이었으나, 카델과 더불어 함께 한 시간이 가장 오래된 동료이기도 했다. 녀석에게서 그런 눈빛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괜히 신경 쓰이게 하다니.

감각을 극대화해 반이 있을 만한 방향을 가늠한 루멘이 등을 돌린 채 말했다.

“잠시 자리 좀 비우지. 깨 있는 김에 부탁한다.”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아무리 암살자라지만 한숨을 안 자다니. 어지간히 예민한 성격인가 보군.’

지척에서 느껴지는 마물의 기척은 없었다. 잠시 생각하던 루멘은 조금 더 멀리 떨어진 곳에서 어렴풋이 감지되는 기척을 찾아가기로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반이 마물에게 당했을 것 같지는 않으니.

그리고 그의 예상은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

푹. 푸욱.

붉은 오라에 감긴 대검이 고블린의 뱃가죽을 헤집었다. 대검의 움직임을 따라 시체가 들썩이며 짙은 피비린내가 풍겼다. 한 마리가 풍기는 피 냄새가 아니었다.

그가 선 곳을 중심으로 처참하게 뜯겨 나간 마물 시체가 산재했다. 오늘따라 유독 환한 달빛이 나무의 잎사귀를 헤치고 그 처참한 광경을 여지없이 비췄다.

툭.

루멘의 신코가 시체 하나를 건드렸다. 그 작은 소리를 감지한 듯, 반의 행동이 멈췄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 그의 눈은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눈동자 속에서 회오리치는 오라의 흐름이 맹렬했다.

“화풀이도 적당히 해야지. 당장 내일 마족을 만날지도 모르는데, 이런 곳에 체력 낭비나 하고 있는 건가?”

반은 자신을 찾아온 루멘을 빤히 응시하다, 다시 고개를 돌렸다. 피가 튀어 오른 뺨을 손등으로 닦아 낸 그가 한없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참견하지 마라.”

“참견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어.”

“알아서 돌아갈 테니 꺼져.”

“잔뜩 심통난 꼬마 같군.”

루멘은 일부러 빈정거리며 반의 신경을 긁으려 했다. 무슨 이유로 안 하던 짓을 하는지는 몰라도, 함께 마족을 처치해야 할 동료가 애먼 데 체력을 뺀다면 전투에도 지장이 간다. 적당히 끌어내 멈추게 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반은 루멘의 도발에 넘어가지 않았다. 되레 조소를 흘리며 고블린의 몸에서 대검을 뽑아냈다.

“심통……. 심통이라. 네 눈엔 그렇게 보이나?”

“그것 말곤 설명할 말이 없는데. 설마 대장이 요새 관심을 안 줬다고 토라진 건 아니겠지? 짜증 나게 굴지 말고 얌전히 보초나 서.”

“……정말 부럽네.”

루멘이 작게 눈살을 찌푸렸다. 이해할 수 없는 반의 태도보다, 다시금 자신을 향한 눈빛에서 살기를 감지했기 때문이었다.

“마물 잡다 정신이라도 나간 건가?”

“네가 부럽다. 빌어먹게 부러워, 루멘.”

반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붉은 눈동자가 형형히 빛났으나, 걸음걸이엔 힘이 없었다. 느릿느릿 다가온 반이 루멘의 앞에서 멈춰 섰다. 둘을 감싼 공기는 금방이라도 서로를 베어 낼 듯 날이 서 있었다.

“네놈은 권력이 있고, 능력도 있지. 하지만 네가 가진 게 부러웠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

“그런데 지금은…….”

반의 표정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분노로 점철된 눈동자에서 붉은 오라가 폭발할 듯 팽창했다.

“네가 느끼고 있을 감정을 빼앗고 싶어. 널 죽여서라도 가지고 싶다.”

루멘의 손이 검집으로 움직였다. 과도한 긴장감이 그들을 둘러싼 공기를 팽팽하게 당겼고, 반에게선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적의가 꿈틀거렸다.

심상치 않다. 이 기세라면 둘 중 한 명은 크게 다친다. 그것을 원하지 않음에도, 루멘에게는 반의 분노를 멈추게 할 마땅한 수단이 존재하지 않았다.

자신을 향한 반의 분노는 익숙했으나, 이것은 결이 달랐다.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 푸른 눈동자 위로 희미한 당혹감이 떠올랐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반.”

“……무슨 일이 있었냐고?”

반의 입매가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웃음을 참는 것도, 괴로워하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그가 대답하는 일은 없었다.

“반! 루멘! 거기 있어?”

경직된 공기를 가르고, 카델의 목소리가 숲을 울렸다. 맥이 풀린 것처럼 둘 사이의 긴장감이 흐트러졌다.

두 시선의 끝에 나무 사이로 빠져나온 카델과 그 뒤의 요젠이 걸렸다. 둘을 발견한 카델이 크게 안심한 얼굴로 다가오려다, 마물 시체에 발이 걸려 휘청였다. 요젠의 도움으로 중심을 잡은 그가 뒤늦게 시체가 가득한 광경을 담아냈다.

“이게 다…….”

당황한 카델을 안심시킨 것은 루멘이었다.

“도망치는 놈들을 쫓다 보니까 여기까지 왔어. 벌써 교대할 시간인가? 주변에 있던 마물은 다 잡았으니 크게 신경 쓸 건 없을 거야.”

“아…… 그렇구나. 많이도 잡았네.”

어색하게 웃은 카델이 시체를 피해 둘에게로 다가왔다. 걱정이 담긴 눈길이 루멘과 반을 번갈아 살피다, 이내 반에게로 고정되었다.

“돌아가자. 조금이라도 자 둬야지.”

혹시 카델에게까지 이상한 행동을 보일까. 의심과 불안이 섞인 눈빛이 반을 곁눈질했으나.

“네, 단장.”

반은 좀 전까지의 살기를 완전히 지운 채 살가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보는 루멘이 어이가 없을 정도로 말끔한 얼굴. 오라를 거둔 황금색 눈동자에서는 어떠한 적의도, 분노도 비치지 않았다.

찝찝함이 전신을 휘감았으나, 루멘은 반의 태도를 지적하는 대신 조용히 돌아가는 쪽을 택했다.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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