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종류의 만찬이 널려 있었으나, 맛은 느낄 수 없었다.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른 채 의무적으로 턱을 움직이는 것이 전부였다. 라이돈과의 대화도 반쯤 정신을 놓은 채 기계처럼 이어갔다.
성의 없는 대꾸에 라이돈이 무어라 불만을 토로했으나, 제대로 듣지는 못했다. 그 흉내에 가까운 무미건조한 식사를 중단시킨 이는 루멘이었다.
“네가 데리고 있을 줄 알았다, 라이돈.”
“카델은 내 거니까 당연히 내 옆에 있지. 방해하지 말고 가 버려!”
용케 방을 찾아온 그가 시끄럽게 구는 라이돈을 무시한 채 카델에게 무언가를 건넸다.
“제국에서 서신이 왔어.”
“……빠르네.”
바로 어제 보낸 전보의 답장이 오늘 아침에 도착했다. 레민 국왕에게 마도구를 부착한 전서조를 빌린 덕이었다.
카델은 정갈하게 접힌 종이를 펼쳐 안에 적힌 활자를 읽어 내렸다. 그의 옆에서 함께 내용을 확인한 루멘이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쉬는 것도 사치란 건가. 그나마 레민 왕국에서 가까운 곳인 게 다행이지.”
쪽지에 적힌 것은 부연 설명 하나 없는 다음 파견지의 위치였다.
[리셀라 고원].
카델이 이미 알고 있던 그들의 ‘마지막 파견지’이기도 했다.
‘벌써 세 번째 봉인 지역인가.’
인테 설원, 잉마르 늪지대, 그리고 리셀라 고원. 이 세 곳이 메인 퀘스트가 진행되는 외부 봉인 구역이었다.
이 세 구역의 퀘스트를 모두 해결한다면, 남는 것은.
‘……마계 전쟁.’
물론 곧바로 전쟁이 발발하진 않을 거다. 스토리를 모르는 그로서는 전쟁의 정확한 시발점을 알아내는 게 불가능했지만, 적어도 일정 시간이 필요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마계 전쟁 전에 대규모 업데이트를 위한 준비 기간이 있었으니까. 그동안 똑같은 이벤트만 계속 우려먹어서 접을 뻔했던 기억이 있어.’
업데이트 후에도 초반엔 스토리만 줄기차게 보여준 탓에, 질려 하며 스킵 버튼을 연타하기도 했다. 그러니 전쟁 전까지는 분명 어느 정도의 시간이 남는다.
‘지금 당장은 리셀라 고원의 퀘스트만 생각하면 돼. 하지만…… 꽤 많이 왔구나.’
무명 용병단부터 시작해 제국의 기사단이 되었고, 이제는 세계의 영웅이 될 차례였다. 하지만 카델은 별다른 성취감을 느낄 수 없었다. 그를 둘러싼 것은 주인공 역할을 해내야 한다는 부담감과 부하들을 최고의 자리로 이끌어야 한다는 의무감.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한 건 반이었는데.’
오랜 고생을 함께해 준 반에게 고마운 마음조차 전하지 못한다는 죄책감.
카델은 종이를 대충 접어 품 안으로 쑤셔 넣었다. 금세 속이 메스꺼워졌으나, 티는 내지 않았다.
“서둘러야겠네. 만약 멘델처럼 소환진을 통해 나온 마족이 있다면 봉인이 위험해. 내 방으로 단원들을 모아 줘, 루멘.”
*
모든 부하가 한자리에 모였다. 요젠은 이런 자리가 불편한 듯 구석진 곳에 홀로 동떨어져 있었으나, 기어코 그의 옆자리를 차지한 가르엘이 붙임성 좋게 말을 건넸다.
“앞으로 쭉 함께할 동료인데, 아침 수련이라도 같이하는 게 어떤가요?”
“내 기술은 혼자일 때 가장 강력해. 일부러 합을 맞출 필요는 없어.”
“저번엔 꽤 괜찮은 협동 공격을 하지 않았나요?”
“내가 알아서 틈을 노린 것뿐이야.”
“흐음, 동료가 그 틈을 만들어 준다면 더 편해질 것 같은데.”
요젠은 끊임없이 치근덕거리는 가르엘이 귀찮은 듯했다. 입가에 떠오른 미소가 점점 섬뜩한 기운을 띠는데도 가르엘은 쉽사리 물러서지 않았다. 본인의 재생 능력을 믿기 때문이었다. 난데없이 칼침을 맞아도 죽지 않는다는 것이 용기의 근거였다.
카델은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다, 슬쩍 시선을 움직였다. 그곳엔 반이 있었다. 너무도 태연한 표정으로, 이어질 말을 기다리듯 빤한 눈길을 보내면서.
반이 평소처럼 굴수록 점점 불안해졌으나, 내색할 순 없었다. 가볍게 목을 가다듬은 그가 부하들의 주의를 끌었다.
“다음 파견지가 정해졌어. 외부 봉인이 있는 리셀라 고원이다. 피누 산지와 도테 산지 사이에 있는 곳이야. 우린 레민 왕국과 가까운 피누 산지를 통해 이동할 거고.”
“하아, 또 산이야? 지겨워라. 난 바다에서 싸우고 싶은데!”
“날개는 너밖에 없다는 걸 잊지 마라, 라이돈.”
“그건 그렇게 태어난 루멘 잘못이잖아? 난 상관없어.”
카델은 부하들의 잡담을 무시한 채 앞으로의 일정을 차근차근 설명했다.
봉인진뿐만 아니라 멘델 같은 고위 마족이 소환진을 통해 미리 진을 치고 있을 경우도 염두에 둬야 했다. 카델은 리셀라 고원에서 만날 마족에 대해 알고 있으나, 그가 깨진 봉인에서 나오는지, 소환진을 통해 나오는지까진 알지 못했다. 그러니 미리 여러 가정을 염두에 둔 작전을 짜는 수밖에.
그는 마족의 정보를 최대한 배제한 채 여러 가설에 따른 전술을 나열했다. 마족의 능력에 기반한 돌발 상황에 대한 대처는 본인의 머릿속에만 보관해 뒀다.
‘마계 전쟁이 가까워지니까 이건 좋네.’
앞으로 등장할 적들에 대한 정보가 명확하다는 것. 가물가물한 튜토리얼이라든지, 어렴풋한 초반 퀘스트가 아닌, 비교적 최근에 상대한 적들이다. 세세한 것까지 기억할 수 있으니 더 치밀한 작전 수립이 가능해진 것이다.
‘마족에 대한 정보도 쿤라가 알려 줬다고 둘러대면 되고.’
여전히 께름칙하긴 하지만 쓸모 하나는 확실한 적룡이었다.
그렇게 부지런히 계획을 전달하면서도, 카델의 신경은 반에게로 쏠려 있었다. 그의 시선에선 이렇다 할 반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전과 다를 게 없었고, 그렇기에 더욱 신경이 쓰였다.
모든 걸 알았는데도 저런 반응일 수는 없다.
‘……역시 듣지 못한 모양이야.’
그것이 쿤라의 뜻인지 반의 뜻인지는 직접 물어보면 알겠지.
“출발은 내일 아침이야. 다들 체력 충분히 비축해 두고, 필요한 게 있다면 나한테 말해 둬.”
여기저기서 ‘단장님과의 시간’이라든가 ‘자기의 품’이라든가 ‘이곳 귀족들의 정보’ 따위의 요구 사항이 들려왔으나, 귀담아들을 필요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