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2화 (272/521)

“제가 원하는 건 그냥 있는 그대로의 단장이에요. 그러니까 이러지 말아요, 단장. 스트레스 받았던 거죠? 요즘 일도 많았고, 단원도 새로 영입했고……. 부담스러웠겠죠. 신경 못 써 줘서 미안해요. 하지만 전 정말 지금의 단장이 좋아요. 과거든 현재든, 단장이면 전부 좋아요.”

진심이었다. 그는 카델의 희생적인 면도, 계산적인 면도 좋았다. 어떤 모습이든 그가 웃으면 뭐든 좋았다. 카델이면 전부 좋았다. 싫은 점 하나 없이 좋았다.

그런데도.

“하……. 아— 진짜… 진짜 미칠 것 같네, 이거…….”

카델은 실성한 사람처럼 얼굴을 문지르며 고개를 숙였다. 우는 건지 웃는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떨리는 숨을 몰아쉬었다.

“그럴 리가 없다니까. 네가 좋아하는 게, 있는 그대로의 단장일 리가 없다고…….”

“제 마음은 제가 가장 잘 알아요.”

“…….”

“단장, 그만해요. 뭘 물어도 제 대답이 바뀔 일은 없어요.”

반은 당황한 와중에도 자신의 마음을 똑바로 전달했다. 자신이 있으니까. 그의 진심은 영원토록 변할 일이 없었다.

그리고 그제야, 카델은 깨달았다.

‘말했어야 했어. 빙의한 첫날, 아니, 쿤라에게 얘기를 들은 후에라도. 말해야 했다.’

너무 멀리 왔다. 반의 마음이 어딜 향하는지 알고 있음에도 외면하기 급급했다. 반의 충성이 그래도 조금쯤은 신여환을 향하지 않았을까. 홀로 착각하며 그에게 어울리는 남자가 되면 된다고 자위했다.

처음부터 아니었는데. 반이 계속 자신을 따른 것은, 그저 이 육신에 남은 카델 라이토스의 의지를 보았기 때문인데. 그는 자신도 알아채지 못한 카델 라이토스를 보며 그를 그리워하고, 존경하고, 사랑하고 있었다.

바로 앞에 그가 사랑하는 남자를 죽일 수밖에 없는 원수가 있음에도. 그 원수를 증오하기는커녕 애정을 퍼부었다.

“……쉬고 있어요, 단장. 제프 경은 제가 찾아올게요.”

반은 카델의 손에 들린 천 조각을 뺏어 들며 그를 나무 등치에 앉혔다. 함부로 움직이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 낸 그가 제프의 흔적을 찾아 떠난 뒤. 카델은 넋이 나간 얼굴로 중얼거렸다.

“더는 못 하겠어.”

*

다행히 제프의 상처는 깊지 않았다. 그는 진군하던 마물 군단에게 발각되어 큰 위기를 맞닥뜨렸지만, 운 좋게 도망쳐 몸을 숨길 수 있었다.

반은 신호탄을 쏘아 단원들에게 위치를 알린 뒤, 가장 먼저 도착한 루멘에게 제프를 맡기고 카델을 찾아갔다. 카델은 군말 없이 반을 따라 성으로 복귀했다. 좀 전의 흥분은 착각일 뿐이라는 듯, 카델의 태도는 덤덤하기만 했다.

레민 국왕은 늪지대의 마족을 해치운 기사단의 공적을 치하하기 위해 연회를 제안했으나, 카델은 거절했다. 단원들에겐 연회보다 휴식이 필요하다는 이유에서였다.

국왕은 아쉬운 눈치였지만 카델의 뜻도 충분히 이해했다. 그는 연회 대신 적린 기사단이 다음 봉인 구역으로 이동하기 전까지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을 내어 주었다.

카델은 넓은 객실에서 간단한 보고서를 작성해 황제에게 보냈다. 별다른 일이 없다면 곧 다음 파견 지역이 정해질 것이다. 그곳이 어디인지는 이미 알고 있다.

식사를 거절하고, 대신 목욕을 했다. 몸을 깨끗이 닦아 낸 후엔 침대에 앉아 멍하니 창밖을 응시했다. 지는 노을을 따라 카델의 눈동자가 밝게 물들었다.

몇 시간째 똑같은 풍경을 바라보면서도 꼼짝하지 않았다. 쿤라는 마법진 분석을 위해 떠났고, 부하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휴식하는 중이었다. 카델을 방해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종종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대꾸하지 않았다.

고정된 눈빛은 공허했고, 표정은 건조했다. 텅 비어 버린 껍데기처럼, 카델은 자리에 멈춰 있었다.

“…….”

그의 고개가 움직인 것은 잔잔하던 노을빛이 완전히 가신 뒤였다. 깜깜해진 풍경에 투명한 창은 바깥이 아닌 카델의 얼굴을 비췄다. 그 모습을 외면하듯 시선을 돌린 카델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저벅저벅, 기계적인 걸음으로 방을 가로질렀다. 맥없는 손길이 문고리를 쥐고, 무겁게 돌려 당겼다.

“……단장.”

언제부터 서성였는지 모를 반이 문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카델이 먼저 문을 열 줄은 몰랐는지, 그를 바라보는 얼굴엔 당혹감이 떠올라 있었다.

“들어와.”

카델은 놀란 기색도 없이 몸을 틀며 반을 들였다. 그 덤덤한 태도에 반의 어색한 미소도 서서히 걷혀 갔다. 평소와 다른 카델의 분위기에서 무언가를 느낀 것인지, 아니면 그저 본능적인 직감일 뿐인지. 불안한 마음이 차올랐다.

그는 테이블 앞에서 카델이 내민 물컵을 받아 들었다.

“차가 없네. 사람을 부를까?”

“아뇨, 괜찮아요. 물이면 충분해요. ……계속 혼자 계셨어요?”

“응.”

“식사는요?”

“먹었어.”

카델은 태연하게 거짓말을 하며 반의 맞은편에 앉았다. 반은 무언가 말하고 싶다는 듯 몇 차례 입술을 달싹였지만, 결국 침묵을 택했다.

쓸데없이 물컵을 매만지며 카델을 힐끔거렸다. 카델은 눈을 내리깐 채 꽉 찬 물컵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피곤하실까 봐 내일 찾아오려고 했는데, 좀… 신경이 쓰여서요. 방해한 건 아니죠…?”

“응. 안 그래도 찾아가려고 했으니까.”

“힘든 일 있으면 언제든 털어놔요, 단장. 나누는 게 제가 아니라도 좋으니까. 뭐든 혼자 품으면 썩게 돼요.”

“……그냥 나 혼자 썩고 싶었는데.”

“네?”

당황스러운 대답과 함께, 그제야 카델의 시선이 반을 향했다. 익숙지 않은 잿빛 눈동자이기 때문일까. 그의 모습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내가 낯설게 느껴져?”

“…….”

“오늘만? 아니면, 예전에도 그런 적이 있었어?”

반은 카델의 질문에 담긴 뜻을 간파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자신을 향한 카델의 눈빛에는 그 어떤 단서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저 텅 빈 공동처럼 아득하기만 했다.

“내가 평소와 다른 이상한 행동을 한 적은? 이 사람이 왜 이럴까, 의아했던 적은 없어?”

“그런 건……. 단장은 원래 돌발 행동 자주 하잖아요. 사람이 언제나 한결같을 순 없는 거고. ……힘들면 누구든 안 하던 짓을 할 수 있는 거예요. 저도 마찬가지고요.”

“그래. 그렇지.”

날 선 구석도, 몰아붙이는 태도도 없다. 순순히 수긍했고, 얌전히 받아들였다. 카델은 흥분하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차분했다. 그것이 반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그땐 이상하지 않았어? 네가 낡은 여관에서 날 깨웠던 날. 숙박비를 못 내서 여관 주인이 우릴 내쫓았고, 난 용병단의 이름을 지었지.”

“기억해요.”

“네 이름을 물어봤잖아. 얼빠진 얼굴로, 이상한 행동을 하면서.”

“아…… 그랬죠. 잠이 덜 깨서 그런 거 아니었어요?”

카델은 반의 순진한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 홀린 것처럼 입을 열었다.

“그때부터 시작이었어.”

“시작이라뇨……?”

“내가 카델 라이토스의 몸을 빼앗아 대신 살아갔던 게. 그때부터였어.”

“무슨…….”

“난 카델 라이토스가 아니야, 반. 이 몸에 빙의한 다른 인간이야.”

반이 작게 눈살을 찌푸렸다. 걱정스러운 시선이 카델의 낯을 살피고,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그의 상태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카델은 조금씩 변화하는 반의 표정을 주시하며 고저 없이 말을 이었다.

“내 이름은 신여환이야.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다가 사고로 죽을 뻔했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까 이 몸에 빙의해 있었어. 눈을 뜨자마자 봤던 게 너야. 내가 살던 곳에서 얻은 지식으로 카델 라이토스를 연기할 수 있었어.”

“지금 무슨 얘기를 하는 거예요? 장난치는 거예요…?”

“빙의는 했지만 이 안엔 여전히 카델 라이토스의 영혼이 있대. 그 영혼이 내 행동에 영향을 주고 있다나 봐. 네가 날 다른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지 않은 건 그 이유겠지.”

“단장?”

“반씩 섞여 있대. 내 영혼과 카델 라이토스의 영혼이 반씩 섞여서 이 몸을 유지하고 있는 거래. 그런데 내 영혼이 이 몸을 떠나도, 떠나지 않아도……. 카델 라이토스는 죽게 된대.”

“단장, 잠깐만요. 멈춰 봐요. 왜 이러는 거예요?”

“그래서 나는 어떻게 해도 너한테 진짜 카델 라이토스를 돌려줄 수 없게 됐어. 그런데 있잖아, 사실은…… 처음부터 돌려줄 생각이 없었어. 계속 이 몸으로 살아가려고 했어.”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 늘어 갈수록 카델의 음성이 조금씩 떨렸다. 창백하게 질린 그의 낯빛만큼 반의 표정도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쉼 없이 얘기하는 카델을 저지하려 했다. 하지만 카델은 잡히지 않았고, 대신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반의 눈빛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미안해. 지금까지 속여 와서 미안해. 역겨운 놈이라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왜……. 단장, 그만…….”

“끝까지 숨기지 못해서……. 나 혼자 썩지 못해서 미안해…….”

“일어나요. 제발. 제발요, 단장, 그만해요.”

바닥을 짓찧는 머리를 떼어 내고, 그를 잡아당겼다. 버티는 것도 무시한 채 힘으로 끌어내자, 카델이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탁한 눈동자 위로 어느새 눈물이 고여 있었다. 반이 그 눈물을 닦아 주려 했으나, 카델은 고개를 저었다.

“이해가 안 되지? 안 믿길 거야. 그렇지?”

“…….”

“지금 늪지대로 가자. 거기 쿤라가 있거든. 쿤라가 모든 걸 설명해 줄 거야. 적룡의 말이라면 믿을 수 있지?”

“카델.”

“가자. 빨리.”

카델은 반에게 붙들린 팔을 뺄 생각도 않은 채 문을 향했다. 자신을 끌어당기는 필사적인 힘에, 반의 눈가가 작게 떨렸다.

“가야 해. 제발 가 줘, 반. 응?”

보이는 것은 뒤통수뿐이었으나, 반은 그가 울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랬기에 버티지 못했고, 그에게 끌려가듯 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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