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따가각. 따각. 따가각.
뼈가 맞물리는 경쾌한 소리가 늪지대를 메웠다. 점점 가까워지는 소음과 함께, 개미 떼처럼 몰려든 마물 군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놈들의 전신에는 멘델과 비슷한 뼈 갑옷이 둘러져 있었고, 투구 사이로 드러난 눈동자는 검은색 횃불 같은 음침한 광휘를 발산했다. 그들은 늪을 당당히 가로지르면서도 가라앉지 않았다.
안개처럼 흩날리는 검은 꽃잎과 사위를 둘러싼 마물 군단의 모습에선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불길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들의 수를 셈하는 카델의 눈빛은 차분하기만 했다.
‘트롤이나 오우거처럼 덩치 큰 놈은 없어. 마물 종류로만 따지자면 전부 잔챙이일 뿐이다. 쓸 만한 마물은 이미 다 흡수해 둔 모양이군.’
보호막으로 변환시키기 위해 기다렸던 인간들이 이렇게까지 본인을 몰아세울 줄은 예상하지 못했을 테다.
언제나처럼, 마족의 패인은 오만이다.
카델이 눈짓하자 반과 루멘, 라이돈이 곧장 적진으로 돌격했다. 보통이라면 속공과 강공, 마법이 난자하며 한 차례 마물을 휩쓰는 것이 정상이겠으나, 그들은 가르엘의 마기 장판에서 벗어나지 않은 채 다가오는 마물만을 상대했다.
기운을 두른 공격이 정직하게 마물을 내리찍고, 그대로 튕겨 나가길 반복했다. 그들의 공격은 마물의 뼈 갑옷에 흠집 하나 남기지 못했다. 언뜻 보면 속수무책으로 밀려나며 궁지에 몰리는 것 같았다.
적어도 멘델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사방에 만연한 검은 꽃잎 때문에 마기 장판을 벗어나지 못하고, 적당한 공격으로는 뼈 갑옷을 부술 수 없다. 저대로 장판에 머무른 채 전투를 이어간다면, 저들은 몰려오는 마물 군단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암기 사용자는 보이지 않는군. 저건…… 마법사인가? 뭔가를 준비하고 있는 것 같긴 한데.’
공중에서 전황을 살피던 멘델의 시선이 카델을 향했다. 지금껏 딱히 두각을 드러내지 않던 인간이었다. 전투 인원보단 책략가에 가까워 보였으나, 사용할 수 있는 말이 없다면 수백 가지의 술수도 무용해질 터.
잡종을 죽이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멘델은 망설임 없이 첫 번째 타깃, 가르엘의 위로 하강했다.
봉인진과 마기 장판의 사이.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은 경계의 바깥이 가르엘의 위치였다. 그는 지면을 강타하며 착지한 멘델을 바라보았다. 흩날리는 꽃잎들이 가르엘의 뺨을 할퀴어 댔으나, 곧장 마기가 피어오르며 상처가 수복되었다.
“도와 달라고 울부짖어도 소용없을 겁니다. 당신의 동료도, 당신도. 이미 죽은 목숨이니.”
천천히 고개를 치켜든 멘델이 오른손을 들자, 비어 있던 손안에 새로운 채찍이 생겨났다. 가르엘은 검도 들지 않은 채 멘델을 응시했다. 카델에게 자신 없다며 엄살을 피울 때와는 달리, 그의 표정은 냉혹하리만치 서늘하게 굳어 있었다.
“어절마다 썩은 내가 풍기는군.”
“아무렴, 반쪽짜리 마족만 할까요. 아무리 보호막이 궁해도 잡종까지 흡수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만……. 태생적인 불경함이 기어코 제 심기를 건드리는군요.”
고요히 미소 짓는 멘델의 앞에서, 가르엘 역시 피식 조소를 터뜨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마족에게는 혼혈인 내 존재가 불경한가? 그 점은 마음에 들어. 그쪽에게 환영받으면 어쩌나, 내심 걱정하던 중이었거든.”
가르엘의 반신을 뒤덮고 있던 마기가 폭발적으로 팽창하며, 어떤 형상을 띠었다. 그것은 거대한 야수의 앞발 같기도 했고, 교활한 악마의 손아귀 같기도 했다.
위협적으로 드리운 마기의 기운에, 멘델의 입가에 맺혔던 미소가 사라졌다. 채찍을 팽팽하게 당긴 그의 손등에 힘줄이 돋았다.
“당신에게 마족의 힘을 남긴 그 역겨운 자의 이름을 알려 주시죠.”
“몰라. 알았다면 내가 먼저 찾아가 죽였겠지.”
“……그렇습니까.”
더 이상의 문답은 필요치 않다. 잡종의 부모를 찾아낼 수 없다면, 잡종을 죽여 대를 끊으면 될 일.
마기를 응축시킨 채찍이 허공을 베듯이 날아들며 가르엘의 목을 노렸다.
*
그렇게 가르엘과 멘델의 공방이 시작된 시점. 카델은 모든 준비를 마쳤다.
‘확실히 8성이 되니 다르긴 다르네.’
8성의 경지는 그의 스승인 마밀 키파가 ‘대마법사’라 불리던 시절의 경지였다.
물론 마력이 여러 속성에 배분된 카델보다는 오로지 화염만을 사용하는 마밀의 파괴력이 더 높긴 하겠지만, 그럼에도 8성 마법사가 가지는 격은 여전했다.
6성과 7성, 8성과 9성. 숫자로 보면 고작 1이 늘어났을 뿐이다. 하지만 그 한 단계를 오르기 위해선 피나는 노력과 경험, 악착같은 배움과 천부적인 재능이 필요했다. 그 모든 것을 충족했을 때에야 비로소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난 주인공 버프를 받긴 했지만, 그만큼 고생하니까 딱히 이득 본 느낌은 없어.’
자신이 성장한 만큼 상대하는 적들의 수준도 높아지고 있으니 말이다. 만약 멘델을 상대하기 전에 ‘비타의 심장’을 발견하는 행운이 없었더라면, 이번 계획에 차질이 생겼을지도 몰랐다.
“요젠.”
카델의 부름에 내내 모습을 감추고 있던 요젠이 나타났다. 여전히 기척은 없었으나, 카델은 자신의 뒤에 선 그를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지금부터 시작할 거니까, 미리 준비해 둬.”
“알겠어.”
요젠의 평온한 대답이 귓전을 울리고. 카델은 지금껏 멘델의 눈을 피해 은밀하게 진행해 온 마법을 개방했다.
[화마의 화살]
실로 오랜만에 사용해 보는 화염 마법이었으나, 위력은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다.
카델의 가벼운 손짓에 꽃잎과 마기, 미리 흩뿌려 둔 암흑 마력이 밀려났다. 하늘을 가리던 어둠을 밀치자 드러난 것은, 상공을 채운 광염의 향연.
‘화살 하나하나에 마력을 듬뿍 넣어 줬다고. 기쁘게 죽어라, 멘델.’
그의 흐뭇한 미소와 함께, 장전된 수백 개의 화살이 재앙처럼 쏟아져 내렸다.
승기는 확실했다.
잡종의 마기가 예상보다 격이 높기는 했으나, 자신은 보호막을 마물에게 양도한 대신 녀석들의 갑옷이 사라지기 전까지 무적이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생명력을 곳곳에 뿌려 둔 것이다. 흩뿌려진 기운이 소멸하지 않는 이상, 껍데기나 다름없는 이 육신은 죽지 않는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잡것들에게 목숨을 맡기는 대신 불사의 몸을 얻는다. 즉, 자신이 잡종에게 패할 일은 없다.
그것을 의심치 않았는데.
“저건……!”
전혀 의식하지 않고 있던 하늘에서부터, 가공할 만한 마력을 품은 불화살이 쏟아져 내렸다. 화살이라기엔 가느다란 빗줄기에 더 가까웠으나, 멘델은 느낄 수 있었다.
‘범재의 수준이 아니다. 최소 8성의 위력……. 대체 어디서 저런 마법이 나왔단 말인가?’
계속해서 자신과 공방을 펼치고 있던 잡종은 아니다. 검기 사용자도, 오라 사용자도 아닐 테다. 다음으로 요정이 의심되나, 놈은 얼음 마법 사용자였다. 그렇다는 건.
‘저 인간이 벌인 짓이군.’
여태 조용히 숨죽이고 있던 마법사. 단순 책략가로서 인간들을 이끌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그건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으음, 언제 봐도 단장님의 마법은 대단하단 말이죠.”
가르엘은 대놓고 한눈을 팔며 카델의 마법에 감탄했다. 그러는 동안 그의 몸에 남은 생채기는 차근차근 재생되고 있었다. 최선을 다해 방어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재생 능력이 상처의 수를 따라잡지 못했다.
만약 시간을 오래 끌어야 했다면 좋은 꼴은 보지 못했을 테다. 흐뭇하게 불화살을 바라보던 가르엘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안심하지 마십시오, 잡종. 대단한 마법이기는 하나, 저 공격이 나의 보호막을 부수는 것보다 내가 그대의 목숨을 거두는 게 빠를 테니.”
만만치 않은 위력이지만, 지상의 동료들을 생각한다면 함부로 마법의 강도를 높일 수 없다. 마물의 갑옷을 꿰뚫기 위해선 한 마리당 열댓 개의 화살을 꽂아야 할 것이다. 게다가 아무리 대단한 마법사라도 저 정도 광범위 마법을 오래 유지할 수는 없다. 마력이 남아나지 않을 테니.
신경 쓸 것 없다. 당장 마법사를 해치운대도 잡종이 있는 이상 회복의 여지는 충분하다. 그러니 예정대로…….
“다시 보지 그래.”
“……?”
“누가 봐도 내 목숨보단 네 보호막이 먼저 부서질 것 같은데.”
순간, 전신을 짓누르는 풍압이 느껴졌다. 그가 일으킨 바람이 아니었다. 멘델의 눈이 작게 흔들리며, 그의 시선이 다시금 하늘을 향했다.
‘바람이… 불화살의 속도를…….’
마력이 담긴 바람이 불화살을 휘감으며 낙하의 속도를 높이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바람으로 몸집을 키운 불꽃은, 인간들이 선 자리를 모조리 비껴가며 마물만을 노렸다.
억수처럼 쏟아지는 불화살 속에서, 마물 군단의 갑옷은 얇은 껍질에 싸인 과육처럼 툭툭 터져 나갔다.
“어째서…….”
저자가 다속성 마법사라는 것은 그다지 충격적이지 않았다. 멘델을 혼란스럽게 만든 것은, 그의 마법이 위력과 속도, 제어력을 모조리 갖춘 결점 없는 마법이라는 것이었다.
‘저 정도의 실력자가 지금껏 발톱을 숨기고 있던 이유는 뭐지……?’
광역기를 준비하기 위해서? 저 한 번의 마법을 위해 지금까지 힘을 비축했다는 말인가?
가장 가능성이 큰 얘기였지만, 그 말인즉슨.
‘나의 수를 전부 파악하고 있었나.’
뒤늦은 깨달음이었다. 멘델의 얼굴에 노기가 어렸다.
그랬다. 그랬던 것이다. 첫 공방부터 느꼈던 기시감의 정체는, 다름 아닌 저 마법사였다. 원래라면 저들은 자신의 기술을 파악하지 못하고 헤매야 옳았다. 그사이 모조리 흡수당해 죽었어야 했다.
멘델 할리에프라는 마족의 능력이 인간계에 알려졌을 리는 없으니까. 자신을 상대했던 인간들은 대부분 흡수되어 그대로 보호막이 되었고, 살아남은 일부조차 멀쩡히 돌아가지 못했다. 온전한 정보가 남아 있을 리 없었다.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저 마법사는 아니었다. 대체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처음부터 자신의 모든 기술을 간파하고 있었다. 모든 것을 대비하여 차례차례 격파한 것이다.
공격이 제대로 먹히지 않았던 건, 그들이 제법 뛰어난 실력을 갖췄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잡종의 힘으로 운 좋게 버티고 있는 것이라 여겼다. 인간들에게서 우월한 마기의 힘을 빼앗으면, 속절없이 무너지리라. 그것이 그들이 가진 전부일 것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틀렸다.
‘누구보다 먼저 저 마법사를 죽여야 했다……!’
보호막이 실시간으로 파괴되는 것이 느껴졌다. 수 초 안에 모든 보호막이 파괴될 것이다. 그 안에 잡종의 회복력을 웃도는 기술을 준비하는 것은 불가능. 멘델의 살기가 대번에 카델을 향했다.
이 마법을 막아야 한다.
흩어져 있던 꽃잎들이 휘몰아치며 멘델의 채찍으로 모여들었다. 철심처럼 빳빳해진 채찍의 위로, 처음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농도의 마기가 뭉쳤다.
위험을 느낀 가르엘이 반사적으로 몸을 물렸으나, 꼿꼿하게 선 채찍의 궤도는 그를 아슬아슬하게 스치며 전혀 다른 곳을 노렸다.
카델이 있는 방향이었다.
마기를 뻗어 보호하기에는 너무 먼 거리다. 망설임은 없었다. 가르엘은 제 옆을 스치는 채찍을 맨손으로 낚아챘다.
총탄처럼 쏘아진 채찍이 가르엘의 손바닥에 깊고 긴 절상을 남겼다. 안타깝게도 그가 멘델의 공격을 멈춘 것은 찰나에 불과했다. 채찍은 고작 몇 초 동안 가르엘의 손바닥을 가르며 속도를 늦췄을 뿐, 멘델의 기세는 전혀 죽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처음부터 멘델에게 주어졌던 시간은, 고작 몇 초였을 뿐이므로.
“어, 째서…….”
멘델의 턱에 가느다란 선혈이 흘렀다. 새까만 눈동자에 선명하게 맺혔던 살기가 서서히 탁해졌다. 힘 빠진 고개가 수그러지며, 제 심장을 관통한 암기를 바라보았다.
보호막이 모조리 파괴된 바로 그 순간을 노린, 단 1초의 오차도 없는 완벽한 일격.
‘끝까지… 놀아났다는 건가…….’
자신은 그저, 저 마법사의 손바닥 위에서 잘난 듯이 채찍을 휘두르고 있을 뿐이었나.
‘죽여야 한다.’
멘델은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이곳에서 그를, 이들을 살려 둔다면. 마족은 대업을 이룰 수 없다. 필시 저지당할 것이다. 또 한 번의 비극을 맞이할 것이다.
볼품없이 떨리는 손아귀에 힘을 주고, 제 안의 모든 생명력을 한 톨도 남기지 않고 끌어모았다. 죽음을 대가로 한 일격이라면, 적어도 마법사만은 길동무로 삼을 수 있다.
“죽, 어라…….”
그러나.
“그건 안 돼.”
최후의 일격은 없었다. 심장을 꿰뚫은 단검이 자비 없이 위로 솟구치며, 뒤통수를 갈랐다. 멘델의 몸뚱이가 기울어짐과 함께 뒤편에 자리한 요젠의 모습이 드러났다.
“미, 미안합… 에밀, 리아…….”
요젠은 쓰러지려는 멘델을 붙든 채 그의 목에 단검을 쑤셔 박았다. 축 늘어진 멘델의 몸뚱이가 짧게 경련한다 싶더니, 이내 모든 움직임을 멈췄다.
“그걸로 충분합니다, 요젠 경. 이제 죽었어요.”
“……마족도 인간이랑 크게 다르진 않네.”
가르엘은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깔끔한 요젠의 얼굴을 바라보며 씨익 미소 지었다.
“죽음 앞에선 만물이 평등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