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기?”
인간들의 협공이 생각보다 효과적이란 것도 놀라웠으나, 그보다 충격적인 것은 전장의 바닥을 뒤덮은 마기였다. 당연히 제 것은 아니다.
멘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마기의 주인, 가르엘을 향했다. 암흑 마력에 가려져 모습이 흐릿하나, 동류의 힘을 다루는 자로서 알아보지 못할 이유가 없다.
‘고위 마족의 마기와 비슷하나, 미묘하게 종류가 다르군. ……혼혈인가.’
이 정도 농도의 마기를 사용할 수 있다면 필시 힘 있는 마족의 피가 섞였을 터. 그 정도의 마족이 열등한 인간과 몸을 섞어 핏덩이를 낳았다니. 역겹기 짝이 없었다.
당장이라도 눈앞에 있는 마족의 수치를 찢어 죽이고 싶었으나, 안타깝게도 멘델에겐 여유가 주어지지 않았다.
“빌어먹을, 라이돈! 얼음 창을 나한테 쏘면 어쩌잔 거냐!”
“흐응, 모함하지 마, 반. 내가 쏜 게 아니라 반이 끼어든 거잖아?”
자신의 기술을 어떻게 간파했는지는 몰라도, 전장에 깔린 마기는 인간들을 실시간으로 회복시키고 있었다.
‘남의 상처를 치료하는 마기라니. 실로 불쾌한 잡종이다.’
그들의 살과 피, 기운을 흡수해야 할 꽃잎은 빠르게 수복되는 상처와 사라진 장막에서 무엇 하나 얻어내지 못했다. 그 탓에 진작 제압했어야 할 인간들이 맹렬한 기세로 이쪽을 조여 오고 있었다.
‘특별히 신경 써야 할 인간은 날 기습했던 암기 사용자다. 어디 있지?’
요정의 마법,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방대해지는 오라, 눈으로 좇기가 불가능한 검기, 거슬리는 마기. 모든 것이 위협적으로 다가왔으나, 멘델은 그중 가장 위험한 것은 요젠의 암기라고 판단했다.
제아무리 간을 보던 상황이었대도 방심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암기가 제 목을 꿰뚫을 때까지, 그는 아무런 기척도 감지하지 못했다. 이 현란한 협공 속에서 잠시라도 틈을 내어 준다면. 치명상을 피할 수 없다. 꽃잎이 무용해진 시점에선 더더욱 위험했다.
일단 암기 사용자를 견제한 뒤, 보호막의 손실을 최소화하며 잡종을 처리한다.
그것이 멘델의 계획이었으나.
까드드득. 콰즉.
“……?”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멘델은 일순 채찍을 휘두르던 것을 멈춘 채 왼팔을 내려보았다.
그것은 뒤틀리고 있었다. 마치 검은 꽃잎이 다른 생명체의 기운을 흡수하듯, 그의 왼팔이 자리한 공간이 통째로 일그러진 것이다.
왼팔에서부터 괴악한 압력을 동반한 격통이 느껴졌다. 멘델의 새까만 눈알이 뻑뻑한 시선을 움직였다. 그리고 그곳에는, 속도에 비해 힘이 부족하다 평가했던 인간 검사가 자리하고 있었다.
“역시 가만히 있는 돌덩이를 상대할 때보단 까다롭군. 더 연습해야겠는걸.”
그는 반쯤 뽑힌 검을 천천히 납검했고, 그와 동시에.
“제법…이군요.”
멘델의 왼팔이 흔적도 남지 않고 ‘소멸’했다. 보호막을 포함한 그의 재생력을 모두 무시한 채 팔 한쪽을 날려 버린 것이다. 그러고도 거리를 벌리지 않았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공격을 피할 수 있다는 걸 과시하듯이.
꽃잎에 둘러싸인 검사의 육체는 살점이 조금 베이기가 무섭게 재생하며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생각이 바뀌었다. 아무래도 저 잡종부터 처리해야겠어.’
자신이 전력을 다하지 않은 만큼, 인간 측도 힘을 숨기고 있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잠시 간과했다. 그들의 움직임을 봉쇄하고 전부 흡수하기 위해서는 잡종의 처리가 최우선이었다.
판단을 내린 멘델의 주위로 회오리가 휘몰아치며, 몸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그를 따라가듯 요정이 날아올랐으나, 얼마 안 가 주춤하며 빠르게 거리를 벌렸다.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건가? 아니면, 누군가 나의 기술을 파악해 경고했는가.’
전투를 시작한 뒤부터 내내 누군가에게 수를 읽히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만약 그것이 가능한 자가 있다면, 그건 절반이라도 마족의 피를 이은 저 잡종일 터.
새까만 눈동자의 안광이 번뜩이며, 멘델이 일으킨 폭발적인 광풍이 늪지대를 휩쓸었다. 그와 동시에, 그의 육체에서부터 무수한 뼛조각들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스스로를 분해하듯 방출된 뼛조각들은 그대로 바람에 날려 늪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확실하게 죽여야 한다.’
따로 고립시킬 수만 있다면 반쪽짜리 잡종 따위, 죽이는 건 일도 아니었다. 바로 이곳에서 마족의 긍지를 더럽힌 실패작을 엄벌하리라. 그 통쾌한 미래를 떠올린 멘델의 눈동자가 초승달처럼 얇게 휘어졌다.
자신의 생명 일부를 대가로 아군의 방어력을 대폭 증가시키는 동시에, 아군이 전멸당하기 전까지 일시 무적 상태를 유지하는 멘델의 궁극기.
[뼈의 축제].
카델이 멘델의 출현을 예상했을 때부터 줄곧 경계하고 있던 기술이었다.
“우웩, 마물 냄새.”
라이돈은 속이 거북하다는 듯 오만상을 찌푸린 채 코를 틀어막았다. 카델로부터 ‘멘델에게 접근하지 마라’는 명령을 들은 뒤, 기사단은 전부 봉인진 앞에 집결한 상태였다.
그런 그들의 위에는 약해지는 바람을 따라 서서히 하강 중인 멘델이 있었다. 한 차례의 거한 방출을 마친 그의 모습은 기묘하게 변해 있었다.
입고 있던 옷을 대신하여 전신을 뒤덮은 기괴한 뼈 갑옷. 머리에는 황소 뿔이 달린 두개골이 투구처럼 자리했고, 날개 위에는 촘촘하게 얽힌 잔뼈가 기다랗게 뻗쳐 있었다. 루멘이 소멸시켰던 왼팔에도 의수처럼 뼈대가 재생됐다. 뼈마디가 멋대로 휘어진 갑옷의 형태는 섬뜩한 아름다움을 자아냈다.
“……음침한 꼴이군. 달갑지 않은 일이 벌어질 것 같은데. 어쩔 생각이야, 대장?”
멘델을 주시하던 루멘의 시선이 카델을 향했다. 멘델의 변신이 끝나가고 있음에도 카델은 정좌를 튼 채 침묵을 고수하는 중이었다.
이번 전투에서 카델은 기사단 엄호를 제외하곤 직접 힘을 쓰지 않았다. 여유를 가진 지휘는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고, 그 덕에 기사단은 전투 내내 최소한의 피해를 유지할 수 있었다.
누구에게도 치우치지 않은, 그야말로 ‘협동’이라 할 만한 싸움. 그러니 마지막까지 이 기세를 빼앗겨선 안 된다.
카델은 질문에 대한 답 대신 라이돈을 돌아보며 말했다.
“라이돈. 몇 마리 정도 몰려오는 것 같아?”
“최소 200. 흐응, 그새 냄새가 더 짙어졌네. 토할 것 같아! 다른 놈들보다 훨씬 역겨워. 가르엘로 단련하지 않았으면 바로 토했겠는걸?”
“이런, 오해의 소지가 있는 발언은 삼가시죠, 라이돈 경.”
멘델의 보호를 받는 마물이 최소 200마리. 예상보다 나쁘지도, 그렇다고 좋지도 않은 숫자다. 카델은 새로운 동료인 요젠에게 제 청결함을 증명하려고 드는 가르엘을 불러 세웠다.
“이쪽이 마물을 상대하는 동안 멘델은 널 노릴 거야, 가르엘.”
“뭐, 역시 그렇겠죠. 어딜 가나 치유사는 가장 성가신 존재니까.”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 마물을 전부 해치우기 전까진 멘델은 무적이나 마찬가지지.”
“……쿤라 님의 정보인가요?”
“그래.”
“그렇다는 건…….”
“10분. 그동안 누구 재생력이 더 뛰어난지 대결해 봐.”
멘델이 소환한 마물들은 보통의 마물과는 다르다. 카델이 미리 멘델의 기술을 알지 못했다면, 토벌에는 한 시간이 넘는 시간이 소요됐을 수도 있다. 한 시간이나 멘델의 집중 포격을 버텨야 한다면 제아무리 가르엘이라도 안전을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10분이라면 충분히 해 볼 만했다.
카델은 자신 없다는 듯 뺨을 긁적이는 가르엘에게 손짓했다. 그리고 허리를 숙인 그의 멱살을 움켜쥐어 코앞까지 끌어당겼다.
“단장님…? 설마 응원의 키스…….”
“네가 마기를 받아들이고, 그 힘으로 최선을 다해 싸워 보려 한다는 건 알아.”
“…….”
“하지만 그렇다고 네가 여태껏 쌓아 온 힘을 새롭게 봉인하지는 마. 마기와 빛 마력. 그 둘을 함께 사용할 수 있다는 게 네 독보적인 이점이니까.”
기대했던 응원의 키스는 없었으나, 물러난 가르엘의 표정은 멍하니 풀려 있었다. 카델은 경직된 그를 뒤로한 채 나머지 부하들에게 새로운 계획을 전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