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8화 (268/521)

카델이 쿤라를 부르자, 그의 의식이 카델에게로 집중되었다. 곧장 마법진의 정체를 파악한 쿤라가 본격적인 조사에 착수하려 했으나, 카델은 그를 저지했다.

“조사는 나중에 하고, 지금은 고위 마족부터 해치우죠. 당신 힘이 필요하거든요.”

불만스러운 눈치였지만, 편의를 봐줄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렇게 탐색을 마무리 지을 즈음, 요젠이 돌아왔다. 그는 평소보다 아주 약간 기분 좋아 보이는 미소와 함께 카델에게 손에 든 것을 내밀었다.

“신기한 식물이더라.”

비타의 심장이었다. 요젠의 손바닥 위에 올라간 황갈색 덩어리는 얼핏 평범한 광석 같아 보이기도 했으나, 주의 깊게 보면 미세하게 박동하고 있었다. 표면에 발린 역겨운 진회색 점액은 덤이었다.

“고, 고맙다…….”

머뭇거리며 그것을 집어 들자 촉감만으로도 속이 거북해져 헛구역질이 나왔다.

‘이걸 먹어야 한다는 거잖아.’

도저히 이대로는 먹을 수 없어 옷자락에 박박 문질러 닦아 보았으나, 끈적이는 점액은 좀처럼 떨어질 줄을 몰랐다.

카델은 단원들과 멘델이 대치 중인 봉인진으로 향하는 내내 [비타의 심장]을 강박적으로 닦아냈다. 그리고 봉인진에 도착한 직후.

[히든 아이템 [비타의 심장]을 섭취하였습니다.]

[육체에서 놀라울 정도로 강렬한 마력의 흐름이 느껴집니다!]

[마법 성취도가 ??? 증가합니다.]

[축하드립니다! 칭호 [8성 마법사] 획득 완료!]

그는 고위 마족 ‘멘델 할리에프’와의 본격적인 전투에 앞서, 한 단계 높은 경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메인 퀘스트 ‘죽음의 꽃’ 수락 완료!]

[퀘스트를 클리어하여 스토리를 진행하십시오. 보상이 주어집니다.]

[실패 시, 무작위 기사가 소멸합니다.]

*

‘지금부터 시작이다’라는 외침을 이해하긴 힘들었으나, 단원들은 카델의 명령을 따라 즉시 멘델과의 거리를 벌렸다.

[화련]에 붙들린 멘델의 고개가 툭 떨어졌다. 암기에 꿰뚫린 목은 금방이라도 바닥에 곤두박질칠 듯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멘델의 몸에서부터, 무수한 뼛조각이 폭포와 같은 기세로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얼핏 멘델의 몸이 뼛조각으로 변하는 것처럼 보일 만큼 방대한 양이었다. 그 공격적이기까지 한 기세에 멘델은 물론 그를 묶은 사슬까지도 순식간에 파묻혔다.

그와 동시에 불어오는 바람. 봉인진 근처를 부유하던 ‘검은 꽃잎’들이 멘델을 중심으로 휩쓸리며, 또 한 번 소용돌이가 만들어졌다.

“가르엘! 마기를 준비해!”

카델은 멘델의 변화를 주시하는 단원들을 뒤로 물리며 가르엘을 불렀다. 설명을 구하는 눈빛을 보내는 가르엘을 끌어당긴 그가 침착하게 말했다.

“지금부터 넌 전장을 아우르는 마기의 장판을 생성해야 해.”

“마기의 장판이요……?”

“네 치유 능력을 그 장판 위로 모조리 쏟아부어. 가능하다면 아군과 멘델을 구분해서 아군에겐 회복을, 멘델에겐 공격을 가하면 좋겠지만, 힘들다면 회복에만 전념해.”

“……묻고 싶은 게 많지만 그중 하나만 꺼내 보자면, 단장님. 전 ‘마기의 장판’ 같은 걸 만들어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만.”

가르엘이 곤란하다는 듯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자신 없다는 태도였으나, 카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넌 할 수 있어. 내가 장담하지.”

“하하……. 물론 단장님의 총애를 받는 건 기쁘지만요.”

“격려가 아니야, 확신이다. 너밖에 할 수 없어.”

“그렇게까지 말하면 제가 약한 척을 할 수가 없잖습니까.”

가르엘의 실력을 믿는 것과는 별개로, 멘델을 상대하는 데 있어 그의 회복 능력은 거의 필수적이었다. 그가 해낼 수 없다면, 이번 전투의 난이도는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하게 된다.

소용돌이가 잦아들고 있었다. 그와 함께, 카델은 멘델을 묶어 놓은 [화련]의 힘이 약해지고 있음을 느꼈다.

‘잡아 둘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카델은 차근차근 기술을 준비 중인 가르엘을 일별했다. 게임 속에선 [재생의 공간]이라 불리던 기술이었다.

태생 S급 기사이긴 하지만, 가르엘이 마기를 받아들인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짧은 시간 내에 마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것은 아무리 그라도 무리가 있었고, 몇 번의 시행착오는 불가피하리라.

‘[화련]이 끊기기 전까진 완성해 줬으면 하는데.’

가르엘이 끝내 성공하지 못할 경우도 대비해 두어야 했다. 카델은 펜던트를 쥐어 쿤라의 힘을 끌어냈다.

순식간에 아군을 뒤덮은 비늘 갑옷. 흩어지는 소용돌이를 따라 고조되는 분위기에, 루멘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제 슬슬 저 녀석이 어떤 능력을 가졌는지 알려 줄 때도 되지 않았어? 대장.”

“시간 없으니까 간단하게 설명할게. 놈을 둘러싸고 있는 저 ‘검은 꽃잎’에 닿으면 기운이든 몸이든 전부 뜯겨 나가 그대로 멘델의 ‘보호막’이 된다. 그러니 이쪽은 멘델의 보호막을 전부 부수고, 본체를 섬멸할 때까지 꽃잎에 닿아선 안 돼.”

“꽃잎에 닿아선 안 된다니…….”

사방으로 넘실대는 꽃잎의 향연은 피한다고 피해지는 게 아니었다. 저것을 전부 회피하며 멘델을 공격하는 것이 가능하긴 한 것인가. 그에 대한 카델의 대답은 명료했다.

“물론 그런 게 가능할 리 없으니까 가르엘이 필요한 거다. 꽃잎에 닿은 육체가 훼손되기 전에 재생시키는 것. 그게 이번 전투의 핵심이야. 가르엘이 실패한다면, 누구든 팔 한쪽 정도는 내놓을 각오를 해 두는 게 좋을 거다.”

물론 그런 상황이 오지 않도록 최대한의 방비를 해 둘 테지만 말이다.

그러한 카델의 속을 알 리 없는 가르엘은 자신에게 부여된 막중한 임무에 쓴웃음만 지을 뿐이었다.

“부담스러워서 눈물이 나올 것 같은데요, 단장님.”

전투의 재개를 알린 것은 멘델이었다. 사라진 소용돌이의 안쪽에는 산처럼 쌓인 뼛조각과 그 안에 파묻힌 [화련]의 불꽃만이 보였으나, 멘델의 음성은 확실하고도 생생하게 일행의 귓전을 울렸다.

“역시 마물로 만든 보호막엔 한계가 있군요. 인간의 것으로 보강하고자 기다리던 중이었는데……. 봉인진을 방치한 보람이 있습니다.”

뼛조각들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함께 [화련] 역시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팽팽하게 당겨졌다. 카델은 억지로 [화련]을 유지하려 들지 않았고, 가차 없이 뜯긴 불의 사슬은 그대로 늪 아래로 가라앉았다.

이윽고 서서히 무너지는 뼈 무덤 속에서, 멘델이 등장했다. 다시 나타난 그에게선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폭발적인 기운이 느껴지고 있었다.

“전부, 먹어 치워 드리죠.”

멘델의 오른손엔 지금껏 사용하지 않던 채찍이 들려 있었다. 장미처럼 뾰족한 가시가 돋아난 채찍에서는 짙은 마기가 일렁였고, 멘델이 그린 궤적을 따라 검은 꽃잎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라이돈! 넌 가르엘의 기술이 완성될 때까지 나랑 같이 엄호에 집중한다! 나머지는 틈을 노려!”

채찍의 움직임은 일반적인 속도를 훨씬 웃돌았다. 고작 하나의 채찍이 만들어 냈다고는 믿기지 않는 수십 개의 잔상이 순식간에 일행을 덮쳐 오기 시작했다.

카델은 다급히 기사단을 보호하는 바람의 장막을 둘렀고, 라이돈은 눈보라를 일으켜 다가오는 꽃잎을 몰아냈다. 그러나 사방에 넘실대는 꽃잎을 전부 떨쳐 내는 데엔 무리가 있었다.

“장막이……!”

멘델에게 접근하던 반의 시야 속으로 미처 떨쳐 내지 못한 검은 꽃잎들이 들어찼다. 꽃잎은 카델의 바람 장막에 닿자마자 장막을 통째로 일그러뜨리기 시작했다. 마치 기운을 흡수하듯, 장막의 마력이 몽땅 꽃잎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빠르게 몸을 틀어 꽃잎에서 벗어났으나, 벗어난 곳에도 꽃잎은 가득했다. 꽃잎은 얕게 스치는 것만으로도 탐욕스럽게 아가리를 벌리며 달려들었다. 장막이 사라져도 남은 비늘 갑옷이 방어해 주었으나. 꽃잎에 닿아 한 점씩 떨어져 나가는 비늘의 모습을 보며, 반은 깨달았다.

‘이건 적룡의 힘으로 만들어 낸 갑옷이다. 꽃잎이 갑옷의 기운을 흡수한다면, 멘델의 보호막은 마물로 만든 것 따위완 비교도 되지 않게 단단해질 거야.’

갑옷에 의지할수록 멘델의 보호막은 더욱 단단해진다. 여기선 상처를 입더라도 갑옷을 포기하는 것이 옳았다. 그리 생각한 반이 카델을 찾아 고개를 돌리자, 곧장 시선이 마주쳤다.

그리고 그 짧은 눈 맞춤 속에서, 반은 카델 역시 이미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다만 그는 마기의 장판도, 최소한의 보호막도 없는 전장에 부하들을 맨몸으로 보낼 수 없었을 뿐이었다.

금세 보충된 바람 장막을 감지한 반이 대검을 고쳐 쥐었다. 만약 멘델에게 항복하는 일이 벌어진대도, 카델은 결코 그들을 사지로 내몰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여기서 부하인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단장의 판단을 믿고 적에게 집중하는 것.

멘델의 채찍질은 멈추지 않았고, 점점 증식하는 꽃잎 사이사이로 검기와 암기가 휘몰아쳤다. 멘델과 가까워질수록 꽃잎의 수가 늘어난다. 근접전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반과 루멘, 요젠은 장막이 버텨 주는 한도 내에서 기운을 쏘아 날렸다.

이 전투는 특히나 요젠에게 까다로웠다. 이처럼 ‘접촉해서는 안 되는’ 것들이 전장을 채운 상태에선 움직임이 소극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다. 정면돌파를 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요젠이 실력을 발휘하기 위해선 나머지 단원들의 힘이 필요해. 가르엘은…….’

초마다 소멸하는 장막을 재생성하며, 카델은 마기를 개방한 가르엘을 바라보았다. 빈말로라도 빠르다곤 할 수 없었으나, 가르엘의 마기는 착실하게 늪을 뒤덮어 가고 있었다.

그의 역안에선 검은 불꽃이 타올랐고, 왼쪽 반신을 뒤덮은 마기는 기묘한 곡선을 그리며 점점 몸집을 부풀렸다.

반신이 마기로 불타오르는 실로 악귀 같은 형상이었으나, 카델을 돌아보는 그의 눈빛에선 조금의 악의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렇게 하면 될까요? 단장님.”

잔잔한 파문처럼 번진 마기가 어느새 전장을 모조리 뒤덮었다. 이만하면 범위는 충분하다. 판단과 동시에 비늘 갑옷과 장막을 해제한 카델이 가르엘의 주위로 암흑 마력을 퍼뜨렸다. 어디선가 그들을 지켜보고 있을 제프를 의식한 행동이었다.

“완벽해. 그리고 라이돈, 지금부턴 전투에 참여해도 좋아.”

“하아, 드디어? 지루해서 죽을 뻔했잖아.”

“너무 심취해서 동료들 방해하진 말고.”

“아하하! 내가 방해인 게 아니라, 다들 날 거슬리게 하는 것뿐이거든!”

내내 무료한 표정으로 카델의 명령을 따르던 라이돈이 전장의 중심으로 파고들고. 카델은 마기를 조절 중인 가르엘의 옆에 정좌를 틀고 앉았다.

“……음? 서 있기 힘든가요, 단장님? 오래 걸었으니 그럴 만도 하죠.”

“누굴 백 살 먹은 노인네로 알아? 집중이나 해.”

멘델의 기술 목록을 떠올렸을 때, 자신의 힘이 필요한 순간은 분명히 온다. 카델은 모든 전투를 부하들에게 맡긴 채 그 ‘한 방’을 준비할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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