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7화 (267/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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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돈 경, 저렇게 벽을 만들어 버리면 저희까지 아군의 상태를 살필 수 없게 되잖아요.”

“흐응, 어차피 안 죽을 테니까 상관없잖아.”

“안 죽는다고 만사형통이 아니에요. 다치지 않는 게 중요하죠.”

“우와, 루멘의 명령조 다음엔 가르엘의 선생질이야? 건방져라. 카델만 아니었으면 하나로 묶어서 던져 버렸을 텐데.”

현재 라이돈과 가르엘은 동료의 싸움을 보조하며 봉인을 사수하는 중이었다. 동료 엄호라는 역할도 라이돈이 전투 인원을 통째로 가둔 얼음벽을 생성하며 무용하게 되었지만.

“반이랑 루멘은 알아서 잘 싸울 테니까, 이거나 어떻게 해 봐. 거슬린단 말이야.”

라이돈은 가르엘의 훈수를 무시하며 정면을 턱짓했다. 그곳에는 바람을 타고 온 ‘검은 꽃잎’이 살랑거리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도 떨어지지 않았고, 마법을 써 밀어내도 다시 돌아와 허공을 배회했다.

직접 움켜쥐거나 베어 낸다면 사라질지도 모르나, 둘 다 직접적인 접촉은 피했다. 꽃잎에서부터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직 별다른 움직임은 없으니 놔두죠. 고위 마족의 기술에 통달한 단장님이 돌아오기 전까진, 맡은 일이나 잘하자고요.”

“우와, 쓸모없어라.”

“라이돈 경의 얼음벽을 허물면 제 쓸모가 생길 것 같은데요?”

“그럼 계속 쓸모없는 채로 살아.”

절대 벽을 허물지 않겠다는 의지 표명에 결국 가르엘도 백기를 들었다. 그로서는 라이돈의 고집을 이해할 수 없었으나, 라이돈에게는 이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반과 루멘만으론 절대 저 마족의 주의를 끌 수 없을 테니까. 내가 친절하게 시야 차단까지 해 줘야 하다니, 성가시네.’

그들에게 있어 지금의 전투는 일종의 탐색전에 가까웠다. 서로의 진가를 드러내지 않고 상대의 역량을 시험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라이돈은, 멘델이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확신할 수 있었다.

셀레브, 엘비, 아쉬브카. 그 외에 자신이 만나왔던 모든 마족을 통틀어도, 멘델 할리에프라는 고위 마족의 악한 기운은 따라잡을 수 없었다. 그야말로 독보적이었다. 힘의 차원적인 문제가 아니라, 태생적인 기운의 문제였다.

‘뭐어, 그래 봤자 쓰레기지만. 여차하면 내가 싸우면 돼.’

사실 라이돈은 당장 얼음벽 안으로 난입해 멘델과 힘을 겨루고 싶다는 욕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직접 상대한다면 분명 즐거운 쾌락을 만끽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라이돈의 바람이 이루어지는 일은 없었다.

“……하아. 벌써 와 버렸네.”

라이돈의 한숨과 함께 가르엘의 시선이 움직였다. 가면 아래 드러난 보라색 눈동자가 반대편 늪 너머로 보이는 한 남자를 담아냈다.

카델이었다. 가르엘은 그를 큰 소리로 부르는 대신, 조용히 지켜보았다. 카델은 라이돈의 얼음벽이 멘델과 동료를 가둔 것을 인식한 듯 대놓고 몸을 드러내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두르고 있던 망토를 풀어 무언가를 박박 문질러 닦기도 했다.

‘뭘 하는 거지……?’

그가 의아함을 느끼기가 무섭게, 카델은 열심히 닦아 내던 ‘무언가’를 입 안에 덥석 넣고 삼켰다.

‘머, 먹었어? 뭘 먹은 겁니까, 단장님?’

갑자기 혼자만의 간식 시간을 가진 건 아닐 테고. 당황하던 가르엘은 카델이 홱 고개를 돌려 이쪽을 주시하자 멈칫하며 어깨를 굳혔다. 카델은 자신과 눈이 마주친 가르엘에게 손짓으로 명령을 전달하기 시작했다.

라이돈을 가리키고, 얼음벽을 가리키고, 뭔가를 날려 보내듯 손을 흔들었다. 이 거리에서 조용히 의사 전달을 하기에 가장 좋은 방법을 택했다는 건 알지만, 가르엘은 열심히 손을 휘젓는 카델이 귀여워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러고는 전부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벽 허물랍니다, 라이돈 경.”

“조금만 더 늦게 왔으면 내가 싸우는 건데.”

가르엘의 말에는 꿈쩍도 않던 라이돈이 단숨에 얼음벽을 허물어뜨렸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치열한 혈투의 장면도, 누군가의 열세도 우세도 아닌.

“커, 허억…!”

멘델의 목을 관통한 수십 갈래의 가느다란 암기. 당황한 듯 멈춰 선 반과 루멘. 그리고 소리 소문도 없이 등장해 한 손으로 멘델의 얼굴을 움켜쥐고 있는 요젠이었다.

요젠은 멘델의 얼굴을 쥔 손등 위로 닿을 듯 말 듯 가까이 다가가서는, 태연자약하게 입을 열었다.

“마족을 상대해 본 건 처음인데. 네 얼굴은…… 기념으로 기억할게.”

그리 말한 요젠의 손끝이 움직였다. 카델의 얼굴을 매만질 때와는 전혀 다른 방식. 힘주어 구부러진 손끝에는 새까만 암기가 응축되었고, 긁듯이 내려가는 손길을 따라 멘델의 얼굴이 움푹 파였다.

이목구비가 사정없이 갈라지며 끔찍한 형태로 망가졌으나, 요젠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멘델의 턱 끝까지 쓸어내린 그가 손을 떼어 내자,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휘청이던 멘델의 육신이 바닥으로 기울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챠르르릉!

늪의 안쪽에서부터 솟아오른 [화련]이 쓰러지는 멘델의 육신을 옭아매 바로 세웠다. 암기가 난자한 목은 덜렁이고, 화염 사슬에 휘감긴 몸은 빠르게 그을리기 시작했다. 요젠을 제외한 다른 단원들의 눈에, 멘델은 끝장을 내지 않아도 이미 끝장이 난 상태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어지는 카델의 외침은, 그들의 생각과는 정반대의 것이었다.

“다들 떨어져! 지금부터 시작이다!”

약 30분 전.

봉인진과 멘델을 단원들에게 맡겨 둔 후, 카델과 요젠은 다른 일을 처리하기 위해 개별적으로 움직였다. 바로 ‘소환진 파괴’ 작업.

봉인진이 위치한 늪지대의 중앙으로 이동하는 동안, 카델은 멘델이 봉인진이 아닌 소환진을 통해 빠져나온 것이라 확신했다. 이유는 단순했는데, 늪지대 중앙으로 갈수록 마물이 늘기는커녕 털끝 하나도 비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카델은 멘델의 특성을 알고 있다. 그의 특성을 생각하면 마물이 보이지 않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만약 봉인이 깨진 상태라면, 멘델이 아무리 많은 마물을 희생시켰다 한들 지금처럼 코빼기도 보이지 않을 리는 없다. 그러니 셀레브, 엘비와 마찬가지로, 멘델은 소환진을 통해 인간계에 현현했다.

그렇다면 기사단이 해야 할 일은 두 가지. 멘델에게서 봉인진을 사수하는 것과 그가 아군을 소환하거나 도주하지 못하도록 미리 소환진을 부수는 것.

팀을 나누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소환진을 탐색하고 부수는 건 카델 혼자서도 가능했으니. 거기에 굳이 요젠을 추가한 것은, 그의 전투 스타일을 고려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공격은 대체로 한 방을 노리기 위한 타이밍이 필요했다. 암살에 불리한 이런 탁 트인 지대에서라면 더더욱 그랬다. 나머지 단원들이 멘델의 주의를 끌고, 이쪽은 복귀와 동시에 멘델을 기습하는 쪽이 낫다.

전략은 만족스러웠고, 소환진의 탐색도 순조로웠다. 특별하다 할 만한 것이 있다면, 탐색 도중 우연히 발견한 이번 퀘스트의 두 번째 목표.

“비타……?”

카델은 마력 탐지를 멈춘 채 어느 한 곳을 응시했다.

늪지대의 한복판. 기묘한 형상을 한 괴생물체가 주전자 물 끓는 소리를 내며 진동하고 있다.

질척하고 생기 없는 회색 몸뚱이는 막 피어나려는 꽃봉오리처럼 부풀었고, 검은 점박이 빼곡하게 박혔다. 노인의 살갗처럼 주름진 표피와 썩은 과일 껍질 같은 질감. 그것이 뿌리내린 늪 아래에서는 뭔가가 녹아내리는 듯한 소리와 함께 뿌연 김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 괴악한 생김새를 보자마자 카델은 저것이 바로 마밀이 말했던 ‘비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비타, 가 뭐야?”

멈춰 선 카델의 옆으로 요젠이 다가왔다. 그에 카델이 요젠의 손을 잡고 비타가 있는 방향을 가리켰다.

“저쪽에 있는 괴물 같은 식물의 이름. 마법사는 저 녀석의 심장을 먹으면 강해질 수 있거든. 마족부터 해결하고 찾아보려고 했는데, 여기서 이렇게 발견하네.”

“……지금 얻을 거야?”

“아니. 지금은 마족을 쓰러뜨리는 게 우선이야. 허비할 시간은 없어. 일단 위치만 기억해 둘…….”

말을 잇던 카델의 시선이 잡고 있던 요젠의 손에 닿았다. 새하얀 손에서 땀도 아닌 암기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갑자기 웬 암기란 말인가. 당황한 카델이 요젠을 바라보았으나, 요젠의 고개는 비타에게로 고정되어 있었다.

“먼저 소환진에 가 있어. 따라갈게.”

“넌 뭐 하게……? 혹시 쟬 잡으려는 거면 나중에 내가 따로 해도 되니까—.”

“내 세계에 새로운 존재를 갱신하고 싶어졌을 뿐이야.”

새로운 존재의 갱신이라니. 처음 발견한 괴생명체에 호기심이 생겼다고 말하고 싶은 걸까?

쓸데없이 의미심장한 요젠의 화법에 망설이기를 잠시. 카델은 요젠의 손끝에서 떨어진 암기가 어느새 늪을 가로질러 ‘비타’의 몸뚱이를 집어삼키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반면 비타는 제 몸을 감싼 암기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반응 없이 제자리에 박혀 있었다.

‘비타는 도망을 잘 치는 놈이라고 했지. ……어쩌면 요젠한테 맡기는 게 더 나을지도.’

마침 본인도 비타를 잡겠다고 나서는 데다, 소환진 탐색에 요젠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으니. 카델은 요젠의 ‘갱신’을 존중해 주기로 했다.

소환진은 쉽게 찾아낼 수 있었다. 카델은 발견한 소환진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셀레브가 사용했던 것보다는 크기가 작다. 술식도 훨씬 간단한 편이었다. 카델은 그 차이를 ‘다른 존재의 소환 가능 유무’라고 분석했다.

셀레브는 소환진 안에서 ‘레드 맨’ 군단을 추가로 꺼내 올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가능하기에 멘델의 소환식은 술식이 너무 단출하다. 고위 마족인 그가 넘어오는 것으로 역할을 다했을 것이다. 아마 엘비도 마찬가지였을 테지.

소환진을 손쉽게 깨부순 후엔, 근처에서 새로운 ‘마법진 조각’을 발견했다.

[확실히 설원에서 봤던 마법진 조각과 이어지는군. 형태가 일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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