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4화 (264/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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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멘의 완전 회복을 위해 일주일간의 휴식 기간을 가졌다. 그동안 카델은 매일같이 반, 루멘, 가르엘과 함께 단련했고, 라이돈과 마법을 연구했으며, 종종 요젠을 찾아가 이야기를 나눴다.

그렇게 빠르게 흐른 시간의 끝에서, 카델은 부하들을 불러 모아 다음 일정을 설명했다.

“우리의 이번 목적지는 잉마르 늪지대야. 봉인은 늪지대 중심 부근에 있다고 해. 여긴 봉인 상태와 별개로 항상 마물이 득실거리는 곳이라니까, 언제나처럼 방심은 금물이고. 레민 왕국을 통해서 이동할 거야. 늪지대에 진입하기 전까진 최대한 무리하는 일 없이 체력을 비축해 둬.”

잉마르 늪지대에서는 메인 퀘스트를 처리하는 동시에, 마밀이 알려 주었던 ‘비타의 심장’을 얻어야 했다. 평소보다 신경 쓸 것이 많을뿐더러, 등장하는 적도 만만치 않다.

‘잉마르를 담당했던 마족……. 아마 그놈이겠지.’

고위 마족이 늘 그랬듯 성가신 힘을 가진 적이었다. 공략법은 파악하고 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이곳은 게임이 아닌 현실이다. 플레이 당시와 똑같은 기사 구성도 아니었고, 변수도 훨씬 다양할 터. 게다가 카델은 이번 메인 퀘스트에서 ‘마법사’가 아닌 ‘지휘자’의 역할에 집중할 생각이었다.

막 각성한 루멘과 최근에 합류한 가르엘, 요젠. 아직 익숙지 않은 힘들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려 적을 격파하는 것이 목표다.

‘내가 없어도 기사단이 잘 돌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하니까. 제대로 키워 주겠어.’

홀로 다짐한 카델이 마밀에게 들었던 늪지대 탐험의 주의점과 마물의 종류에 대한 설명을 이어갔다. 약 1시간가량의 모임이 끝난 뒤엔, 바로 다음 날부터 시작될 여행 준비를 위해 부하들을 해산시켰다.

그리고 혼자 남은 카델이 부지런히 짐을 챙기고 있던 때. 쿤라가 그를 찾아왔다.

“이 몸을 더 격하게 반겨도 좋다, 반쪽이. 안기는 것도 허용해 주지.”

노크도 없이 불쑥 들어와서는 환대를 바라는가. 카델은 눈살을 찌푸리며 쿤라를 노려보았다. 그는 카델의 침대 위에 긴 다리를 늘어뜨린 채 당당하게도 누워 있었다. 비라도 맞고 왔는지 푹 젖은 몸이 하얀 시트에 얼룩을 남겼다.

“적룡은 위생 관념이란 것도 없습니까? 거긴 오늘 제가 자야 할 침대거든요. 더러우니까 내려와요.”

“하! 더럽다? 이 몸이 더럽다는 거냐, 지금?”

“그럼 깨끗하다는 겁니까? 적룡은 시력도 안 좋아요? 밖에 비가 오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젖었어요? 젖었으면 좀 말리고 들어오든가.”

투덜거리며 마저 여행 짐을 챙기고 있으려니 쿤라가 기막히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그러고는 보란 듯이 침대 깊숙이 몸을 묻으며 위엄이라곤 털끝만큼도 없는 가벼운 어투로 말했다.

“영혼이 반쪽이라 그런지 됨됨이도 반토막이 났나 보군. 되바라진 인간 같으니.”

“어쩌라고요.”

“네겐 내 힘이 필요하다는 걸 잊은 거냐? 응?”

적룡의 힘이 전투에 큰 보탬이 되고, 그의 기운으로 카델 라이토스와의 융합을 해제할 수 있다고 한들. 카델은 아직 쿤라와의 첫 만남에서 이루어진 끔찍한 상황들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무심함에 겹겹이 쓸린 상처 또한 마찬가지.

모든 걸 알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인지, 유독 쿤라의 앞에서는 감정적으로 굴게 됐다. 차라리 힘만 나눠 주고 대화를 나누는 일이 없었다면 거부감이 덜했을 텐데.

짜증스레 혀를 찬 카델이 짐을 꾹꾹 눌러 담으며 쿤라를 일별했다.

“볼일은 다 보고 온 겁니까? 이제 슬슬 고위 마족을 상대할 타이밍이라서요. 당신의 힘이 필요한데요.”

“흥, 빨리도 물어보는구나.”

자신을 반기지 않는 카델의 태도가 불만스러운 듯 까칠하게 굴던 쿤라는, 침대 옆으로 다가온 카델의 팔을 쥐고 끌어당겼다. 짐을 두러 왔다가 강제로 침대에 쓰러지게 된 카델이 축축한 시트의 감촉을 느끼며 인상을 썼다.

“뭐예요?”

“실체화한 김에 기운을 불어넣어 주려는 거다. 왜. 이것도 탐탁지 않은 거냐?”

“……빨리하죠, 그럼.”

“건방진 녀석.”

한숨을 쉬며 등을 돌리고 앉자, 곧 쿤라의 큼직한 손이 상의 아래를 거침없이 침범했다. 갑자기 맨살을 더듬는 손길에 놀란 카델이 그의 손목을 움켜쥐자, 바로 뒤에서 건들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장갑이라도 끼고 해 주랴?”

“그냥 옷 위에서 하면 안 돼요? 굳이 맨살에 닿아야 할 이유가…….”

“직접 닿아야 걸리는 것 없이 기운을 넣어주기 편해. 이 몸이 인간에게 욕정을 느낄 일은 없으니, 쓸데없는 걱정은 말거라. 반대라면 어쩔 수 없다만.”

“저도 상관없거든요.”

그저 스킨십이 불편했을 뿐이다. 굳은 얼굴로 손목을 놓자 쿤라가 짚은 복부 위로 뜨끈한 열기가 퍼지기 시작했다. 다행히 동굴에서 느꼈던 끔찍한 열통은 없었다.

전신으로 번져가는 열감을 묵묵히 버티고 있으려니, 쿤라가 새로운 정보를 꺼내 왔다.

“인테 설원에서 새로운 마법진을 발견했다.”

“……새로운 마법진이요?”

“봉인진과 멀리 떨어진 곳에 숨겨져 있더군. 두 종류의 마법진이었다. 하나는 이미 발동된 상태였고, 나머지 하나는 아니었지. 짐작 가는 바가 있느냐?”

봉인진과 떨어진 곳에 숨겨져 있던 마법진이라.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던 카델이 이내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발동된 마법진은 저희가 상대했던 고위 마족이 타고 온 소환진일지도 몰라요. 제국에서 그런 식으로 소환된 마족을 상대한 적이 있거든요.”

그때 엘비가 처음 나타난 곳은 봉인의 균열이 아닌 봉인진의 정반대였다. 당시에는 엘비를 공략하느라 깊게 생각하지 못했지만, 엘비가 인간계를 떠돌던 마족이었다면 몰라도, 마계에 있던 마족이라면 봉인진을 부수지 않고 나오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약 처음부터 인간계에 있었다면 봉인진은 진즉에 부서졌을 테고.

‘하지만 셀레브가 사용했던 소환진. 그걸 통해 막 설원에 도착했던 거라면 말이 되지.’

아마도 엘비는 소환진을 통해 인간계로 넘어온 후, 직접 봉인진을 깨부수러 이동한 것일 테다. 마침 그곳에 기사단이 있었던 거고.

“흠. 마계의 기운이 느껴진다 했더니 소환진이었나. 꽤 복잡한 술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시전자의 범상치 않은 역량이 느껴졌지.”

“부쉈나요?”

“그래. 하지만 또 하나의 마법진은 네게 나눠 준 힘만으로는 파괴가 불가능했다.”

파괴가 불가능했다니? 놀란 카델이 반사적으로 뒤를 돌려 하자, 복부를 압박하는 힘이 강해졌다.

“움직이지 말거라.”

“아니, 마법진을 못 부쉈다뇨? 당신 적룡이잖아요. 아무리 제게 나눠준 힘이 적다고는 해도…….”

“그래. 보통이라면 가능해야겠지. 하지만 힘을 전부 불어넣었음에도 마법진은 파괴되지 않았어. 뭐, 당연한 일이다. 내가 본 마법진은 한 조각에 불과했거든.”

“한 조각이요?”

이어지는 쿤라의 설명은 단순한 듯하면서도 복잡했다. 그는 엘비가 남긴 것으로 추정되는 마법진의 파괴를 시도했다. 그러나 본인이 가진 모든 마력을 쏟아부었음에도 실패했고, 그에 이상함을 느낀 그는 마법진을 본격적으로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결과. 엘비가 남긴 마법진은 거대한 마법진을 이루는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심지어 아직 발동 시도조차 할 수 없는 미완성 마법진의 일부.

“내 예상대로라면 완성된 마법진은 인간계 전체를 아우르는 광대한 범위를 가지게 될 거다. 완성되기 전에는 마력도 흐르지 않아서, 뭘 해도 파괴가 불가능해. 그저 존재할 뿐이지.”

“그럼 그 마법진이 완성되기 전까지 손 놓고 기다릴 수밖에 없단 얘깁니까?”

“엄밀히 따지자면 그렇지.”

인간계를 아우르는 마계의 대마법진. 카델은 직감적으로 그것이 바로 마계 전쟁 발발의 원인이리라 생각했다. 막을 방법이 없다는 것 또한, 그 필연적인 전쟁의 서막을 알리는 복선이었다.

순식간에 심각해진 낯으로 입술을 잘근거리던 카델이 쿤라에게 말했다.

“마법진의 정확한 범위를 알 수 있다면 공격을 대비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나머지 조각들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있나요?”

“고작 한 조각 가지고는 위치를 특정할 수 없어. 적어도 두어 개는 더 있어야 한다.”

“……찾아볼게요.”

그만큼 대단한 마법진이라면 아무리 한 조각이라도 상당히 세밀한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마족이 직접 마법진을 그리는 게 아니라 마계에서 가져온 무언가를 통해 설치하는 방식이래도, 그런 중요한 작업을 조무래기에게 맡길 리는 없다.

‘고위 마족을 처리하다 보면 대마법진의 나머지 조각을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몰라.’

게임이었다면 다가올 스토리를 막연히 기다리기만 하면 됐겠지만, 이곳은 그가 살고 있는 현실이다. 필연적인 전쟁이라 해도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대비는 해 두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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