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3화 (263/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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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기 싫다…….”

목욕물에 몸을 담그니 피로가 풀리기는커녕 배가 되는 기분이었다. 카델은 욕조에 머리를 기댄 채 앓는 소리를 냈다. 이 짓을 몇 년은 반복해야 겨우 사람 구실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절로 울적해졌다.

눈을 감은 채 뭉친 근육이 풀리는 감각을 느끼다, 점점 가물가물해지는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렸다. 여기서 정신을 놓으면 그대로 잠이 들 것 같았다. 그렇게 벌어진 시야 속으로, 예고 없이 등장한 얼굴이 들어찼다.

“와아악!”

“……놀랐어?”

요젠이었다. 기척도 없이 나타난 요젠의 모습에 카델은 팔다리를 바둥거리며 진저리를 쳤다. 덕분에 욕조 앞에 있던 요젠은 난데없는 물벼락을 맞아야 했다.

“가, 간 떨어질 뻔했네……!”

카델은 터질 것처럼 쿵쾅거리는 가슴께를 짓누르며 울상을 지었다. 밤에 귀신을 봐도 이보다는 놀라지 않을 것 같았다. 요젠은 푹 젖은 자신의 바지를 툭툭 털어 내며 평온하게 말했다.

“미안. 남의 방에 노크하고 들어간 지가 오래돼서. 까먹었어.”

“그럼 적어도 들어오는 소리라도 내 주라.”

“불가능해. ……이름 정도면 불러 볼게.”

“그래, 뭐라도 좀 해 줘.”

한바탕 소란이 진정되니 자신이 부하 앞에서 홀딱 벗고 목욕 중이라는 사실이 신경 쓰였다. 물론 요젠은 앞이 보이지 않으니 단장이 홀딱 벗고 목욕을 하든 리듬을 타든 상관없을 테지만, 보이는 입장에선 부끄럽지 않기가 어려웠다.

슬쩍 무릎을 세워 몸을 웅크린 카델이 소심하게 요젠을 올려다보았다.

“안 그래도 내가 먼저 찾아가려고 했는데. 조금 있다가 다 같이 밥 먹으러 갈 거거든. 같이 가자.”

“음…….”

“너도 밥은 먹고 살 거 아니야. 네가 영면의 사자라는 걸 아는 사람은 우리밖에 없으니까, 불편해할 거 없어.”

“난 혼자가 편해.”

요젠은 한결같은 미소와 함께 카델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를 더 설득해 볼까도 싶었지만, 관두기로 했다. 억지로 동료들 틈에 끼워 넣어 봤자 본인이 준비되지 않았다면 불편한 시간만 될 테니. 혼자 움직이는 게 익숙한 사람을 제 입맛대로 바꾸는 건 일렀다.

“……알았어. 그럼 오는 길에 네 것도 사 올게. 굶지 말고 그거 먹어.”

“알아서 먹을 수 있는데.”

“나도 알아. 그냥 챙겨 주고 싶은 거라고.”

입단하기 전이나 후나, 요젠의 철벽은 상당했다. 아직 마음을 열지 않은 듯한 그의 태도에 절로 서운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이런 걸로 서운함을 느낀다는 것이 치졸해 보여 뒤늦게 덤덤한 척을 해 보려 했으나, 요젠이 먼저 선수를 쳤다.

욕조 앞에서 무릎을 굽힌 그가 손을 뻗어 카델의 젖은 얼굴을 매만졌다. 굳은살이 배겨 단단한 손바닥이 그의 뺨과 콧등, 턱선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각인하는 느낌은 아니었다. 요젠은 마치 카델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가늠하듯 그의 눈꼬리나 입가를 문질렀다. 그러고는 오묘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넌 정말 이상하네.”

“……뭐가?”

“우린 그냥 서로가 가는 방향이 비슷할 뿐, 다른 갈림길이 나온다면 언제든 헤어질 수 있어. 만약 내가 너와의 약속을 어긴다면, 그대로 끝나게 될 관계지.”

“…….”

“서로가 필요에 의해 구속된 것뿐이잖아. 그런데도 너는…… 나와 가까워지고 싶어?”

요젠의 손길이 멀어지자 그의 손이 닿았던 부위에 찬기가 맺혔다. 카델은 말없이 요젠의 얼굴을 응시하다, 얕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돌렸다.

“말했잖아. 네가 날 어떻게 생각하든, 나에게 넌 소중한 부하이자 동료라고. 네가 거부한다 해도 나는 널 책임질 거야. 위험한 전투를 치르게 한 책임과 지금까지와 다른 삶을 살게 한 책임을 다할 거라고.”

“…….”

“그래, 가까워지고 싶어. 당연한 거 아니야? 앞으로도 계속 함께할 사람인데. 알아 가고, 배워가고 싶은 건 자연스러운 일이잖아. 난 널 수단이 아니라 같은 사람으로서 상대하고 싶은 거야.”

카델은 그새 차갑게 식어 버린 목욕물 속에서 팔을 문질렀다. 요젠은 자신을 볼 수 없음에도, 괜스레 빤한 시선이 느껴지는 듯했다.

“너한테 뭘 돌려받고 싶은 마음은 없어. 그냥, 주면 받아. 밥 사 오면 먹고, 손 내밀면 잡아. 어려운 거 없잖아.”

이런 배려가 성가시게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카델은 해 주고 싶었다. 자신의 부하가 된 이상 요젠 역시 그의 사람이다. 아무리 자신의 내면이 불안정한 상태래도, 자신을 위해 싸워주는 사람을 방치할 만큼 글러 먹진 않았다.

그렇게 식어 가는 물 온도를 느끼며 이대로 일어나 옷을 입으러 갈지, 요젠에게 떠나 달라고 부탁할지를 고민하던 때.

[기사 ‘요젠 바르딕타’의 호감도가 4 상승했습니다.]

[현재 호감도: 43/100]

갑작스레 떠오른 시스템 창과 함께, 요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생각해 볼게.”

“뭘?”

“같이 밥 먹는 거.”

기대에도 없던 발언에 카델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방금까지 바로 옆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요젠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카델은 텅 빈 방 안에서 홀로 허망하게 눈을 깜빡였다.

“잘생긴 청년들이 밥도 잘 먹으니 보기 좋네. 이건 서비스로 줄 테니 많이들 드시게나!”

이미 음식이 테이블을 한가득 채웠음에도 주방장은 서비스라며 새로운 야채볶음을 내놓았다. 미남 요리사가 만든 음식은 맛도 끝내준다며 넉살 좋게 눈웃음을 치는 가르엘 덕에 시키지도 않은 술을 받기도 했다.

그렇게 그들은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풍족한 식사를 원 없이 즐기기 시작했다.

“엄청 맛있네! 루멘, 이건 무슨 음식이야?”

“돼지고기 설탕 조림이다. 많이 단 음식이니 적당히 먹는 게…… 언제 다 먹은 거지?”

“그럼 이건 뭐야?”

“산딸기 파이.”

“이건?”

“호박 그라탱.”

“이건?”

“……소고기 스튜.”

어쩌다 라이돈의 옆자리에 앉게 된 루멘은 끝도 없는 질문 폭격에 뜻밖의 인내심 테스트를 치르게 되었다. 식사 자리에선 언성을 높이지 않는다는 버릇 같은 예절 때문에 제대로 화를 내지도 못했다. 부글부글 끓는 속을 다스리는 게 빤히 보이는 루멘의 반응이 재밌었는지, 라이돈은 이미 아는 음식도 굳이 물어보며 신경을 긁어 댔다.

다른 자리도 요란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단장님, 같이 술 한잔하시죠. 오랜만에 다들 멀쩡한 모습으로 모였는데, 흥이 나면 좋잖아요?”

“술 치우십쇼. 밥 먹는데 술 마셔봤자 속만 버립니다. 단장은 물로도 충분하니, 술은 그쪽이나 마시세요.”

“이런, 반 경. 너무 과보호하는 거 아닌가요? 그렇게까지 저와 단장님의 사이를 방해하고 싶다면, 반 경이 대신 대작해 주시죠. 거절해도 계속 권유할 거니까요.”

“……내놓으십쇼.”

반은 카델에게 술을 권하는 가르엘의 수작을 일절 차단하기 위해 대신 술잔을 들었다.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는 사이에 승부욕까지 불탔는지, 나중에는 대결이라도 하듯 연신 새로운 술을 주문해 댔다.

그 왁자한 분위기 속에서, 카델은 열심히 음식을 입 안에 욱여넣을 뿐이었다. 야무지고 부지런하게 턱을 움직이면서도 시선은 종종 식당의 출입문을 돌아보았다.

‘안 오려나.’

함께 밥 먹는 걸 생각해 보겠다던 요젠은 단원들이 식당으로 출발할 때까지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방을 찾아가 봐도 마찬가지였다. 어쩔 수 없이 그를 빼놓고 오기는 했으나, 여전히 요젠의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밥 정도는 같이 먹어도 될 텐데.’

혼자 있는 것이 익숙해서인지, 그저 기사단을 완전한 타인이라고 여기기 때문인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어도 명확하게 그어진 선이 보이는 듯해 괜스레 마음이 쓰였다. 상대가 선을 그으면 그 선 밖에서 서성이면 되는 것을.

‘……됐다, 됐어. 그만 신경 쓰자.’

자신이 챙겨 주지 않는다고 굶을 사람도 아니고, 알아서 잘하고 있을 테다. 카델은 새 단원에 대한 걱정을 떨쳐 내려 한층 더 열렬한 식사를 시작했다. 고된 훈련을 끝마쳤기 때문인지 식욕은 넘쳐 났다.

그렇게 한참을 음식에만 집중하던 카델은, 문득 소란스러웠던 부하들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느리게 음식을 삼키며 테이블을 둘러보자 부하들의 시선이 전부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자신의 바로 뒤에 자리한 출입문을.

이해할 수 없는 정적에 카델이 의아한 낯으로 뒤를 돌아보려던 순간.

“안녕.”

누군가의 손이 카델의 어깨를 덮으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카델의 시야 속으로 요젠의 모습이 들어찼다.

“요젠! 왔구나!”

그를 발견한 카델이 환하게 웃으며 요젠의 팔을 끌어당겼다. 비어 있던 오른쪽 자리에 요젠을 앉힌 그가 점원에게 새로운 식기를 부탁하고, 뭐 하다 이제 온 것이냐며 여러 질문을 던질 동안. 그들을 지켜보던 나머지 부하들은 공통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거지?’

그들이 먹고 마시던 것을 멈추고 요젠에게 시선을 고정했던 이유는, 그가 낯설거나 등장이 고깝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기척 하나 없이 고요하게, 어느 순간 떡하니 나타났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일부러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면 그가 카델의 뒤에 서 있다는 것조차 알 수 없었을 테다. 아무리 긴장을 풀고 있었다지만 접근하는 느낌조차 받지 못하다니.

“스튜 좋아해? 파이는?”

“딱히 가리는 음식은 없어.”

“고기가 좋아, 야채가 좋아?”

“둘 다 괜찮아.”

“아, 먹는 건 불편하지 않겠어?”

“괜찮아.”

모두의 관심을 한 몸에 받으며, 요젠은 음식까지 떠먹여 줄 기세인 카델을 향해 미소 지었다. 요젠이 본인 몫의 포크와 나이프에 손을 올리자, 질척한 암기가 흘러내리며 얇은 막처럼 코팅됐다.

카델은 그의 접시에 이런저런 음식들을 덜어 주며 먹는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잠시 얌전하게 덜어 준 음식을 먹던 요젠은, 이내 옅은 미소와 함께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고개를 살짝 틀어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볼 순 없어도 시선은 느껴져. 지금까지 날 봤던 사람들은 전부 죽여 왔더니 이런 시선들이 참기가 힘든데. 할 말 있으면 해 줄래?”

카델이 아닌 나머지 단원들을 향한 말이었다. 순식간에 가라앉은 분위기에 그제야 요젠의 합석을 예고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카델이 슬쩍 부하들의 눈치를 살폈다.

지금까지는 새로 합류하는 동료마다 붙임성이 좋았기에 기사단에 어우러지는 걸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요젠은 단장인 자신에게까지 벽을 치는 사내. 요젠뿐 아니라 단원들에게도 서로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릴 만한 뭔가의 조치가 필요할지 몰랐다.

금방이라도 무슨 일이 터질 듯한 냉랭한 공기에 카델이 필사적으로 머리를 쥐어짤 무렵. 협박과 다를 것 없던 요젠의 발언에 부하들이 하나둘씩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입을 연 이는 가르엘이었다.

“좋네요, 그런 솔직함. 저도 마침 적당한 때를 기다리고 있었거든요. 할 말도 물어볼 말도 산더미 같은데, 전부 대답해 줄 준비는 되셨나요?”

“전부 대답하진 않을 거야.”

“하하! 그럼 되는대로 던져 봐야겠군요!”

그는 요젠과 만나기 전부터 ‘영면의 사자’라는 존재에 대한 호기심이 넘쳐 났다. 때문에 함께하는 자리가 만들어지자마자 일방적인 호감을 드러냈다. 물론 단원 중 요젠에게 호감을 보이는 이는 가르엘뿐이었으나, 다른 이들도 호기심 정돈 존재했다.

“방금 어디서 튀어나온 거야? 포크는 왜 까매진 건데? 몰래 움직일 수 있으면 카델 없을 때 나랑 싸워 볼래?”

“그게 네놈이 사용하는 암기인가? 지금까지 봐 왔던 암기랑은 느낌이 다른데.”

“제대로 된 암살자인가 보군. 하긴, 세간에 떠돌던 일화들이 전부 허풍인 게 아니라면 그 정도 움직임은 보여야겠지. 훈련받은 건가? 아니면 독학?”

차례차례 쏟아지는 질문 세례에 테이블이 다시금 소란스러워졌다. 카델은 한순간에 주인공이 된 요젠의 옆에서 당황스레 눈을 끔뻑였다.

‘생각보다 인기 좋네, 요젠…….’

어떻게 하면 부하들 틈에 요젠을 잘 녹여낼 수 있을지를 고민했건만. 이런 의욕들이라면 요젠이 도망가지 않게만 잘 달래면 될 것 같았다.

결국 끝도 없는 인터뷰에 지친 요젠이 눈앞에서 자취를 감춰 단체로 흥분한 부하들이 식당을 뛰쳐나가는 헤프닝이 벌어지긴 했으나. 카델은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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