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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의식’이란 것을 인지했을 때, 온통 어둠뿐이던 풍경 속에 떠오른 것은 하나의 묘비였다. 비석의 앞에는 꽃이나 술 따위가 아닌 검 한 자루가 덩그러니 꽂혀 있었다. 너무나도 익숙한, 자신의 검이었다.
‘난 죽은 건가.’
보잘것없는 무덤이었다. 그 흔한 글귀 하나 적히지 않은 밋밋한 비석에 주변을 덮은 무성한 잡초. 그 속에 외로이 꽂힌 검은 서서히 녹슬어 가고 있었다.
누구 하나 들여다보는 이 없는 쓸쓸한 죽음. 실로 외로운 최후였으나, 루멘은 별다른 감상을 내놓지 않았다.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평온했다. 모든 것을 끝내고 온 사람처럼 미련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누군가 그의 무덤 앞으로 다가왔다.
‘……대장.’
카델이었다. 그는 그리운 누군가를 회상하듯 비석을 응시하다, 그 앞에 쭈그려 앉아 주변의 잡초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맨손으로 열심히 잡초를 뽑아내 멀찍이 밀어 두고, 먼지 쌓인 비석을 닦아 냈다.
그렇게 카델이 정리를 마칠 때 즈음, 다른 이들이 차례차례 모습을 드러냈다.
첫 번째는 반이었다. 그는 고생한 카델에게 무어라 말을 건네더니, 바닥에 아무렇게나 꽂혀 있던 장검을 뽑아 들었다. 날에 붙은 흙먼지를 대충 털어 낸 그가 챙겨온 검집에 검을 집어넣고 비석 옆에 비스듬히 세워 두었다.
두 번째는 라이돈으로, 언제나처럼 웃으며 날아온 그는 어디서 꺾어온 지 모를 꽃송이들을 비석 위에 흩뿌리듯 던져두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비석 위에 걸터앉기도 했다. 카델이 엄한 표정으로 다그쳐도 해맑게 웃을 뿐이었다.
마지막은 가르엘이었다. 그가 가져온 것은 술이었다. 한 병을 고스란히 묘비 앞에 올려 둔 채 기도문 같은 것을 읊조리자, 그것이 신호탄이라도 되듯 모두의 모습이 서서히 흐려지기 시작했다.
루멘의 눈에만 그리 보이는 듯, 기사단은 서로 이야기를 나누기 바빴다. 조금은 허전하지만 털어 내고 나아갈 준비가 되어 있는, 살아남은 자만이 누릴 수 있는 감정을 공유했다.
루멘은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들과 함께할 수 없었다. 그들이 나아가는 동안, 자신은 평생 이곳에서 수납된 검처럼 멈춰 있어야 했다.
‘대장. 카델.’
연신 카델을 불러 봐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그에게는 영영 자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테다. 그것을 인지한 순간, 감당할 수 없는 외로움과 삶에 대한 갈망이 휘몰아쳤다.
‘나는… 정말 죽은 건가……?’
이젠 함께할 수 없는 건가? 전부 끝난 건가? 끝내고 싶지 않았다. 겨우 찾은 소중한 것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 유일한 소망을 짓밟듯, 모두의 모습이 기어코 자취를 감췄다.
남은 것은 그들의 흔적이 가득한 묘비 하나뿐. 괴롭게 그것을 응시하던 루멘이 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흘러가는 의식에 불과하던 그에게 몸이 생겼다. 검을 쥘 수 있는 손과 지탱할 수 있는 다리, 볼 수 있는 눈과 들을 수 있는 귀가 만들어졌다.
본래의 형태를 되찾은 그는 무작정 어둠을 헤치며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곳이 자신의 종착지임을 인정할 수 없었다. 자신은 아직 해야 할 일이, 하고 싶은 일들이 많았다.
그러니 이대로 끝낼 순 없다.
루멘은 스스로를 세뇌시키듯 자신의 죽음을 부정하고, 또 부정했다. 살아 있음을 상기하려 애썼다. 이 막연한 어둠에 끝이 있으리라 믿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믿음에 보답하듯, 멀지 않은 곳에서 누군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 어떤 절망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빛이 되어 줄, 세상에 단 하나뿐인 목소리로.
“슬슬 깨어나 줘라, 루멘. 이러다 내가 먼저 말라 죽겠어.”
대꾸해 주는 이 없는 고독한 혼잣말이 이어지니 무료함에 절로 힘이 빠졌다. 깊은 한숨과 함께 건조한 얼굴을 문지르던 카델은, 희미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퍼뜩 고개를 치켜들었다.
“카, 델…….”
낮게 갈라진 음성의 주인은 분명 루멘이었다.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킨 카델이 루멘의 앞으로 다가갔다.
“루멘? 깨어난 거야?”
“으윽…….”
“깨, 깨어났구나! 어디 불편한 곳은? 아픈 곳 있어?”
조급한 시선이 쉴 새 없이 루멘의 얼굴을 훑었다. 찡그린 눈가가 작게 떨린다 싶더니, 굳게 닫혀 있던 눈꺼풀이 조금씩 들렸다. 그 너머로 천천히 드러난 푸른 눈동자가 초점을 되찾듯 느리게 굴러갔다. 카델은 터질 것 같은 심장 박동을 느끼며 루멘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루멘, 내가 누군지 알아보겠어?”
먼 허공을 응시하듯 탁하던 눈빛에 비로소 안광이 맺혔다. 미간을 구긴 채 제 앞에 드리운 얼굴을 응시하던 루멘이 작게 중얼거렸다.
“대장…….”
“하…….”
평소엔 별 감흥도 없던 호칭을 듣자마자 숨통이 꽉 조이는 듯한 뻐근한 감각이 느껴졌다. 카델은 탄식과도 같은 숨을 고르며 고개를 수그렸다.
“넌 진짜…… 사람 간 떨어지게 하는 데 뭐 있다. 그것도 재능이야.”
루멘이 무사히 돌아왔다는 것을 실감하자 맥이 풀린 듯 웃음이 새어 나왔다. 카델은 여전히 현실감을 되찾지 못한 루멘의 찡그린 얼굴을 바라보다, 구겨진 미간을 살살 풀어 주었다.
“묻고 싶은 게 많을 테지만, 그건 완전히 회복한 뒤로 미루자. 일단 가르엘을 불러올게.”
“다들…….”
“응?”
“다들, 무사한…건가……?”
깨어나자마자 묻는 것이 그것이라니. 설마 쓰러지는 순간까지 동료들을 걱정했던 걸까. 괜스레 울컥하는 감정을 억누른 카델이 힘 풀린 루멘의 손등을 쓸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무사해. 네 덕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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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하! 잠자는 숲속의 공주 같았어, 루멘! 내가 먹여 준 약초 맛은 기억나? 흙이 좀 묻어 있긴 했지만, 그 덕에 깨어난 거야. 마음껏 고마워해도 좋아!”
루멘은 작은 요정의 모습으로 귓가를 맴돌며 시끄럽게 조잘대는 라이돈을 날파리처럼 날려 보냈다. 아무래도 탑의 최상층에서 엘비가 보여 주었던 참상들은 몽땅 허상이었던 듯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설명이 안 되는 활기다.
“상처는 없어요. 그래도 피로는 여전히 남아 있으니까, 이틀 정도는 계속 누워 있는 게 좋을 겁니다.”
“누가 귀족 도련님 아니랄까 봐 연약하기가 화초 못지않군. 검이 아니라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편이 낫지 않겠어?”
“환자에게 시비는 금지입니다, 반 경. 혈압이라도 오르면 여러모로 안 좋으니까요.”
“시비가 아니라 조언입니다.”
루멘이 깨어났다는 소식에 반과 라이돈, 가르엘이 그의 방으로 모여들었다. 루멘을 향한 진심 어린 걱정이나 안도감을 표출하는 이는 카델뿐이었으나, 분위기는 그가 쓰러졌을 때완 비교도 할 수 없이 들떠 있었다.
“루멘, 루멘! 그 마족 꼬맹이의 최후는 어땠어? 어떻게 해치운 거야? 얘기 좀 해 봐.”
“그냥 썰었다.”
“아하하! 설명하기 귀찮아? 다시 잠들고 싶나 봐. 나는 루멘을 위해 매일 약초까지 캐 왔는데, 배은망덕해라!”
“기억도 안 나는 걸로 생색내지 마라.”
“맞습니다, 라이돈 경. 경이 가져온 약초 중엔 독초도 있었다는 걸 잊지 마세요.”
오가는 말에 따스함은 한 푼도 섞여 있지 않다. 하지만 카델은 다른 동료들 역시 루멘의 회복을 기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평소와 같은 말다툼 속에는 그간의 긴장감을 녹여내는 평화로움이 섞여 있었다. 한참 동안 그들의 시끄러운 대화를 경청하던 카델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얘기들하고 있어. 난 이제 좀 쉬어야겠다.”
“모셔다드릴까요, 단장?”
“됐어, 방이 코앞인데 뭘. 너희도 너무 오래 있지 마. 루멘은 환자니까.”
가 보겠다는 카델의 말에 루멘은 퍽 아쉬운 눈치였다. 자신을 둘러싼 시끄러운 동료들을 내보내고 카델과 단둘이 남고 싶은 듯했으나, 욕심을 부리기엔 카델의 안색이 좋지 못했다. 며칠간 제대로 된 잠을 자지 못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내일 봐, 대장.”
카델은 그런 루멘을 향해 작게 웃어 주고는, 그대로 방을 빠져나왔다. 긴장이 풀려서인지 몸이 물에 젖은 솜처럼 축 늘어졌다. 빨리 회복하지 않으면 다음 메인 퀘스트를 진행하는 데 차질이 생길 것 같았다.
그렇게 뻐근한 눈꺼풀을 비비며 제 객실로 향하던 카델의 시선이 어느 방문 앞에 닿았다. 오늘 새로 얻어 준 요젠의 객실이었다. 그와 루멘은 초면인 데다, 갓 깨어난 환자에게 새로운 동료를 소개하기도 애매해 따로 부르지 않았다.
‘잘 쉬고 있으려나.’
정작 잘 쉬어야 할 사람은 본인임에도 새로운 부하에게 신경이 쓰였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문제와는 별개로, 평생 암살자로 살아왔을 그의 습성이 걱정된다는 쪽이 옳았다.
요젠은 홀로 은밀하게 활동하는 것이 익숙한 사람이다. 하지만 앞으로는 기사단원으로서 동료들과 합을 맞춰야 할 일도 많을 거고, 그러기 위해선 함께 시간을 보내며 서로를 알아갈 기회가 필요했다. 과연 요젠이 그 과정을 순순히 받아들여 줄까.
급하게 등 떠민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님을 알지만, 그렇다고 손 놓고 마냥 두고 보기도 싫었다. 홀로 겉도는 모습은 원치 않으니까.
게다가 호감도 관리도 문제였다. 카델은 루멘이 깨어나길 기다리는 동안 확인했던 요젠의 프로필을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