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토할 것 같다. 지금의 심정을 표현해 보라면, 딱 토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뭐가 이렇게 공부할 게 많은 거야…….”
마밀이 가져온 서적들은 책상을 가득 채운 것으로도 모자라 객실의 한 귀퉁이에 산처럼 쌓여 있었다. 공부는커녕 다 읽는 데에만 며칠은 걸릴 것 같았다.
너무 오랜 시간 혹사한 탓에 따끔거리는 눈가를 꾹꾹 지압하며 기계적으로 책장을 넘겼다. 끝없이 펼쳐진 활자와 복잡하기 그지없는 술식, 어려운 용어로 잔뜩 힘을 준 설명문. 정신이 혼미했다. 빨리 모든 것을 터득하고 시험을 치러야 한다는 조급함에 뇌가 오그라드는 느낌이었다.
‘차라리 라이돈한테 훔쳐 오라고 시킬까.’
음침한 생각을 하며 여덟 시간째 내리 이어진 독서의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카델이 결국 고개를 꺾고 눈을 감았다. 더 읽어 봤자 머리에 들어올 것 같지도 않았다.
앞으로 읽어야 할 책의 권수를 셈하던 그가 느리게 눈을 떠 제 옆자리를 바라보았다.
“……잘 자네.”
그곳엔 내리 카델의 옆을 지켰던 라이돈이 책상에 엎드린 채 단잠에 빠져 있었다. 초반에는 시답잖은 농담이나 스킨십을 하며 공부를 방해하다가, 한 소리 듣고서야 조용히 자신을 지켜보던 녀석이었다. 집중하느라 뭘 하고 있는지도 몰랐는데. 기다리다 지쳐 곯아떨어진 모양이었다.
옆으로 팔을 베고 누운 얼굴에는 구김 없는 평온함이 번져 있었다. 새근거리는 숨소리와 길게 뻗은 속눈썹, 새하얀 피부와 밝은 금발이 평화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어떻게 얜 자는 것도 이렇게 예쁘냐.’
골 때리는 짓을 자주 하긴 해도, 가만히만 있으면 놀라울 만큼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가만히 있을 때가 없어서 그렇지.’
눈가까지 내려온 머리칼을 가만가만 넘겨 주자 고양이처럼 귀엽게 올라간 입꼬리가 움찔거렸다. 괜히 괴롭히고 싶어 계속 머리를 쓸어 주었지만, 작게 입맛을 다실 뿐 눈을 뜨진 않았다. 마지막으로 라이돈의 부드러운 뺨을 다정하게 문질러 준 카델이 낮은 한숨과 함께 손을 떼어 냈다. 다시 공부해야 한다는 생각에 막막해진 탓이었다.
그렇게 짧은 기분 전환에 힘입어 다시 활자로 눈을 돌리려는데, 뒤편에서 심드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애인이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마밀이 보였다. 그는 밖에서 사 온 음식을 정리하며 놀란 표정의 카델과 곤히 잠든 라이돈을 번갈아 눈짓했다.
“예? 무슨… 그냥 동료예요.”
“네 녀석은 그냥 동료를 그렇게 만지작거려? 아주 되바라진 단장이구만.”
“……제가 뭘 그렇게 만지작거렸다고.”
아무 생각 없던 행동을 지적당하자 괜스레 얼굴에 열이 올랐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오해를 한 것인지. 마밀 같은 중년 남성의 입에서 저런 말을 들을 줄 몰랐던 카델이 눈에 띄게 당황했다.
‘세계의 근본이 여성향이라 그런가. 다들 이런 데 너그러운 거야?’
자신은 그저 잠든 라이돈이 귀여워 보이길래 쓰다듬었을 뿐인데. 한 번 의식하니 같은 남자를 귀여워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충격적이었다. 처음 카델 라이토스에게 빙의했을 때만 해도 이러한 변화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으니까.
마밀은 부끄러움에 꼼질거리는 카델의 앞으로 샌드위치를 놓아 주며 그가 읽은 책의 양을 점검했다.
“누굴 사귄다면 권력 있는 놈들은 피하는 게 낫지. 요정과의 연애라면 나쁠 거 없다.”
“연애 안 하고요, 얘 이래 봬도 왕자님이거든요.”
“종족이 다르니 상관없지. 네 부하 중에 고른다면, 난 그 대검사 녀석도 나쁘지 않다고 본다.”
“안 골라요! 왜 이러실까, 진짜.”
한껏 역정을 낸 카델이 씩씩거리며 샌드위치를 입 안 가득 욱여넣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카델의 독서량을 파악한 마밀은 제 할 말을 할 뿐이었다.
“사귀지도 않는 놈 만지작거릴 시간에 한 권이라도 더 읽거라. 기세만 대단하지 아주 느려 터졌어.”
[칭호 [8성 마법사]까지 남은 성취도: 72/100]
퀘스트 클리어 시엔 성취도의 수치가 표기되지 않는다. 대부분 스승인 마밀과 함께 있을 때 떠올랐기 때문에, 카델은 다음 경지가 그다지 멀지 않았었다는 데에 놀랐다. 막 7성이 된 이후 수많은 전투를 치르긴 했지만, 그것이 성장에 도움이 되었다는 건 체감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살아남느라 바빠서 신경 쓸 겨를도 없었지.’
그 수많은 고생이 영 헛물은 아니었다는 증거였으니. 절로 뿌듯한 감정이 들었다.
[마법 성취도가 약간 증가했습니다!]
[칭호 [8성 마법사]까지 남은 성취도: 74/100]
기회의 풀을 얻기 위한 벼락치기 공부는 상상 이상으로 벅찼으나, 그 어느 때보다 확실한 성과를 보였다.
한 권을 해치울 때마다 적게는 1에서 많게는 4까지 성취도가 올랐다. 이런 속도라면 시험을 치를 때쯤이면 8성 마법사가 코앞일 테다. 그것은 카델을 다른 의미로 의욕적이게 만들었다. 자신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부하들의 부담이 줄어드는 건 당연한 수순이니까.
“자기, 그러다 책이랑 사랑에 빠지는 거 아니야? 질투에 눈이 멀 것 같아!”
물론 라이돈에겐 이 모든 것들이 지루한 기다림에 불과했다. 요 며칠간 공부에만 몰두하는 카델 탓에 가뜩이나 없는 라이돈의 인내심은 지하를 뚫고 고속 질주 중이었다.
자신에겐 별 관심도 주지 않는 카델이 야속했고, 방해할 때마다 날아드는 매몰찬 구박이 서러웠다. 그 거대한 섭섭함 때문에 마밀을 찾아온 이유도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혼자 산책이라도 다녀오라니까. 가뜩이나 진도 느려서 하루 종일 공부해도 부족하단 말이야. 방해하지 마.”
“산책은 이미 다녀왔어! 내가 없어진 줄도 몰랐던 거지?”
“아… 진짜? 그럼 또 다녀와.”
“……슬퍼. 여기 있는 책을 모조리 찢어도 내 마음보다 너덜거리진 않을 거야. 보여 줄까?”
소심한 협박에도 카델은 꿋꿋하게 책장을 넘길 뿐이었다.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카델의 관심을 빼앗아 간 가증스러운 종잇장에게 분노가 치밀었다.
잔뜩 심통 난 얼굴로 산처럼 쌓인 책을 노려보던 라이돈은, 짜증 가득한 손길로 한 권을 빼 들었다. 붉은 눈동자가 심드렁하게 굴러가며 활자를 훑어내렸다.
“이런 걸 왜 배워야 하는 건데?”
“내가 부족한 건 이론이니까. 공부를 해야 실전에서 더 다양하고 완벽한 마법을 구사하지.”
“전부 내가 유아기 때나 배웠던 시답잖은 내용이잖아. 여기서 뭘 배운다는 거야?”
“……유아기?”
실로 당황스러운 발언에 그제야 카델의 시선이 옮겨 왔다. 그리 바라던 관심임에도 라이돈의 눈길은 여전히 ‘시답잖은’ 책 위에 닿아 있었다.
“멜피스 할아버지가 가르쳐 줬던 이론이랑 비슷하네. 스무 살이었나, 그쯤 배운 기억이 있어.”
“스, 스무 살이 유아기야……?”
“응. 요정이랑 인간은 성장 속도가 다르니까.”
스무 살도 유아기로 쳐준다면 라이돈은 대체 몇 살이란 말인가. 묻고 싶었지만, 돌아올 대답이 두려워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이런 기초적인 이론 때문에 카델이 날 버린 거야? 어이없어라.”
“나한텐 전혀 기초적이지 않은 문제거든. 지금도 하나하나 이해하는 데 머리가 다 뽑힐 것 같다고.”
이해가 가지 않는 문제를 제때 질문하고 싶어도, 스승인 마밀은 일 때문에 자주 자리를 비웠다. 질문할 거리를 모아 두었다가 마밀이 오는 늦저녁 때나 몰아서 배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 식의 공부는 효율이 떨어지기 마련이었지만, 그렇다고 제국까지 파견 온 마밀을 밤새 붙들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카델이 한숨과 함께 한탄하자, 망설임 없이 책을 덮은 라이돈이 반짝 눈을 빛냈다.
“내가 알려 줄까?”
“……네가?”
“내가 알려 주면 카델 공부도 더 빨리 끝나는 거잖아. 응? 알려 줄까? 알려 줄게. 내가 잘 알려 줄 테니까!”
탐탁지 않아 하는 카델의 표정에도 라이돈은 꿋꿋하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거절해도 끝까지 고집을 부릴 기세였기에, 결국 카델은 찝찝한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라이돈의 가르침이 도움이 된다면 여러모로 이득일 테니까.
“그럼 어디서부터 설명해 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