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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히 피로가 풀릴 만큼만 눈을 붙인 뒤, 곧장 가르엘을 찾아갔다. 괜찮다는 사람을 꾸역꾸역 내보내 휴식을 강요하고, 그를 대신해 루멘의 상태를 주시했다. 여전히 눈에 띄는 변화는 없었다. 죽은 듯 잠만 자는 그가 야속하게 느껴졌을 뿐.
침대 옆 의자에 앉은 그는 단정한 루멘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깨어난다면 가장 먼저 수고했다는 말을 해 주고 싶었다. 네 덕분에 모두가 무사히 탑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고, 지켜 줘서 고맙다고.
“……빨리 일어나.”
던지듯 뱉은 바람은 혼잣말로 끝났다. 카델은 부쩍 피로해진 얼굴을 문지르며 고개를 꺾었다. 메마른 입술 새로 짙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우울한 감정을 참아 내듯 지그시 눈을 감았다 뜨자, 문 건너편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방금 보냈던 가르엘이 돌아온 것일까. 다시 내보낼 기세로 문을 노려보니, 얼마 안 가 발소리의 주인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라이돈…?”
“으응? 자기, 루멘이랑 단둘이 있었던 거야? 괘씸해. 입술로 혼내 줘야겠는데.”
난데없이 등장한 라이돈의 손아귀에는 오늘도 어김없이 정체 모를 약초들이 무더기로 들려 있었다. 카델은 자신에게 성큼성큼 다가와 곧장 입술을 들이미는 라이돈의 얼굴을 잡아채곤 양 뺨을 꾹 눌렀다.
“너 또 어디 가서 이런 풀떼기를 뽑아 온 거야. 꼴은 또 왜 이래?”
순진하게 웃는 얼굴 여기저기에 흙 자국이 번져 있었다. 카델은 꾀죄죄한 라이돈의 뺨을 벅벅 문지르며 미간을 좁혔다. 거친 손길에도 라이돈의 입가에는 미소가 맺혀 있었다.
“루멘 먹이려고 가져왔어.”
“그런 거 함부로 먹이면 안 된다고 했잖아. 적어도 가르엘한테 먼저 허락을 받고 왔어야지.”
“최악이래 봤자 죽기밖에 더 해?”
“말조심해, 인마.”
대충 라이돈의 얼굴을 닦아 준 카델이 그를 가볍게 밀쳐 냈다. 그러고는 라이돈이 쥐고 있던 약초들을 강제로 빼앗았다. 내내 들고 있던 탓인지 이파리가 처참하게 짓뭉개져 있었다.
“네가 루멘 생각해서 애쓰는 건 알겠지만, 이런 걸 먹인대도…… 별 효과는 없을 거야.”
카델의 씁쓸한 목소리에 그를 내려다보던 라이돈의 눈빛이 묘해졌다. 잠시 눈을 굴리며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던 그가 거리낌 없이 루멘의 다리를 밀어 내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야, 너 환자를 그렇게 막…!”
“루멘만 생각해서 이러는 거 아닌데.”
“뭐?”
“루멘이 깨어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긴 했어. 하지만 그건, 그냥 기분이 나빠서야.”
“기분이 나빠서라니…….”
“고작 마족한테 당해서 쓰러져 있는 꼴이라니, 기분 나쁘잖아! 한심해. 같이 다니기 창피해. 그러니까 빨리 일어났으면 좋겠어.”
루멘이 환자라는 자각이 있기는 한 건지, 라이돈은 루멘이 덮은 이불을 툭툭 건드리며 혀를 찼다. 그리고 다시 카델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카델이 우울하게 있는 게 더 싫어. 나한테만 집중해야지, 카델. 하루 종일 루멘한테만 붙어 있는 거 짜증 난단 말이야.”
“……네가 애냐.”
“빨리 모든 게 평소처럼 돌아와야 카델도 괜찮아질 테니까. 그래서 애쓰고 있어. 기특하지 않아?”
일방적이고 욕심 많은 속내이긴 했으나, 카델은 그 안에 담긴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언제나 재미만을 추구하던 철없는 요정이, 이제는 남을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어찌 기특하지 않을까.
카델은 작게 미소 지으며 눈을 내리깔았다. 빼앗은 약초에서 라이돈의 노력이 느껴지는 듯했다.
“기특해. 하지만 매번 힘들게 이런 거 찾아오지 않아도 돼, 라이돈. 루멘의 상태는 약초를 먹는다고 쉽게 고쳐지는 게 아니니까.”
“고쳐져.”
“……응?”
“예전에 본 적 있어. 루멘이랑 비슷한 느낌으로 의식 불명인 동족이 있었는데, 그때 멜피스 할아버지가 어떤 약초를 먹였거든. 그랬더니 바로 눈을 떴어. 신기해서 물어봤더니 영혼만 남아 있다면 언제든 의식을 되찾게 해 주는 영험한 약초랬어.”
라이돈은 자신의 기억엔 한 치의 오차도 없다며 장담했다. 하지만 영혼만 남아 있다면 언제든 의식을 되찾게 해 주는 약초라니. 세상에 그런 게 어딨단 말인가. 그런 편리한 약초가 있다면…….
‘……잠깐만. 다른 곳이라면 몰라도 여긴 게임 속이잖아. 부활까진 아니더라도 비슷한 효과는…… 혹시 저거, [기회의 풀]을 얘기하는 건가?’
기회의 풀. 그것은 일종의 ‘리트라이 아이템’으로, 전멸로 인해 스테이지 클리어에 실패했을 때 모든 기사를 최소 체력으로 부활 시켜 전투를 이어 갈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아이템이었다.
버거운 스테이지를 억지로 클리어하려 할 때의 필수품이었고, 적이 딸피 상태일 때나 사용할 만했다. 물론 한 스테이지당 딱 한 번만 쓸 수 있기에, 남발은 불가능하다.
“라이돈. 그 약초 어떻게 생긴 건지 기억해?”
“흐음, 대충? 그 약초들도 전부 비슷하게 생긴 걸 뽑아 온 건데.”
“다 뭉개져서 모르겠거든. 종이 줄 테니까, 그림으로 그려 봐.”
카델은 서둘러 종이와 펜을 구해 와 라이돈에게 건넸다. 라이돈은 차근차근 기억을 더듬어 가며 약초를 그리기 시작했다.
‘기회의 풀 자체가 전투 중에만 사용 가능했던 데다, 목적은 적을 죽이는 데에 있어서 사람을 회복시키는 용도로도 사용할 수 있다는 생각은 못 해 봤어. 하지만 만약 그런 식으로도 쓸 수 있는 거라면.’
작은 희망이 보이자 급격히 의욕이 차올랐다. 그리고 그 의욕은, 라이돈이 완성한 그림을 보자마자 빠르게 몸집을 부풀렸다.
“그래, 이거야!”
“카델도 아는 약초야?”
“그럼! ……어디서 나는 약촌지는 모르겠지만. 혹시 환혹의 숲에서 나는 걸 본 적 있어?”
“거기선 자라지 않아. 멜피스 할아버지도 보관해 뒀던 걸 사용했을 뿐이고.”
게임 속 [기회의 풀]은 보통 유료 상점에서 판매하거나, 특수 재화로만 교환이 가능했다.
‘하지만 여긴 게임이 아니야. 시스템이 상점 기능을 갖춘 것도 아니고, 유료 상점이 이 세계에 따로 존재한다고 해도 그 위치를 몰라. 그곳 외에 기회의 풀을 구할 방법은…….’
지금으로선 딱 한 군데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히어로 오브 나이츠’의 대표 아이템 교환원이자, 카델의 하나뿐인 스승.
‘그 사람이 가지고 있을지도 몰라.’
마밀 키파. 그를 찾아야 했다.
“둘이서 제국으로 돌아가겠다고요?”
“응. 금방 다녀올게.”
반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카델과 라이돈을 번갈아 보았다. 가르엘 역시 의문스럽다는 얼굴이었다.
“어차피 돌아갈 거라면 다 함께 가는 게 낫지 않나요? 단장님과 라이돈 경, 제 마력까지 합치면 기사단 전원을 옮길 이동 마법도 사용할 수 있을 텐데요.”
“다 함께 갈 필요가 없어서 그래. 만나려는 사람이 내 스승님인데, 사람이 많은 걸 싫어하시거든. 그리고 제국에선 내가 돌아왔다는 사실을 모르길 바라서.”
예전 마밀이 주었던 [인연의 종이]에는 그가 어디에 있든 마밀의 위치가 표기됐다. 때문에 카델은 마밀이 [기회의 풀]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곧장 인연의 종이를 찾았다. 그리고 종이에 적혀 있던 마밀의 현 위치. 놀랍게도, 그곳은 오스마 제국이었다.
“폐하에겐 이미 루멘이 회복될 때까지 스니벡 공국 근처에서 대기하겠다고 서신을 보내 놨어. 아무래도 루멘은 외국의 귀족이니까 황제도 건드리기 까다롭겠지. 아마 루멘의 부상도 쉬쉬하며 숨기고 있을 거야. 이런 상황에서 기사단 전체가 돌아간다면 루멘의 상태가 들통날 거고, 마이뉴 왕국까지 얘기가 들어갈 수도 있어. 시끄러워지는 건 원하지 않아. 라이돈이랑 나, 둘만으로 충분해.”
딱히 외국의 비난으로부터 제국을 보호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루멘의 아버지인 프로치 도미닉에게 이쪽을 물어뜯을 건수를 제공하기 싫었다. 또 황실에서 루멘의 치료를 전담하는 대신 그를 제외한 기사단에게 새로운 임무를 줄지도 모른다는 걱정도 들었다.
어차피 목적은 마밀에게서 약초를 얻어 내는 것이니. 최대한 은밀하게 다녀오는 편이 나았다.
“라이돈은 위급 상황일 때 환혹술로 모습을 숨길 수도 있고, 마법사니까 이동 마법의 부담도 줄어들지. 딱 적합해.”
“그럼, 카델의 반쪽으로 딱 적합하지!”
반이 으스대는 라이돈을 살벌하게 노려보았으나, 라이돈은 아랑곳하지 않고 카델의 옆에 바짝 달라붙었다.
“그런 거라면 어쩔 수 없네요. 저와 반 경은 여기서 루멘 경을 간호하며 두 분이 약초를 구해 오길 바라겠습니다.”
“……단장을 피곤하게 하지 마라, 요정 놈.”
카델은 남아 있는 부하들에게 가벼운 격려의 말을 남긴 뒤, 곧바로 이동 마법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번 이동 마법은 내가 할 테니까, 라이돈 넌 도착하자마자 근방에 환혹술을 걸어서 우리 모습을 바꿔. 알겠지?”
“좋아, 사이좋은 노부부는 어때?”
“……그냥 평범한 남자 두 명으로 해.”
이동 마법은 이미 한 번의 실패로 감을 잡은 바 있었다. 실패할 확률은 제로. 꼼꼼하게 마법진을 살핀 카델이 안으로 라이돈을 불러들이며, 그들을 배웅하러 온 반과 가르엘을 돌아보았다.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다녀올게!”
“다녀오세요, 단장님.”
“조심해요, 단장.”
걱정스러운 표정의 두 남자를 뒤로한 채, 카델은 마법진 위로 마력을 불어넣었다.
“돌아올 땐 카델이랑 나를 반반씩 닮은 예쁜 아기가 있을 거야! 다들 안녕!”
라이돈의 망언과 함께 눈부신 섬광이 번지며, 반의 우렁찬 욕설이 서서히 멀어졌다.
도착 지점은 정확히 오스마 제국. 셀레브와의 전투가 벌어졌던 남쪽 관문이었다. 카델과 라이돈은 도착하자마자 조금 떨어진 숲에 몸을 숨겼다.
‘마밀이 어디쯤 있는지 볼까.’
처음 확인했을 땐 낯선 이름의 여관이었는데. 지금도 그곳에 있다면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찾아가야 할 테다. 카델은 경비병의 수를 셈하며 환혹술을 준비하는 라이돈의 옆에서 인연의 종이를 꺼냈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뭐야? 성에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