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1화 (251/521)

루멘과의 짧은 말다툼 속에서, 자신은 내면 깊숙한 곳에 뿌리 박고 있던 습관적인 사고를 발견했다. 희생정신. 위기 상황에서 언제나 가장 먼저 머리를 내미는 ‘희생정신’을, 그제야 눈치챌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내면에 가장 크게 영향을 끼친 카델 라이토스의 의지임을 깨달았다. 그에 대한 반발심으로 루멘을 보냈느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그저 무조건적인 희생이 자신의 뜻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순간. 정말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떠올렸을 뿐이었다.

자신은 모두와 함께 퀘스트를 헤쳐 나가고 싶었다. 자신의 희생을 통해 모두를 배경 삼는 게 아니라, 모두와 동등하게. 발맞춰 나아가고 싶었다.

자신은 누구보다도 단원들의 강점을 잘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그들의 강점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다면, 단장으로서도 빙의자로서도 최악이지 않겠는가.

‘물론 그 선택 때문에 루멘은 혼수상태에 빠졌지만.’

만약 카델 라이토스의 의지에 따랐더라면 루멘이 그런 심한 꼴을 당하진 않아도 됐을 거다. 그리고 그 선택에 대한 후회는 날로 커지고 있었다. 반이 그의 진심을 말해 주기 전까지는.

“넌 내가 더 이상 희생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당연하죠. 전 단장의 모든 부분을 좋아하지만, 단장이 혼자 불구덩이에 들어가는 모습까지 좋아하긴 힘들어요.”

“그게… 희생하는 게 카델 라이토스의 뜻이래도, 그래도 내가 그 뜻을 접기를 원해?”

버겁다는 듯 꾸역꾸역 말을 이어 가는 카델의 모습에, 반 역시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여전히 맞잡은 카델의 손을 자신의 앞으로 끌어당기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네. 그러길 원해요.”

“그게 좋은 거야? 내가 희생하는 모습보다, 그게 더 좋아?”

“물론이죠.”

“그럼 만약…….”

심장 소리가 점점 크게 울렸다. 생각하는 속도가 치미는 충동을 이기지 못했다. 반이 카델 라이토스가 아닌 신여환의 선택을, 신여환의 의지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것만으로도 얄팍한 희망이 피어났다. 어쩌면 반은, 카델 라이토스보다 자신을 좋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자신이 누구인지 깨닫는대도 여전히 사랑해 줄지 모른다고.

그 사실을 확인받을 수만 있다면.

“그 선택이 날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만든대도, 다른 사람이 된 나라도…… 괜찮아?”

자신감 없이 가라앉은 목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차마 반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맞잡은 손에 시선을 둔 채 대답을 기다렸다. 막상 뱉고 보니 미친 사람이 지껄인 소리 같았다. 반이 제대로 뜻을 이해할 수 있을까. 좀 더 확실하게 물었어야 했나.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났으나,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지속되는 침묵에 결국 불안을 이기지 못한 카델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보이는 반의 얼굴은 묘하게 경직되어 있었다. 설마 질문이 기분 나빴던 걸까. 그런 걱정이 들었으나, 오래가진 않았다. 반의 시선이 카델이 아닌 그 너머를 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

“……아. 죄송해요, 단장. 뭐라고 하셨죠?”

지금까지 반이 자신과 이야기를 나눌 때 주의를 돌리는 일은 없었다. 그가 자신의 간절한 물음을 듣지 못했다는 허탈함에 어색한 미소만 짓던 카델이 조금 전까지 반의 시선이 닿았던 뒤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딜 그렇게 넋 놓고 보고 있었던 거야. 취향인 사람이라도 지나갔어?”

“예?”

잔뜩 어이없어하는 목소리가 들려왔으나 모른 척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사람은커녕 개미 한 마리 없는 적적한 풍경이 펼쳐져 있을 뿐이다. 대체 어디에 주의를 뺏겼던 건지. 모처럼 마음먹고 던진 질문이 힘을 잃자 덩달아 맥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실망하며 다시 반을 돌아보자, 묘하게 불퉁해진 얼굴이 보였다. 그간 별로 본 적 없는 표정 변화에 멈칫하는 카델의 앞으로, 웃음기 없는 반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왜 이래?”

“정말 제가 누굴 좋아하는지 몰라서 그런 소리를 하나 싶어서요.”

“어…?”

“취향인 사람은 바로 앞에 있고, 전 여기저기 한눈팔고 다니는 가벼운 남자가 아니에요.”

“어… 그, 그럼. 알지.”

조금 놀려 주려던 것뿐인데. 진심이 담긴 항변에 당황한 카델이 어영부영 말꼬리를 흐렸다. 반은 자신을 피하는 카델의 눈을 뚫어지게 응시하다, 얕은 한숨과 함께 멀어졌다.

“뭘 보고 있었던 건 아니에요. 그냥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요.”

“이상한 느낌?”

“그게…… 아니에요. 신경 쓰지 마세요.”

반은 별거 아니었다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카델은 자신의 용기를 산산이 조각나게 한 원흉을 확실하게 파악하고 싶었으므로, 포기하지 않고 캐물었다. 결국 카델의 종용을 이기지 못한 반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이 마을에 온 뒤로 종종 찝찝한 기분이 들었거든요. 꼭 몸에 불순물이 달라붙는 느낌이랄까, 불쾌한 관심을 받는 느낌이랄까……. 이런 느낌은 대부분 누군가 따라붙었을 때 드는데, 주변엔 딱히 그럴 만한 사람이 안 보이거든요. 거슬리는 기척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그런 느낌만 든다는 거야?”

“네. 아무래도 요즘 예민해졌나 봐요. 신경 쓰지 마세요, 단장.”

가볍게 웃어넘기려는 반의 모습에도 카델은 쉽사리 화제를 바꾸지 못했다. 반은 기사단 중에서도 유독 직감이 뛰어난 사내였고, 기척에 민감했다. 동물에 가까운 본능적 감각이 충실하게 발달했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런 그가 ‘이상한 느낌’이 든다고 한다면, 아무 이유 없이 그저 기분 탓일 확률은 낮았다. 그리고 카델은 반이 느낀 불쾌함의 근원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잊고 있었네.’

루멘의 부상 때문에 완전히 잊고 있었다. 요젠 바르딕타의 존재를.

“곧 찾아갈게. 그때 네가 내 습격을 막아 낸다면,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거야.”

입단 제의에 대한 대답을 들으려면 요젠의 습격에 대비해야 했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만 해도 인테 설원에서의 퀘스트가 끝나는 시기에 맞춰 올 확률이 높다고 예상했었다. 하지만 요젠은 기사단이 마을에 입성하고 닷새가 지난 지금까지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만약 이 닷새 동안 요젠이 습격을 꾀했다면, 자신은 터무니없을 만큼 쉽게 당했을 것이다. 그만큼 여유가 없었으니까.

‘반이 느낀 그 감각은 분명 요젠에 대한 본능적 적신호일 거야.’

반 덕분에 요젠이 근처에 머물고 있으리란 사실을 유추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자신은 요젠이 올 때까지 부하들과 거리를 두어야 하는 걸까.

‘내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습격할 것 같진 않고. 혼자 다니는 편이 나으려나. 습격을 유도하는 편이 대비하기도 편하고 말이지.’

하지만 때가 때인지라 되도록 루멘의 옆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그러한 고민을 하다, 문득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지금 난 쿤라의 힘이 없잖아……?’

요젠의 공격으로부터 가장 효과적으로 그를 보호해 주었던 쿤라의 비늘 갑옷. 지금은 그것을 사용할 수 없다. 현재 쿤라는 카델에게 나눠 준 힘으로 확인할 게 있다며 인테 설원으로 떠난 상태였다. 최소한의 보험이 사라진 것이다.

‘……일단은 부하들이랑 붙어 있는 게 낫겠네.’

쿤라가 돌아올 때까지는 최대한 만남을 미루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카델은 어딘가에서 이쪽을 감시하고 있을 요젠을 의식하며 반의 손을 끌어당겼다.

“피곤해서 그런 걸지도 몰라. 수련은 적당히 하고, 이만 들어가자.”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