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0화 (250/521)

카델의 제안에 잠시 멍한 얼굴로 굳어 있던 반이 머뭇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그, 그럼 저 빨리 씻고 나올게요.”

“……씻는다고? 지금?”

“땀을 많이 흘려서……. 냄새 날 거예요.”

대체 밖에 있다가 산책하겠다고 씻으러 들어가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카델은 조금 황당한 기분이 되어 옷자락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반을 바라보았다.

그간 그와 의식적으로 거리를 두고 있었기에 이렇게 단둘이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함께 시간을 보내고자 한 결심엔 제법 큰 용기가 필요했다. 여러모로 큰 결단이었는데.

카델에게는 그가 깨끗하고 보송보송해지길 기다릴 체력이 없었으므로, 조금씩 멀어지는 반의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러고는 멈칫하는 그의 목덜미를 끌어안듯 당기며 쇄골 언저리에 코를 갖다 댔다.

“무, 뭐, 뭐 하시는…!”

카델의 돌발 행동에 반은 그야말로 습격당한 야생 동물처럼 펄쩍 뛰며 몸을 뺐다. 금세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말까지 더듬는 그를 놓아준 카델이 가벼운 어투로 말했다.

“하나도 냄새 안 나. 넌 어떻게 하루 종일 수련을 해 대는데도 악취라는 걸 안 풍기냐. 잘생긴 애들은 원래 그래?”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으나 그를 듣는 반의 얼굴에선 김이라도 솟을 기세였다. 카델은 입을 꾹 다문 채 제 숨결이 닿았던 곳을 문지르는 반의 가슴팍을 주먹으로 가볍게 쳤다.

“걷자.”

“……네.”

드디어 순순해진 반을 이끌고, 카델은 다시금 정처 없는 발길을 이어 갔다.

걷는 동안 반은 카델의 좁은 보폭에 맞춰 걸으며 그를 힐끔거렸다. 딱히 할 말이 있어서라기보단, 그냥 눈이 갔기 때문이었다. 생각에 잠긴 고요한 표정과 지친 듯 가라앉은 잿빛 눈동자가 유독 눈길을 끌었다.

카델이라고 그 진득한 시선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얼굴 뚫리겠네.”

“아,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뭐라고 하는 거 아니야.”

설핏 웃은 카델이 반의 팔을 당겨 맞은편으로 걸어갔다. 폭 좁은 강물을 가로지르며 다리처럼 놓인 나무판자. 그 위에 걸터앉자, 반도 옆자리를 차지했다.

신발을 벗고 다리를 쭉 뻗으니 종아리까지 강물에 잠겼다. 시원한 물살에 은은하게 몰려오던 잠기운이 싹 달아나는 기분이었다.

“시원하고 좋다.”

가볍게 물장구를 치고 있으려니 반도 그를 따라 강물에 발을 담갔다. 카델이 씩 웃으며 반에게 물을 튀기자, 반도 작게 웃으며 물장구를 쳤다. 워낙 부실한 물장구라 카델에겐 몇 방울 튀어 오르지도 않았다.

잠시 그런 시답잖은 장난을 이어 가던 카델이 반을 바라보았다. 지극히 평화로워 보이는 그의 표정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이걸 보고 싶었던 건데.’

상처받고, 주눅 들고, 자신의 눈치를 보는 얼굴이 아니라. 자신의 옆에서 행복을 느끼는 반을 보고 싶었다. 자신의 옆을 지킨 것을 후회하지 않게 해 주겠노라 다짐까지 해 놓고선. 결국엔 후회할 짓을 저질러 버리지 않았는가.

자신의 안에 카델 라이토스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그의 의지가 자신의 선택과 감정을 뒤흔들고 있다는 사실이. 감당하기 힘들었다. 그가 자신을 꼭두각시처럼 조종하고 있다는 소름 끼치는 감각마저 느꼈다.

그런데도 카델 라이토스를 완벽하게 부정할 수 없는, 죽어도 피해자는 되지 못할 자신의 처지가 서글퍼서. 그래서 그의 존재를 알고, 믿고, 따르고 있을 반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소중한 사람이, 자신이 그리도 기피하는 대상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싫었으니까.

그저 화풀이일 뿐이었다. 카델 라이토스가 아니라, 신여환을 좋아해 달라는 철없는 투정에 불과했다. 부하들을 아끼는 마음마저 누구의 것인지 분간 못하는 주제에. 그런 주제에 억지를 부렸다. 정말이지 못 돼먹은 인간이 아닐 수 없었다.

“예민하게 굴었던 거, 미안해.”

조용한 사과에 반과 곧장 시선이 마주쳤다. 또렷한 황금색 눈동자는 그의 마음을 다 알고 있다는 듯 잔잔하게 빛나고 있었다.

“저는…….”

“괜찮다고는 하지 말고.”

“……저는, 단장이 전부예요.”

가만히 눈을 내리깐 반이 판자를 짚은 카델의 손가락을 조심스럽게 건드렸다. 허락을 구하는 듯한 간지러운 손길에 손바닥을 뒤집자, 반의 커다란 손이 깍지를 껴 왔다.

“그래서 단장이 절 피하는 것 같으면, 설령 그게 착각이래도 힘들어요. 이유를 몰라도 무작정 사과하고 싶어져요.”

“…….”

“너무 괴로운데, 그건 전부…… 단장이 작은 관심만 줘도 전부 사라지니까. 그러니까, 그냥…… 그것만 기억해 줘요. 제가 단장의 아주 짧은 웃음만으로도 잘 살아갈 수 있다는 거.”

깍지 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카델은 그의 손을 꽉 마주 잡고, 마른침을 삼켰다. 쉽사리 입을 떼지 못하는 카델의 앞에서, 반은 멋쩍게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너무 미련해 보여요?”

“……아니.”

미련하지 않았다. 다정했고, 따뜻했고, 모조리 보답하고 싶을 만큼 애틋하기만 했다. 그래서 자격도 없는 질투가 났다.

“나도…….”

그의 애정을 받고 싶었다. 인정받고 싶었다. 그런 스스로가 추하게 느껴졌음에도 울컥울컥 차오르는 욕심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반의 앞에 자신의 욕심을 내세우기에는, 너무 많은 것들이 그들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결국 말을 잇지 못한 카델이 입을 다물었다. 무거워진 분위기에 슬쩍 카델의 표정을 살핀 반이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이런 상황에서 말하기엔 좀 뭣한 얘기지만요. 솔직히 저 좀 놀랐어요.”

“……놀라? 왜?”

“루멘 녀석도 그렇지만, 단장이요. 전 당연히 단장이 최상층에 오를 줄 알았거든요.”

그는 뒷말을 고심하듯 잠시 뜸을 들이다,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단장은 항상 가장 중요한 일을 도맡으려 했으니까요.”

“맛있는 부분만 골라 먹는다는 얘긴가.”

“굳이 따지자면 독이 든 부분만 떼 먹었죠. 다른 사람이 먹기 전에 가로채면서까지.”

제법 단호하게 일갈한 반이 웃음기 사라진 얼굴로 카델을 직시했다.

“다른 사람이 다치는 것보다 자기가 다치는 게 낫다고 생각하죠.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물불 안 가리고 몸을 던지고, 동료를 안전하게 지키기 위함이라면서 정작 자기는 목숨을 걸어요.”

“…….”

“제가 아는 단장은 그랬어요. 만약 최상층에 보낼 만한 다른 부하가 있대도, 그곳이 위험하다면 단장은 직접 움직일 테니까. 그래서 단장 대신 루멘 녀석이 최상층에 갔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그 녀석이 단장의 신뢰를 얻었다는 데에 질투도 났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반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그는 자신의 시선을 피하지 않는 카델의 눈동자를 다정하게 응시했다.

“평생 혼자서 모든 걸 감당하며 희생할 것 같던 사람이, 드디어 주변을 돌아봐 주는구나 싶어서. 단장이 기사단을 위해 싸울 준비가 돼 있는 것처럼,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언제나 단장을 위해 싸울 준비가 돼 있어요. 드디어 그걸 알아준 것 같아서……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고 해야 할까요.”

진심으로 안도하는 듯한 그의 표정에, 카델은 문득 최상층을 코앞에 두었던 때를 떠올렸다.

“매번 위험한 일은 혼자 떠맡으려고 하지. 그게 부하를 위해서라고는 하지 마. 그럴 때마다 이쪽은 네 신뢰를 잃는 기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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