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9화 (249/521)

“치료해. 빨리.”

그것이 루멘을 데리고 돌아온 라이돈의 첫마디였다. 앞뒤 설명 없는 일방적인 요구였으나, 그 누구도 토를 달지 못했다.

“……루멘.”

돌아온 루멘에게선 일말의 생명력도 느껴지지 않았다. 핏기 없이 하얗게 질린 얼굴과 빳빳하게 굳어 버린 몸, 얼음장 같은 체온은 도저히 산 사람의 것 같지가 않았다.

피와 상처로 엉망이 된 얼굴에선 평소의 단정함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치열했던 전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처참한 모습. 카델은 조심스러운 손길로 루멘의 뺨을 쓸었다.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밀랍 인형을 만지는 것 같은 생경한 촉감에, 카델이 겁먹은 아이처럼 빠르게 손을 떼어 냈다.

떨리는 눈매가 와락 일그러졌다. 두려움이 연이은 밀물처럼 몰려들었다. 루멘의 생존을 확인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실행에 옮길 수가 없었다. 그가 살아 있다는 것 외에 그 어떤 것도 확인받고 싶지 않았다.

그를 대신해 움직인 이는 가르엘이었다. 다급히 마기를 개방한 그가 루멘의 맥을 짚고는, 가만히 미간을 좁혔다. 긴장된 얼굴로 다른 단원들을 돌아본 가르엘이 곧장 치유술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설원을 벗어나도록 하지.]

치유술이 진행되는 동안 쿤라는 비행의 경로를 틀었다. 아직 봉인을 강화하지 못했으나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이런 추위 속에서는 살 사람도 죽을 터였다.

기사단은 말 한마디 없이 루멘이 치유받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모두가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는 것이다. 루멘의 상태는 ‘전투로 인한 부상’ 정도로 끝나지 않았다. 그는 마치 모든 생명력을 소진한 것처럼 건조하게 메말랐고, 이대로 영원히 눈을 뜨지 못할 것 같았다.

반과 라이돈은 하루가 멀다 하고 루멘과 다툼을 벌여 왔지만, 진심으로 그가 죽어도 좋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것도 모두를 위해 싸우다 죽는 최후라니. 지금 그들이 느끼는 감정은, 루멘이 자신들을 위해 목숨이 다할 때까지 싸우는 모습을 상상할 수 없었기에 더욱 혼란스러운 것이었다.

그리고 그를 치유하는 가르엘 역시, 루멘의 상태에 심한 당혹감을 느끼고 있었다.

‘……텅 비었어.’

지금껏 수많은 사람을 상대로 치유술을 사용해 왔다. 이보다 더한 외상을 입은 사람도 살린 경험이 있었다. 상처의 정도만 따지자면 바스킨 마을에서의 카델 쪽이 더 심각했다.

하지만 루멘은 뭔가가 달랐다. 그의 상처는 단순한 외상이나 내상을 떠나, 근본적인 무언가가 모조리 빠져나간 느낌이었다.

‘꼭 껍데기만 남은 사람 같다.’

분명 루멘은 아직 죽지 않았다. 그의 몸속을 순환하는 마기를 통해 알 수 있었다. 그런데도 산 사람이라면 마땅히 느껴져야 할 생기를 찾기가 어려웠다. 생명력을 감지해 어떻게든 붙들어야 할 텐데. 실보다 가느다란 기운은 잡기는커녕 더듬기조차 힘들었다.

루멘의 가슴을 짚은 손 아래로 상당량의 마기가 응축되었으나, 치유는 진전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쿤라의 등 위에서 한참을 고전하던 가르엘은 마침내 절망적인 결론을 내렸다.

“상처는 전부 치료했지만… 의식이 돌아올지는 장담하지 못하겠습니다.”

*

쿤라는 기사단을 스니벡 공국과 인접한 산 아래에 내려 주었다.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한밤중이었고, 마을과도 멀리 떨어져 있어 그의 거대한 몸집이 눈길을 끌 걱정은 없었다.

인간형으로 변화한 쿤라는 분주한 기사단의 틈에서 어두운 낯의 카델을 따로 불러냈다.

“난 설원의 봉인으로 돌아갈 생각이다. 네게 빌려준 힘을 통해 확인하고 싶은 게 있으니, 한동안은 내 힘을 사용하지 못할 거야. 오래 있진 않을 거다. 가는 김에 봉인도 강화해 주지.”

“네.”

카델은 쿤라의 얘기를 제대로 듣는 것 같지도 않았다. 쿤라는 반쯤 넋이 나가 보이는 카델을 응시하다, 눈길을 돌려 단원들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가르엘의 등에 업힌 루멘을 향했다.

“무리하게 한계를 넘은 모양이더군. 저런 녀석들을 종종 봐 왔지.”

“……그 사람들은 어떻게 됐나요? 루멘은, 루멘은 살 수 있겠죠?”

“욕심낸다면 살 테고, 만족한다면 죽을 거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보통 저런 녀석들은 불가능한 바람을 이루기 위해 제 생명을 깎아 한계를 넘어선다. 그 바람을 이룬 데서 만족한다면 그대로 사그라질 테지만, 그보다 더한 것을 욕심낸다면 불씨가 튀어 오를 거야. 그러니 반쪽이 네가 할 수 있는 건, 저 녀석이 다시 불타오르길 바라는 것뿐이다.”

바라는 것. 그것만이 할 수 있는 전부라는 이야기에, 카델의 눈빛이 잘게 떨렸다. 쿤라는 그런 카델의 머리를 가볍게 토닥이며 말했다.

“반쪽이. 널 남겨 두고 쓰러졌으니 저 녀석도 쉽게 만족하진 못할 거다. 인간이란 감정에 죽고, 감정에 사는 종족이니. 너무 걱정 말거라.”

덤덤한 위로에 카델이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간 쿤라는 인테 설원을 향한 비행을 재개했다.

의식 불명인 환자가 있으니 야영을 할 순 없었다. 그들은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잉첸 마을’에 찾아가 작은 여관방을 얻었다.

상처의 치료는 끝났으나, 가르엘은 루멘의 의식을 깨우기 위해 치유술을 이어 갔다. 다른 이들 역시 방 안에서 루멘이 깨어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하루, 이틀, 사흘, 나흘이 지날 때까지도. 루멘은 깨어나지 않았다. 가벼운 뒤척임도 없이, 희미하기만 한 호흡을 간신히 이어 갈 뿐이었다.

그렇다고 루멘을 남겨 둔 채 따로 행동할 순 없었다. 적린 기사단은 루멘과 함께 마을에 정체되어 있기를 택했다.

그동안 카델은 황제에게 현 상황에 대한 서신을 보냈다. 설원의 봉인은 쿤라에게 맡겨 해결했고, 기사단의 주요 인력이 의식 불명 상태이니. 아무리 황제라도 다음 임무를 독촉하진 못할 테다. 독촉한다 해도 카델은 따를 마음이 없었다.

“……미안합니다.”

들려오는 목소리에 카델은 루멘에게 고정되었던 시선을 옮겼다. 그곳에는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듯 굳은 얼굴을 한 가르엘이 있었다.

“갑자기 뭐가 미안하다는 거야.”

“치유사로 와 놓곤 동료 하나 제대로 살려 내지 못하잖습니까. 면목이 없군요.”

가르엘은 밤낮없이 루멘의 옆에 붙어 마안을 개방하며 치유술을 진행해 왔다. 식사도 따로 챙겨 주지 않으면 까먹고 거를 만큼 열중이었다. 루멘이 깨어나지 못하는 것은 그의 실력이 뒤떨어지거나, 노력이 덜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가 없었다면 루멘은 이렇게 의식이 돌아오기를 기다릴 새도 없이 출혈로 죽었을 터였다.

“그런 소리 하지 마. 네가 있어서 이 정도로 끝난 거니까. ……계속 마기를 사용하느라 힘들었을 텐데. 조금 쉬지 그래.”

“괜찮습니다. 단장님이야말로 쉬지 그래요. 계속 앉아 있으면 다리 굳습니다.”

“상관 없―”

“환자가 두 명이면 아무리 저라도 지칩니다. 존재만으로도 응원이 되는 단장님이지만, 그렇다고 종일 제 눈앞에 있어 줄 필요는 없어요.”

가르엘의 눈에 비친 카델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아슬아슬했다. 그가 밤낮없이 치료에 열중하는 동안, 카델 역시 바로 옆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았으니. 체력도 좋지 못한 사람이 제대로 쉬지도 않는다면 언제 실신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결국 가르엘의 염려를 이기지 못한 카델이 몸을 일으켰다.

“그럼 조금만 쉬었다 올게.”

“많이 쉬어도 돼요.”

“그건 싫어.”

고집스럽게 대꾸한 그가 멋쩍게 웃으며 문을 열었다.

“나 돌아오면 그땐 너도 좀 쉬어 둬.”

잠깐 눈이라도 붙이고 있을 생각이었다. 가르엘의 말대로 하는 것도 없이 날을 새웠다가 쓰러지기라도 하면 짐만 되니까.

하지만 침대에 누워도 잠은커녕 잡생각만 늘어질 뿐이었다. 깜깜한 시야 속에서 끊임없이 과거의 선택이 되풀이됐다.

그때 루멘이 아닌 자신이 최상층에 올랐더라면. 그가 각성하지 않아도 좋았다. 등급이야 어찌 되든 상관없었다. 모두가 건강하게 살아남는 것을 바랐으니까. 자신이 희생을 버리고 동료를 믿은 대가가 이것이라면, 차라리…….

‘……그래. 잘 수 있을 리가 없지.’

계속 누워 있다간 전혀 유익하지 않은 고민으로 스스로를 갉아먹을 것 같았다. 카델은 여관을 나서 산책이나 하기로 마음먹었다.

“벌써 밤이네.”

선명하게 빛나는 그믐달을 올려다본 카델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하루 종일 여관 안에 있었더니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몰랐다. 뻑뻑한 눈꺼풀을 비빈 그가 행선지 없는 걸음을 옮겼다. 선선한 바람을 맞으니 걸을수록 정신이 깨어났다. 맑아지는 정신과 반대로 몸은 무거워지기만 했지만.

간단한 먹거리라도 사서 가르엘에게 돌아갈까. 늦은 밤이라 문을 연 가게는 많지 않았지만, 찾는다면 나올 터였다. 그리 생각하며 넓은 길로 빠져나가려던 때.

“……단장?”

맞은편에서부터 익숙한 인형이 다가왔다. 반이었다. 가벼운 옷차림을 한 그는 어깨에 대검을 걸치고 있었다. 카델은 반이 수련을 하고 오는 길임을 눈치챘다.

“또 안 쉬고 힘쓰러 나온 거야?”

카델의 물음에 반은 어색하게 웃으며 목덜미를 쓸었다. 루멘이 깨어나길 기다리는 동안 가르엘과 카델은 내내 그의 옆을 지켰으나, 반이나 라이돈은 아니었다.

라이돈은 예고 없이 모습을 숨겼다가 불쑥 나타나선 어디서 난지도 모를 약초 따위를 루멘의 입에 쑤셔 넣었다. 그러고는 타박하는 카델의 얼굴에 마구 입을 맞춘 뒤, 다시금 어딘가로 떠났다. 나름대로 루멘의 회복을 바라는 모양이었다.

반면 반은 카델의 식사를 챙기는 겸 가르엘의 몫을 챙기는 역할을 맡았고, 그 외의 시간은 전부 수련에 매진했다. 루멘의 사투가 그의 내면에 있는 무언가를 자극한 듯 지치지도 않고 몸을 단련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반에게선 고된 수련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단장은 이 시간에 어딜 가고 있었던 거예요? 밤에 혼자 다니면 위험해요. 데려다줄게요.”

“나 강하거든.”

“그건 반박할 수 없지만요.”

“그냥, 산책하고 있었어.”

잠시 뜸을 들이던 카델이 반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같이 걸을래?”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