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을 떠나세요. 바깥에는 훨씬 더 많은, 좋은 것들이 있으니까. 그곳에서 저보다 다정하고, 아름답고, 귀한 것을 찾아…… 소중하게 여겨 주세요.”
소중하게 여겨 주지 못했다.
“사랑하고 싶어. 널 위해서라면 세계라도 버릴 수 있을 만큼. 내 삶이 네 존재로 충분할 만큼. 어떤 의심도 없이, 사랑을 확신하고 싶어.”
확신하게 해 주지 못했다.
아무것도. 정말이지 아무것도. 해 준 것도, 이룬 것도 없었다. 그러니 이런 식으로 죽을 수는 없었다.
“명령이다. 네가 할 수 있는 그 이상을 꺼내, 무조건 승리해라.”
집요하게 나아간 끝에 심장의 앞에 도착했으나, 몸에는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이곳에 온 내내 그를 괴롭히던 지독한 추위마저 느껴지지 않았다. 모든 무게감이 사라지고, 몸이 붕 뜬 기분이었다.
이 얄팍한 의식이 끊어지는 순간이 삶의 종점일 것임을 직감했다. 가만히 있는 것만이 목숨을 연장하는 유일한 길이었다. 그러나 루멘은 기어코 다리를 세워 몸을 일으켰다.
‘내가 할 수 있는 그 이상.’
그것은 미완성 기술의 완성도 아니었고, 가진 기술의 연사도 아니었다.
지금의 자신은 불가능한 일. 한계를 뛰어넘어야만 할 수 있는 일. 그것으로 모두를 살릴 수 있다면, 루멘은 기꺼이 목숨을 불태울 수 있었다.
‘이건, 빌어먹을 희생이 아니니까.’
이것은 자신이 바란 삶을 지키기 위한 투쟁이었고, 소중한 이와의 약속을 향한 발악이었다.
생명이 모조리 불타 한 줌 재가 된다 할지라도, 끝끝내 관철해야 할 단 하나의 신념.
“슬슬 죽겠네에…….”
앞이 보이지 않았기에 눈을 감았다. 검집에 손을 올린 루멘이 발도술의 자세를 취했다. 대부분이 희미해진 의식 속에서, 점점 옅어지는 심장의 고동만이 두각을 드러냈다. 자연스럽게 그 박동에 집중했다. 희미한 생명의 흐름을 쫓았다.
엘비의 눈에, 그것은 얼어 버린 시체의 모습 같았다. 어떠한 움직임도, 기세도 느껴지지 않는다. 조각처럼 굳어 있는 루멘을 힐끔거리던 엘비가 입술을 삐죽였다. 최후를 예감한 것이다.
“죽었나 보―”
하지만 그가 루멘의 죽음을 속단한 순간.
루멘의 발아래로, 그를 둘러싼 원형의 기운이 피어올랐다. 푸른색의 기운은 바람에 퍼진 불씨처럼 빠른 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엘비의 표정이 구겨졌다. 본능적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낀 동물처럼, 루멘을 향한 시선에 날이 섰다.
“아, 아직 안 죽었어?”
당연하게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루멘을 둘러싼 기운은 점점 맹렬하게 팽창했고, 기운이 일으킨 바람에 흑색의 머리칼이 흩날렸다.
그리고 그의 검날이 천천히 검집을 빠져나왔다.
“허……?”
푸른빛에 휩싸인 검날. 그 고요한 등장과 동시에, 공간이 일그러졌다.
까드득. 끄득.
일그러진 공간 속에서, 엘비의 심장이 섬뜩한 소리를 내며 구부러지기 시작했다. 어떤 공격에도 흠집 하나 남지 않던 엘비의 심장은, 나선형으로 휘어지며 무형의 점에 흡수되듯 그 안으로 빨려들었다.
그 말도 안 되는 광경을 마주한 엘비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저, 저게 무, 무슨……! 안 돼!”
뒤늦게 사태의 심각함을 인지한 엘비가 루멘에게로 달려 나갔다. 그 다급한 발소리에 반응하듯, 굳게 닫혀 있던 눈꺼풀이 열렸다. 드러난 푸른 눈동자는 시체처럼 탁하게 물들어 단 한 줄의 빛도 비치지 않았다. 그의 모든 생명력은 오로지 그의 검에만 반응할 뿐이었다.
반절이 빠져나온 검날에서 눈부신 섬광이 폭발하듯 몸집을 부풀렸다. 작게 벌어진 입새로 가느다란 입김이 새어 나왔다.
바로 이것이, 그가 불태운 목숨의 대가.
“멈추란 말이야…!”
월광쾌검 - 시멸재滅始在.
소용돌이처럼 굽이치던 심장의 움직임이 정지했다. 루멘을 감싸던 기운 또한 사라졌다. 대기를 채운 지독한 적막 속에서, 부드럽게 납검을 마친 루멘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뒤에는 잔뜩 겁먹은 얼굴로 그의 복부에 얼음 창을 쑤셔 박은 엘비가 서 있었다. 루멘은 그런 엘비를 무감히 응시하며 말했다.
“이미 끝났어.”
그와 동시에, 비틀린 채 굳어 버린 심장에 수백 갈래의 균열이 번졌다. 공포에 질린 엘비의 시선이 뒤늦게 그것을 발견했으나,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부서지는 심장을 따라 엘비의 육체가 산산이 조각났다. 흩날리는 파편이 허공에 수를 놓듯 퍼져 나가고. 마침내, 탑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위태롭게 흔들리는 탑의 천장을 올려다보며, 루멘이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끝났, 군…….”
그의 눈 속에 희미하게 일렁이던 불씨가 꺼지고, 힘을 잃은 몸이 천천히 무너졌다.
[축하드립니다! 메인 퀘스트 ‘마계의 탑’을 클리어하였습니다!]
[속성 포인트가 10 증가하였습니다.]
[명성이 5 증가하였습니다.]
[새로운 칭호 [무너진 탑의 기사]를 획득하였습니다.]
[고급 아이템 [마족의 뼛가루], [빙결의 핵]을 획득하였습니다.]
[기사 ‘루멘 도미닉’ 각성 퀘스트 완료!]
[축하드립니다! 기사 ‘루멘 도미닉’이 최대 등급을 달성했습니다.]
연달아 떠오르는 시스템 창은 퀘스트의 종결을 알렸으나, 시스템의 경쾌한 알림음도, 붕괴하는 탑의 진동도. 카델의 주의를 끌지는 못했다.
“……루멘.”
클리어 직전까지 그의 시야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시스템 창.
[반 헤르도스: 59%]
[라이돈: 51%]
[가르엘 몬자시: 87%]
[루멘 도미닉: 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