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6화 (246/521)

“지금의 넌 엘비를 감당 못 해. 도와줄 사람도 없지. 만약 패배한다면, 탑에 남겨진 모두가 죽는다.”

‘내가 감당할 수 없다는 게, 이런 의미였나…….’

확신이 들었다. 카델은 처음부터 본인이 직접 엘비의 심장을 처리할 계획이었다. 적어도 그는 최상층의 위험성을 알고 있었고, 그것을 홀로 부담하려 했다.

자신이 가진 최강의 검술로도 흠집을 남기는 것이 전부인데. 무리한 결단이었다. 그가 마지막에라도 생각을 바꾼 것을 다행이라고 여겨야 할까?

‘대장의 판단을 실수로 만들고 싶지는 않은데.’

카델은 본인의 희생 대신 부하에 대한 신뢰를 택했다. 그 신뢰에, 기대에 응하고 싶었다. 부응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너덜너덜한 팔다리에 힘을 주어 비틀자, 몸을 결박하고 있던 얇은 얼음이 깨졌다. 가까스로 벽에서 빠져나온 그가 높이를 가늠하지 못한 채 그대로 바닥에 곤두박질쳤다.

“보, 볼품없어. 한심해.”

괴로운 신음이 고요한 내부를 울렸다. 바닥을 짚은 루멘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최강의 기술을 반사당한 만큼, 루멘의 상태는 최악이었다. 비늘 갑옷이 없었다면 꼼짝없이 즉사였을 테다.

흘러내린 피로 엉망이 된 얼굴이 엘비를 향했다. 눈꺼풀이 찢어져 반쯤 풀린 눈이었지만, 그를 노려보는 눈빛만큼은 놀라울 정도로 형형했다. 그에 엘비가 슬쩍 시선을 내리깔며 중얼거렸다.

“뭘 노려봐… 주, 죽여 버리고 싶게….”

그와 동시에, 바닥을 디딘 루멘의 발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빠르게 다리를 타고 오르는 두꺼운 얼음에 루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어, 어떻게 싸울까 구, 궁금해서 놔뒀는데…. 이제 안 봐줄래.”

겨우 얼음을 베어 빠져나와도, 새롭게 바닥을 딛기가 무섭게 또다시 다리가 얼어붙었다. 몇 차례 탈출을 시도하던 루멘이 아예 몸을 날려 엘비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의 코앞에서 발도술의 시동을 건 순간.

까가가각.

“여기선 아, 아무도 날 못 이겨.”

그의 발도술보다 빠른 속도로 솟구친 얼음이, 단숨에 그의 허리께를 덮고 올랐다. 순식간에 움직임이 차단된 루멘의 눈빛으로 짙은 살기가 차올랐다.

그를 앞에 둔 엘비는 무언가를 고심하듯 입술을 잘근거리더니, 이내 묘하게 상기된 표정으로 루멘을 올려 보았다.

“나, 날 건드려 봤자 시간 낭비라는 걸 몰라? 아니면 그냥…… 네 친구들을 잊은 거야? 그럼, 그럼 내가 떠올리게 해 줄게.”

얼어붙은 루멘을 남겨 둔 채 심장 근처로 달려간 엘비가 등을 보이고 쭈그려 앉았다. 그곳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챙겨 든 그가 벌떡 몸을 일으켜 다시 루멘의 앞으로 달려왔다. 돌아온 엘비의 손안에는 작은 정육면체의 기계가 들려 있었다. 그리고 그가 기계의 어딘가를 건드리자.

“……!”

허공에 네 개의 얼음판이 떠오르며, 그 위로 동료들의 모습이 화면처럼 비쳤다. 처음으로 동요를 보이는 루멘의 표정에, 엘비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에, 에밀리아 누나가 날 위해 만들어 준 거야. 이걸로 전부 지켜볼 수 있어.”

차례차례 얼음판을 훑어 내리는 루멘의 눈동자가 요동쳤다. 가까스로 유지하고 있던 냉정이 빠른 속도로 허물어지고 있었다.

“고, 곧 있으면 다 죽을 것 같은데. 나랑 이렇게 놀고 있어도 되나…? 물론 결국엔 전부 죽게 되겠지만…….”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광경이었다. 그것은 미우나 고우나 생사를 함께해 왔던, 그의 동료들이 무너지는 모습이었으니.

“미, 미리 말해 두자면… 여기서 한 명이라도 죽으면, 나, 나머지도 전부 죽어. 내가 다 소화시킬 거니까.”

루멘을 약 올리듯 크게 입을 벌린 엘비가 딱 소리 나게 이를 부딪쳤다. 그가 말한 ‘소화시킨다’의 의미가 무엇인지. 진지하게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1층.

대량의 마물 군단을 감당하고 있어야 할 반은, 몸 여기저기에 고블린을 매단 채 필사적으로 대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살을 물어뜯기고 있음에도 괴로운 기색은 없다. 그저 범람하는 오라에 잠식되어 짐승처럼 본능적인 살육을 이어 갈 뿐.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하고, 착실하게 자신의 육체를 좀먹어 갔다. 전신을 흠뻑 적신 핏물이 그의 것인지 마물의 것인지조차 구분되지 않았다.

2층.

라이돈은 추락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몸이 지면이 닿기 전, 양쪽에서 얼음 인형이 날아들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라이돈이 장막을 둘렀으나, 인형의 팔은 장막을 통째로 깨부수며 라이돈의 몸을 짓눌렀다.

허공에서 뿜어진 핏물이 투명한 인형들의 몸을 적셨다. 그제야 루멘은 2층의 홀을 채운 인형들이 모조리 붉게 물들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3층.

가르엘은 바닥에 꽂은 검에 몸을 지탱했다. 너덜거리는 단복 너머로 전신을 빼곡하게 채운 절상이 보였다. 그는 마기의 힘으로 치유를 시작했으나, 상처가 아무는 것보다 발광체의 공격이 더 빨랐다.

수리검처럼 쏟아지는 발광체는 오로지 가르엘만을 노렸다. 사정없이 그를 베어 가는 발광체의 움직임을 따라 가르엘의 육체가 크게 흔들리더니, 종국엔 버티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참혹한 광경이었다.

그리고 4층.

최상층의 문이 열린 뒤, 남은 하나의 문은 벽으로 막혔다. 카델은 그대로 4층에 남게 된 것이다. 몇 초 간격으로 함정이 쏟아지는 살벌한 공간이었으나, 그래도 카델이라면. 어떻게든 안전하게 버텨 내고 있으리라 믿었다. 그렇게 믿어야만 다음 층을 오를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대장.”

얼음판에 비친 그의 모습은 안전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미 수차례 함정을 받아 낸 듯 부서진 갑옷 아래 단복이 검붉은 피로 얼룩져 있었다.

루멘의 떨리는 시선이 장대비처럼 내리꽂히는 작살 아래서 필사적으로 장막을 강화하는 카델의 모습을 담아냈다. 그는 평소보다 마력의 운용이 버거워 보였다.

어떤 이유 때문인지를 알아내기 위해 화면에 집중하던 순간. 기어코 장막을 꿰뚫은 작살이 카델의 어깨를 노리며 낙하했다.

“가, 감상은 이제 그만해…….”

소심한 목소리와 함께 각 층의 모습을 비추던 얼음판이 모조리 자취를 감췄다. 더 이상 동료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음에도, 루멘의 시선은 허공에 굳은 듯 멈춰 있었다.

부릅뜬 눈에 실핏줄이 터지며, 꽉 다문 턱 근육이 도드라졌다.

“이제 얌전히 죽을 마음이 생겼어…? 아니면 계속 바, 발버둥 칠래?”

엘비가 즐거워 죽겠다는 듯 입꼬리를 씰룩였다. 어린 얼굴에는 맑은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 비열함이 가득했다.

“입 닥쳐.”

꽉 다물린 잇새로 험악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불안하게 흔들리던 눈빛은 어느새 냉혹하게 가라앉았으나, 그 너머에는 감당 못 할 분노가 폭탄처럼 터져 나가고 있었다.

“다, 닥치라니… 계속 건방진 소리를―”

엘비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루멘이 그의 몸을 베어 냈기 때문은 아니었다.

“입 닥치라고 했어.”

얼음을 빠져나온 손이 엘비의 머리통을 한 손으로 움켜쥐었다. 손끝이 하얗게 질릴 만큼 강한 악력에 엘비가 데룩데룩 눈을 굴렸다.

눈앞에 있는 엘비의 육체는 아무리 베어 내도 죽지 않고, 계속해서 재생될 것을 안다. 때문에 루멘은 엘비의 머리통을 부술 듯 쥐고 있던 손길을 거두며 검집에 손을 올렸다.

그의 머릿속에는 엘비가 보여 주었던 각 층의 상황들이 끝없이 되풀이되고 있었다. 반, 라이돈, 가르엘, 카델. 그들의 필사적인 전투가 그를 조급하게 만들었다. 눈으로 확인한 그 참혹한 광경은 루멘에게 확실하게 죽음을 인지시켰다.

‘시간이 없다.’

푸른 섬광이 그의 움직임을 속박하던 얼음을 깔끔하게 베어 내고. 루멘은 망설임 없이 엘비의 심장을 향해 몸을 날렸다.

성급한 발도술이 심장 위에 여러 개의 사선을 그려 넣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그가 가진 최강의 기술로도 부술 수 없던 것을 이제 와 부술 수 있을 리 없었다.

쿠르르르릉!

입힌 공격만큼의 충격파가 반사되며, 루멘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 다리에 힘을 주어 간신히 충격파를 버텨 낸 루멘의 입 안으로 울컥 핏물이 차올랐다. 그대로 핏물을 뱉어 낸 루멘이 멈추지 않고 다시금 심장으로 돌진했다.

쿠르르릉!

부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멈추지 못했다. 멈출 수가 없었다.

쿠르르릉!

몇 번을 밀려나고, 계속해 내상을 입으면서도. 루멘은 다시 일어나 달려들었다. 질리도록 발목을 붙드는 얼음을 깨부수며 심장을 난도질하고, 고통을 고스란히 돌려받았다. 빠른 속도만큼 빠르게 반복되는 충격파는 루멘의 생명을 갉아먹고 있었다.

‘시간이 없어.’

초점이 흐릿해진 시선은 고집스럽게 심장을 노려보았으나, 만신창이가 된 몸은 똑바로 서는 것조차 고역이라는 듯 비틀거렸다.

맨몸으로 충격파를 견딘 탓에 내장은 이미 곤죽이 되었다. 이 이상 부딪히는 것은 자살행위에 불과했으나, 지금의 루멘에겐 그것을 상기할 여유조차 없었다.

다시 한번 심장을 그어 낸 발도술이 반사되고.

“큽, 커헉…….”

버틸 힘마저 사라진 몸이 멀찍이 튕겨 갔다. 한참을 구르던 루멘이 가까스로 깨진 바닥 틈새에 손톱을 박아 넣었다. 부들거리며 들어 올린 얼굴은 생기 없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쿨럭, 피를 토한 그가 어떻게든 다시 몸을 일으켜 보려 했으나, 이미 한계에 다다른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앞이 흐려 심장의 윤곽만이 간신히 보였다.

저것을 베어 내야 한다. 저것을 부숴야 한다. 유일한 목적이 그를 세뇌하듯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불가능하대도 해내야 했다. 그러지 못하면, 모두가 죽는다. 과거 질리도록 겪었던 그 모든 죽음을, 자신의 손으로 되풀이하는 것이다.

다시는 그런 절망을 겪지 않기 위해 죽을 각오로 검을 휘둘러 왔다. 지금껏 자신을 스쳐 간 소중한 이들을 애도하기 위해. 다시는 소중한 누군가를 잃지 않기 위해.

그런데 어째서.

‘그 노력이 전부, 아무런 소용도 없었단 말인가……?’

여전히 자신은 아무도 지키지 못하는, 소중한 사람들을 힘없이 잃고 마는, 나약한 소년에 불과하단 말인가.

“조, 좀 더 노력해 봐. 시시하잖아….”

도저히 몸을 일으켜 세울 수 없었기에, 팔을 뻗어 기어갔다. 엘비는 넝마가 된 몸을 질질 끌며 나아가는 루멘의 모습이 우습다는 듯 쿡쿡거렸다.

‘뭘 해야 하는 거야. 내가 뭘 하면…….’

그들이 죽지 않을 수 있는 것인가.

루멘이 지나간 길을 따라 진한 핏자국이 남았다. 심장과 가까워질수록 그의 의식은 혼탁해졌다. 숨소리가 가늘어지고 있었다. 루멘은 자신이 빠른 속도로 죽어 가고 있음을 느꼈다.

‘이렇게 죽을 순 없어.’

죽고 싶지 않다, 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여기서 이렇게,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죽을 순 없었다. 그는 아직 자신 때문에 죽어 간 이들을 위한 복수도, 그들의 앞에 떳떳하게 설 수 있을 만큼 대단한 사람도 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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