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4화 (244/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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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엘은 쉽게 쓰러지지 않을 것이다. 그의 능력은 누구보다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으니까.

그러한 믿음으로 꾸역꾸역 계단을 오르던 카델은, 불쑥 튀어나온 시스템 창에 우뚝 몸을 세웠다.

“……왜 그래, 대장?”

[탑의 상층부에 도달했습니다. 지금부터 각 기사의 남은 체력이 표기됩니다.]

[반 헤르도스: 74%]

[라이돈: 69%]

[가르엘 몬자시: 20%]

반과 라이돈의 체력이 생각보다 많이 깎였다는 사실도 놀라웠으나, 더욱 충격적인 것은 가르엘의 상태였다.

그들이 가르엘과 헤어진 지 채 2분도 지나지 않았다. 비늘 갑옷이 있음에도 공격을 감당한 결과가 저것이란 말인가.

저조했던 체력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빠르게 회복되어 금방 100%를 찍었지만, 카델은 전혀 안도할 수 없었다. 심장이 요란하게 뛰어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대장. 정신 차려.”

굳어 버린 카델을 깨운 이는 루멘이었다. 자신을 향한 단단한 시선에, 그제야 멈췄던 다리가 다시금 움직였다.

루멘의 손에 잡혀 계단을 오르며, 카델은 가르엘이 했던 말을 떠올리려 애썼다.

버리는 것이 아니라, 맡기는 것이다. 그들을 걱정하느라 제대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부하들을 궁지에 몰아넣는 일이었다.

‘한 층만 더 넘기면 모두를 구할 수 있어.’

4층을 루멘에게 맡긴다면, 나머지는 자신의 몫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엘비의 심장을 파괴하리라.

카델은 조금씩 깎여 가는 부하들의 체력에서 시선을 떼어 4층의 출입문을 바라보았다.

팅. 팅. 팅.

2초 간격의 알림음이 세 번 울리면, 홀의 바닥이 빛난다. 그리고 그 빛이 사라지는 즉시.

“대장, 왼쪽!”

어떠한 규칙성도 없는 무분별한 함정이 발동된다.

카델이 왼쪽 방면을 가리는 불의 장막을 생성하자, 기다렸다는 듯 수십 개의 화살이 날아 꽂혔다. 화살이 박힌 장막을 떨쳐 내듯 해제한 카델이 밭은 숨을 골랐다.

‘심장 쫄려서 뒈지겠네…….’

모든 함정을 루멘의 기척 감지에 의지하며 가까스로 차단하고 있다. 반응이 한 박자라도 느리면 끝. 어떤 최후를 맞게 될지는 떠올리고 싶지도 않았다.

‘이래서 속도 높은 기사가 유리했던 거냐고.’

하긴. 기척을 감지한다 해도 곧바로 함정의 범위를 빠져나가지 못한다면 그대로 당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그렇게 납득하자마자, 다시금 알림음이 울렸다.

팅. 팅. 팅.

“남동쪽으로 빠져!”

빠지라고 해 놓고는 카델의 허리를 낚아챈 루멘이 거의 날 듯이 홀의 남동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러자 천장에서 뚝 떨어진 두 개의 도끼날이 홀의 바닥을 교차하며 십자 방향으로 갈라 냈다.

얼음과 쇠붙이의 소름 끼치는 마찰음을 버티지 못한 카델이 귀를 틀어막았다.

“무슨 함정이 이렇게 끊임없이 나와! 이동을 못 하겠잖아!”

함정을 피하는 것까진 좋았지만, 회피하는 동안 계속해서 출입구와 멀어지고 있었다. 예상 밖의 난관에 너무 많은 시간을 잡아먹고 있다.

미간을 구긴 카델이 시야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부하들의 체력 게이지를 일별했다.

[반 헤르도스: 62%]

[라이돈: 55%]

[가르엘 몬자시: 100%]

체력이 바닥까지 떨어졌다가 금세 100으로 돌아오는 가르엘과는 달리, 반과 라이돈의 체력은 뚝뚝 떨어지고만 있었다. 침착해지려 해도 그럴 수가 없다.

이번 퀘스트는 타임 어택이나 다름없었다. 시간 대신 동료들의 목숨이 줄어들 뿐. 실시간으로 게이지를 지켜보려니 숨통이 조여 미칠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것은, 체력 게이지를 보지 못하는 루멘 역시 마찬가지였다. 평소보다 배는 예민해진 감각과 날 선 눈빛이 그를 증명했다.

“버티다 보면 틈이 생길 줄 알았는데…….”

루멘의 시선은 맞은편에 자리한 두 개의 출구를 담아내고 있었다. 4층에 들어서자마자 가장 먼저 눈에 띈 변화. 출구가 하나뿐이었던 다른 층과는 달리, 4층의 문은 두 개였다.

둘 중 어느 문으로 들어가야 하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직접 조사하는 수밖에 없다.

“인정사정 안 봐주는군.”

바닥이 빛남과 동시에 카델을 안아 든 루멘이 홀의 중앙으로 이동했다. 카델은 루멘의 품 안에서 그들이 좀 전까지 머물렀던 외곽을 일별했다. 살벌하게 치솟은 얼음 가시들이 그들을 찌르지 못해 아쉽다는 듯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함정이 발동되는 방향이 중구난방이야. 전부 피하면서 이동하는 건 불가능해. 몇 번 정돈 장막으로 버틸 수 있으니까, 최대한 빠르게 돌파하자.”

자신의 속도로는 몇 번은커녕 몇십 번을 버텨도 도착 못 한다. 주제 파악을 마친 카델이 루멘의 목을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마찬가지로 카델을 단단하게 받쳐 안은 루멘이 전방을 향해 달려갔다.

팅. 팅. 팅.

“다치지 않게 조심해.”

루멘이 말했으나, 정작 걱정받아야 할 사람은 그였다. 카델은 사방에서 연속으로 발사되는 묵직한 얼음 포탄에 경악하며 장막의 강도를 올렸다.

그 덕에 정면충돌은 막을 수 있었으나, 충격까지 완화할 수는 없었다. 안겨 있는 카델에게까지 전해지는 둔탁한 울림은 그 충격파만으로 뼈가 부러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만큼 강렬했다.

전부 버티는 것은 무리다. 그리 판단한 루멘이 카델을 한 팔로 고쳐 안고, 남은 손을 검집 위로 올렸다. 매섭게 가라앉은 푸른 눈동자가 사위를 파고드는 포탄을 빠르게 훑어내리고.

‘얜 나랑 똑같은 인간이 맞긴 해?’

카델은 자신이 포탄이 된 것이 아닐까, 하는 터무니없는 착각에 빠졌다.

루멘의 품에 안긴 몸이 팔방으로 쏘아지며 반동에 마구잡이로 흔들렸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분간이 안 갈 만큼 눈앞의 장면이 빠르게 바뀌었다. 분명 코앞에 포탄이 떨어졌던 것 같은데, 정신을 차리고 보면 전혀 다른 방향에 도착해 있었다.

카델의 입장에서는 이것이야말로 마법 같은 일이었으나, 루멘에겐 동작 하나하나가 치밀하게 계산된 숙련된 기술이었다.

그는 포탄이 장막을 두들기기 직전에 몸을 틀어 공격을 피했고, 회피가 불가하다고 판단한 포탄은 발도술로 베어 냈다. 카델의 무게까지 감당해야 하는 탓에 평소보다 움직임이 무디기는 했으나, 최소한의 피해를 유지하는 데엔 무리가 없었다.

그렇게 순식간에 포탄 세례를 돌파한 루멘이 한계까지 올린 속도를 늦추며 미끄러지듯 출구 앞에 도착했다.

“끝났어.”

“흐, 흐어…….”

정신 나간 놀이 기구에 탑승한 것 같았다. 카델은 쿵쾅거리는 가슴께를 누르며 루멘의 품에서 내려왔다.

“다음 함정이 발동되기 전에 서둘러야…….”

카델이 벽을 짚은 채 어지러운 시야를 달래는 동안, 루멘은 두 개의 출구를 살펴보았다. 꼼꼼하게 두 문을 비교하던 루멘이 작게 인상을 찌푸렸다.

“둘 다 똑같은 숫자가 새겨져 있잖아.”

두 개의 문은 약간의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었으나, 크기나 생김새는 전부 똑같았다. 문 위에 새겨진 ‘1’이라는 숫자 역시 같았다.

“각자 한 명씩 문 앞에 서야 한다는 건가? 어디가 진짜 출구인 줄 알고…?”

한쪽이 출구라면 다른 한쪽은 어디로 이어져 있단 말인가? 만약 출구가 아닌 쪽이 함정이라면, 함정에 선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굳은 얼굴로 문을 노려보는 루멘의 옆에서, 카델 역시 진지하게 눈을 빛냈다.

‘진짜 출구는 왼쪽 문이다. 저기로 나가면 돼.’

마지막 층으로 향하는 문의 위치는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다. 저곳을 넘어가면 엘비의 심장이 나올 터.

공략대로라면 마지막 최상층은 뛰어난 딜량과 적당한 방어력을 보유한 기사를 들여보내야 했다. 웬만한 공격으로는 심장을 부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걸 생각하면 루멘이 가장 적합했으나, 카델은 그를 최상층에 보낼 마음이 없었다.

‘최상층에 들어간 기사는 아무리 강한 기술을 남발해도 거의 죽기 직전이 되어서야 심장을 파괴했어. 그것도 좋은 장비와 물약을 전부 퍼부었을 때의 얘기지.’

그랬기에 카델은 엘비와의 전투를 대비해 그가 가진 기억을 쥐어 짜내며 최선의 배치를 구상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엘비가 만들어 낸 ‘마계의 탑’은 각 층에 유리한 능력치를 보유한 기사를 선별하고, 각 기사의 스탯을 충분히 올리고서야 넉넉하게 클리어할 수 있는 스테이지였다. 육성 덜 된 기사를 데려갔다간 전부 몰살당하거나, 최상층의 한 명만 반죽음 상태로 살아남는 게 최선. 뛰어난 장비가 없다면 더더욱 무리였다.

그리고 현재 기사단의 육성 상태는 그리 만족스럽지 못하다.

‘A급 둘에 S급 둘. 나조차도 아직 성장이 덜 됐어. 여기서 루멘을 최상층에 보낸다면, 높은 확률로 죽는다.’

그렇게 둘 수는 없었다. 자신이야 여차하면 [폭혼]도 쓸 수 있고, 쿤라에게 애걸복걸해 볼 수도 있다. 그러니 루멘은 이곳에 남는 것이 옳았다. 엘비의 심장을 처리하는 것은 자신이어야 했다.

“일단 한 명씩 서 보자.”

“……문이 열리는 즉시 함정이 발동될 수도 있어.”

“여기서 고민만 해도 함정은 발동돼.”

카델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왼쪽 문 앞에 자리 잡았다. 그에 오른쪽 문으로 이동하려던 루멘이, 문득 걸음을 멈춘 채 카델을 돌아보았다.

덤덤한 시선이었으나, 카델은 그의 눈빛 속에서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짧은 침묵 끝에 먼저 입을 연 것은 루멘이었다.

“대장은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어디가 진짜 출구인지.”

“……뭐?”

“알고 있잖아.”

그의 눈빛에 담긴 것은 명백한 의심이었다. 이렇게 빠르게 속셈을 간파당할 줄은 몰랐던 카델이 뒤늦게 변명을 떠올리려던 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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