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2화 (242/521)

그것이 이번 스테이지, ‘마계의 탑’의 구조였다. 탑의 층수는 돌입한 파티의 총인원 수에 따라 조절된다. 그리고 파티는 동료를 한 층씩 남겨 둔 채 탑의 정상까지 올라야 한다.

최후의 1인이 정상에 있을 엘비의 ‘심장’을 부술 때까지, 각 층에 남은 전원이 생존해야 하는 연대 책임의 퀘스트.

그 말인즉슨, 1층에 남게 될 사람이 이곳의 누구보다 길고 고된 싸움을 버텨 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남을게요.”

카델은 반과 눈을 맞췄다. 자신을 향한 그의 시선에선 짙은 믿음과 신뢰가 담겨 있었다.

‘1층 담당에 가장 적합한 건 반이야. 게임에서도 광범위 공격이 가능한 딜탱 포지션을 넣어서 오래 버틸 수 있게끔 했으니까.’

이곳에 오기 전부터 각 층에 누구를 남겨야 할지를 고민했다. 오로지 개개인의 능력에 의지해야 하는 까다로운 스테이지. 모두의 생존을 위해 최대한 이성적으로 효율적인 배치를 구상해야 했다.

실패를 통한 자료 수집은 넘치도록 했다. 게임에서의 수많은 시행착오는 이 세계에서 부하들의 안전을 위한 토대가 될 것이다.

그러니 이 선택이 그가 내릴 수 있는 최선. 그것이 분명함에도, 막상 한 명을 남겨 둬야 하는 상황을 맞닥뜨리니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들끓었다.

“괜찮아요. 제가 남을게요, 단장. 그 마족을 죽일 때까지만 버티면 되는 거잖아요?”

반은 그런 카델의 마음을 안다는 듯 아무렇지 않은 어투로 말했다. 언제나처럼 그를 안심시키려 했다. 하지만 효과는 없었다. 되레 속에서부터 울분 같은 것이 차오르며 가슴이 갑갑해졌다.

카델은 반의 앞으로 다가가 대검을 쥔 투박한 손등을 감쌌다. 고개를 푹 숙이고, 밭은 숨을 내쉬었다.

고요의 산맥에서의 일이 있었던 뒤, 반과의 개인적인 대화를 피해 왔다. 껄끄러웠다. 그를 아끼는 자신의 마음이 ‘카델 라이토스’의 영향을 받은 거짓된 감정이라는 생각을 떨쳐 낼 수가 없었다.

반 헤르도스는 카델 라이토스의 첫 번째 동료였고, 진짜 카델 라이토스를 아는 유일한 인물이었으니.

처음부터 자신의 남자가 아니었다. 남의 것을 탐내다 호되게 혼이 난 아이처럼 그를 볼 때마다 번번이 주눅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우울일 뿐. 반은 아무런 잘못이 없었고, 모든 것을 알고 있음에도 여전히 뻔뻔스럽게 그의 충성을 받아먹는 자신의 이기심이야말로 죄였다.

그러니 적어도 반의 앞에서만큼은, 세상 그 누구보다 완벽했을 그의 단장을 연기해야지 않겠는가.

“네가 날 믿는 것 이상으로 나는 널 믿는다. 이 탑을 부수고 올 테니, 끝까지 버텨 줘.”

고개를 들어 똑바로 눈을 맞췄다. 자신을 바라보는 반의 입가엔 부드러운 미소가 맺혀 있었다.

[기사 ‘반 헤르도스’의 호감도가 1 상승했습니다.]

[현재 호감도: 91/100]

대답을 대신하는 듯 떠오르는 시스템 창에, 카델은 쓴웃음을 지으며 물러났다.

1층에 남기로 결정된 반이 홀의 중앙으로 이동하자, 기다렸다는 듯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너머에는 내부에선 보이지 않던 기다란 나선형의 계단이 위층으로 이어져 있었다.

카델은 나머지 단원들과 함께 계단을 올랐다.

다행히도 계단은 얼음이 아닌 대리석이었다. 좁은 폭의 계단 아래로는 촘촘하게 솟아난 얼음 가시들이 자리 잡고 있다. 자칫 발을 헛디뎠다간 정상에 도달하기도 전에 끝장이었다.

“동료를 남겨 둔 채로 다음 층을 올라야 하다니. 악질적인 탑이네요.”

떨떠름하게 혀를 찬 가르엘이 카델을 돌아보며 말을 덧붙였다.

“단장님 탓이 아니에요. 알고 있죠?”

“……알아.”

“모르는 표정이길래요. 예쁜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니, 보는 제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지는군요.”

터무니없는 허풍에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앞이나 제대로 보라며 가르엘을 타박한 카델이 한숨과 함께 제 뺨을 문질렀다.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자꾸만 1층에 남겨 둔 반이 걱정됐다. 고작 고블린 무리에 당할 인재가 아니다. 그걸 알고 있음에도, 함께 싸우지 못한다는 사실이 카델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어쩌면 그가 남기를 택한 것이 자신이 아닌 카델 라이토스를 위함이라는 걸 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자신은 결국 그의 희생을 이용해…….

‘제발 작작 좀 하자. 싸울 땐 그딴 생각 하지 않기로 했잖아. 정신 차려, 이 모질아.’

가볍게 문지르던 뺨을 찰싹 소리 나게 때린 카델이 입을 앙다물었다. 그와 동시에, 앞서 나가던 루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드디어 문이 나왔군.”

*

2층.

내부는 1층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단단하고 투명한 얼음 바닥과 얼음벽, 모두가 들어오자마자 사라진 입구와 맞은편 벽면에 새로 생긴 출구.

모든 것이 1층과 똑같았으나, 딱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흐응, 꽤 잘 만든 조각품이네.”

천장을 빼곡하게 채운 조각품들의 존재였다. 조각품들은 전부 똑같은 형상을 갖추고 있었는데, 풍성한 드레스를 입은 아름다운 소녀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전부 여러 가닥의 얇은 실과 이어져 허공에 매달려 있었다.

금방이라도 꼭두각시 인형극이 시작될 것 같은 생동감에 라이돈이 순수한 감탄사를 내뱉었다. 얼음 마력으로 저 정도 섬세한 조각품을 만드는 건 상당한 고난도 작업이다. 가히 예술적이었다.

“이 층에 있는 거라곤 저 소름 끼치는 얼음 인형들뿐이네요. 일단 저것들을 건드려 봐야 뭐라도 시작될 것 같은데. 저렇게 위에 있어서야, 공격이 힘들겠어요.”

천장을 향해 고개를 꺾은 가르엘이 다시금 마안을 개방했다. 일반적인 검술로는 타격이 불가능한 높이였다. 루멘 역시 그 사실을 인지한 듯 눈빛에 짜증스러운 기색이 스쳤다.

그의 검기는 반처럼 원거리로 날려 보내는 것이 아닌, 근거리에 ‘새겨 두는’ 형식이다. 피의 사막에서의 시련처럼 라이돈이 발판이라도 만들어 주지 않는 이상, 천장에 들러붙은 조각을 베어 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라이돈, 저번처럼—”

라이돈에게 발판을 부탁하려던 루멘이 일순 말을 멈추고 미간을 좁혔다. 그와 동시에.

키잉―

미동도 없이 얼어 있던 얼음 인형의 투명한 눈에서, 붉은 안광이 번졌다.

드득. 드드득.

관절이 있을 리 없는 인형의 팔다리가 경련하듯 꺾이며 돌아갔다. 몸뚱이에 연결된 실이 차의 시동을 걸듯 각 부위를 차근차근 움직이고 있었다.

힘없이 늘어진 발끝을 세우고, 구부러진 팔을 펴고, 손바닥을 아래로 쫙 펼쳤다. 그리고 다음 순간.

“이런 미친…!”

천장을 메운 인형들이 일제히 낙하하기 시작했다. 카델은 반사적으로 단원들의 위에 불의 장막을 생성했다.

쿵― 쿵—

추락한 인형의 손바닥이 차례차례 지면을 내리찍었다. 어마어마한 무게가 실린 손바닥이 바닥에 커다란 크레이터를 생성했다.

카델은 장막에 전해지는 충격에 혀를 내둘렀다. 무너진 탑이라도 지탱하고 있는 듯한 감각이었다. 평범한 얼음덩이의 무게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그렇게 카델이 인형의 낙하를 감당하는 동안, 루멘과 가르엘은 지면으로 내려온 인형들을 향해 공격을 퍼부었다. 날카로운 마기와 푸른 검기가 인형들의 몸뚱이를 사정없이 난도질했다.

하지만.

“뭐가 이렇게—”

“……이건 좀 자존심이 상하는데요.”

그들의 맹공격에도 얼음 인형은 큰 타격을 입지 않았다. 보통이라면 한 번에 파괴됐어야 할 얼음 조각은, 고작 균열이 생기거나 팔 한쪽에 틈새를 만드는 데에서 그쳤다.

상상을 초월하는 강도에 루멘과 가르엘의 표정이 굳었다. 다시금 공격을 시도하려 했으나, 인형은 기다려 주지 않았다. 이어진 실이 인형을 다시금 천장으로 끌어 올린 것이다.

그들이 상승하기 전에 루멘의 검기가 실을 잘라 냈으나, 실은 베어짐과 동시에 복구되어 멀쩡히 인형을 끌어당겼다.

천장에 거꾸로 매달린 인형이 괴이한 안광을 빛내며 빙글빙글 돌았다. 위협적으로 펼쳐진 손바닥은 언제든 지면을 깨부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여기에 또 한 명을 남겨 두고 가야 하는 건 아니겠죠.”

카델은 한순간에 쑥대밭이 된 바닥을 둘러보았다. 크레이터뿐만 아니라 아예 주먹만 한 구멍이 뚫린 곳도 있었다.

평범한 탑이었다면 구멍 아래로 1층의 모습이 비쳐야 하겠지만, 이곳은 평범한 탑이 아니었다. 너머로 보이는 것은 그저 아득하기만 한 무저갱. 떨어지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아아, 짜증 나.”

그때, 게슴츠레 눈을 뜬 라이돈이 불쾌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의 시선 역시 카델과 똑같이 바닥의 구멍을 향하고 있었다.

가볍게 하늘로 날아오른 그가 동료들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마지막엔 내가 카델이랑 단둘이 남으려고 했단 말이야. 이건 다 루멘이랑 가르엘이 무능해서야. 왜 날개도 없는 쓸모없는 몸으로 태어나서는”

“……라이돈.”

카델의 부름에 라이돈의 시선이 움직였다. 그는 부러 과장된 울상을 지어 보였다.

“자기, 사랑하는 내가 걱정돼서 발이 안 떨어지지? 나도 마찬가지야!”

활짝 팔을 벌린 그가 그대로 카델에게 내려와 포옹하고는, 코끝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은근한 장난기와 다정함이 섞인 붉은 눈동자가 카델의 굳은 표정을 담아냈다.

“끝까지 같이 가고 싶은데…… 참을게. 카델을 보지 못하면 힘들지만, 카델이 힘든 걸 보는 건 괴로워.”

“……금방 끝낼게. 조금만 버텨 줘.”

2층을 맡길 수 있는 인물은 고민의 여지도 없이 라이돈뿐이다. 적은 상공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었고, 버틸수록 발을 디딜 바닥은 사라져간다. 이 기사단에서 살아남을 확률이 가장 높은 것은, 날개가 있는 그였다.

팔을 뻗어 라이돈을 짧게 끌어안은 카델이 루멘과 가르엘을 향해 말했다.

“언제 인형이 다시 떨어질지 몰라. 빨리 이동하자.”

라이돈은 문으로 달려가는 세 남자를 지켜보며 홀의 중앙에 섰다. 카델과 루멘, 가르엘이 숫자 ‘3’이 새겨진 문 앞에 서자, 큰 진동과 함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인형들이 공격을 재개했다.

문이 완전히 열리는 것보다 인형의 낙하가 더 빠를 것 같았다. 짧게 혀를 찬 카델이 즉시 장막을 생성해 동료들의 머리를 가렸다.

그러나.

“……?”

이전에는 지면을 균등하게 내리찍던 인형들이, 이번에는 라이돈이 선 홀의 중앙을 노렸다.

“라이돈!”

빠르게 몸을 물린 라이돈이 상공으로 비행했다. 수십 개의 인형이 쏠린 바닥에는 거대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인형들의 움직임이 전보다 재빨랐다. 현란하게 움직이는 실을 따라 몸을 끌어 올린 인형들이 비행하는 라이돈을 뒤쫓기 시작했다. 놈들은 마치 유도탄처럼 온몸으로 라이돈을 향해 달려들었다.

“아하하! 카델, 빨리 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징그럽게 따라붙는 인형들을 벽 쪽으로 유인하며, 라이돈이 완전히 열린 문 너머를 가리켰다. 섣불리 떠나지 못하는 카델을 잡아끈 이는 루멘이었다.

“오래 뜸 들일수록 버티는 녀석들만 힘들어져. 가자, 대장.”

괴롭지만 맞는 말이었다. 뿌득, 이를 간 카델이 꾸역꾸역 걸음을 돌렸다.

알고 있다. 이 탑은 동료들을 희생시키고, 그들의 희생을 믿어야만 다음 층으로 넘어갈 수 있는 구조. 그게 힘들다면 한시라도 빨리 이 거지 같은 탑의 주인을 끝장내야 했다.

모두가 넘어온 2층의 출구가 닫히자, 요란하던 소음이 거짓말처럼 뚝 끊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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