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1화 (241/521)

분명 외관은 탑이었다. 하지만 건물의 내부에는 위층과 이어지는 계단이 보이지 않았다. 맞은편 벽면에 새로운 문이 생겨났을 뿐.

새로 생겨난 유일무이한 통로. 명확한 목적지에 고민은 필요치 않았다. 기사단은 천천히 홀을 가로지르며 문을 향해 나아갔다.

“밖이나 안이나 추운 건 매한가지군.”

루멘의 말대로 실내라고 바깥보다 따뜻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황량한 풍경에 긴장감까지 더해지니 오한이 들 지경이었다.

미끄러운 바닥을 힘주어 박차고, 작은 바람 소리에도 촉각을 곤두세웠다. 사위를 경계하며 나아갔지만 별다른 장치도, 적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무난하게 문 앞에 도달할 수 있으리란 기대는 누구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그들이 홀의 중앙에 다다른 순간.

쿵쿵쿵. 쿵쿵쿵.

거대한 망치가 탑을 두드리는 듯한 소음이 울려 퍼졌다. 즉시 무기를 꺼내 든 일행이 전투태세에 돌입하고.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규칙적인 울림이 반복됐다.

그리고 잠시 뒤. 엘비의 목소리가 홀 전체를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되, 되도록 여기서 다 죽어 버렸으면… 좋겠어…….]

그와 동시에, 정갈하게 다듬어진 얼음 벽면이 쩍쩍 갈라지기 시작했다. 네모반듯하게 쪼개진 벽이 차례차례 엎어지고. 드러난 구멍 속에는, 바깥의 설원이 아닌 소음의 주인공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으음, 바스킨 마을에서의 전투가 떠오르네요. 그때 제대로 싸우지 않았던 걸 여기서 돌려받는 걸까요?”

어림잡아도 수백 마리가 넘는 마물 군단. 살가죽이 푸르댕댕하게 질린 고블린 군단의 몸에는 갑옷의 형상을 한 얼음이 달라붙어 있었다.

병렬로 늘어선 고블린 군단은 걸음마다 손에 든 장창을 내리찍으며 진군했다. 고블린 자체만 놓고 본다면 처치가 쉬운 무난한 적이었으나, 이 정도의 물량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카델이 펜던트 위로 마력을 불어넣자 기사단의 위로도 비늘 갑옷이 둘러졌다.

“너희는 문 쪽으로 길을 뚫어. 라이돈, 넌 나랑 광범위 공격을 준비한다.”

“과감하잖아, 자기! 몸과 마음에 이어서 이젠 마력까지 맞대는 사이가 되는 거야?”

“……자꾸 왜곡하지 마.”

홀이 아무리 넓어도 결국엔 사방이 막힌 고립된 공간이다. 적을 정리해 두지 않으면 무수한 장창에 꿰뚫린 꼬챙이 신세를 면치 못하리라. 여기선 마법사들이 보조해 주어야 할 차례였다.

카델은 라이돈과 함께 홀의 정중앙을 차지한 채 보폭을 넓혀 오는 마물들을 주시했다. 빠르게 머릿속의 작전을 전달한 카델이 라이돈을 일별했다.

“절대 실수하면 안 돼. 방금 내가 말한 대로 할 수 있겠어?”

“카델이 원한다면야.”

“좋아. 그럼 준비하자고.”

이 마물 군단을 단번에 쓸어버릴 파괴력을 포함하되, 한 공간에 있는 아군에겐 피해가 끼쳐선 안 된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완벽한 협공.

카델은 영창을 시작하는 라이돈의 옆에서 서서히 마력을 끌어 올렸다.

*

마법사들의 공격이 준비되는 동안, 검사들은 유일한 출구를 확보할 길을 뚫어야 했다.

“이런, 생각보다 갑옷이 단단한데요?”

얼음을 깨부수고 고블린의 속살을 베어 내는 것까진 가능했으나, 그 행위에 들어가는 힘이 과했다. 원래라면 고블린 따윈 장난으로 휘두른 검에도 가볍게 죽어 나가야 하는 종족이건만.

쓰러진 고블린의 시체에서 검을 뽑아내는 가르엘의 옆으로 루멘이 착지했다. 조금 전까지 그가 있던 전방에는 고블린 무리를 가로지르는 푸른 섬광이 새겨져 있었다.

“빛 마력을 안 쓰니 갑옷 깨는 게 힘든 거겠죠. 그렇게 무식하게 내리치면 검만 부러질 겁니다.”

“하하, 걱정해 주는 겁니까, 루멘 경? 다정하네요. 동료애가 샘솟는 것 같아요.”

“전 방금 사그라졌습니다.”

가르엘의 시답잖은 말을 짜증스레 받아친 루멘의 신형이 다시금 마물의 틈으로 사라지고. 가볍게 웃은 가르엘은 왼쪽 눈을 가리고 있던 안대를 끌어 내렸다.

“힘의 노선을 바꾸기로 했더니, 쓰던 힘에는 손이 잘 안 가네요.”

마안을 개방하자 불꽃처럼 피어오른 마기가 그의 왼쪽 반신을 뒤덮었다. 오른손으로 쥐고 있던 검을 왼손으로 옮기니, 마기는 그의 검날까지 번져 올랐다.

“흠. 연습이 필요하겠네.”

검을 한 바퀴 돌려 잡은 그가 검 끝으로 전방의 적들을 가리켰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의 몸을 태우던 마기가 채찍처럼 쏘아졌다.

딱딱하게 경직된 기운이 고블린을 통째로 꿰뚫고는, 그대로 들어 올렸다. 마기의 궤적을 따라 고블린이 줄줄이 관통당하고. 수십 마리의 고블린을 매단 마기의 줄기가 바닥을 마구잡이로 내리치며 적들을 섬멸하기 시작했다.

효과가 확실한 기술이었으나, 조절은 미숙했다. 그것은 한 뼘 차이로 마기를 피한 반의 살벌한 욕설이 증명해 주었다.

“빌어먹을 마기 관리 제대로 하십쇼!”

“미안합니다, 반 경! 제가 아직 초보라서요!”

멋쩍은 가르엘의 웃음소리를 들은 반이 미간을 찌푸렸다.

“저것도 마기는 마기란 건가.”

가르엘이 힘을 개방하자마자 오라가 반응하는 것이 느껴졌다. 진짜배기 마족을 상대할 때보다는 덜했으나, 오라의 통제가 까다로워지고 있었다.

문득, 가르엘이라면 자신의 고질적인 문제 해결에 도움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도해 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짧게 생각을 정리한 반이 고블린 군단을 향해 몸을 날렸다. 사방에서 날아드는 창날을 피해 허리를 숙이고, 지면과 가깝게 내린 대검을 크게 휘둘렀다. 동시에 발사된 검기가 갑옷이 보호하지 못한 놈들의 발목을 베어 내며 매섭게 질주했다.

중심을 잃고 쓰러진 고블린들은 난동에 가까운 가르엘의 마기에 짓눌려 터져 나간다. 세 남자의 공격은 언뜻 따로 노는 듯하면서도 착실히 합을 맞추고 있었다.

그렇게 무수한 적들을 도륙한 끝에, 그들은 출구에 도착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대체 마물이 얼마나 많이 숨어 있는 거야?”

벽에 난 구멍에선 마물의 행군이 끊이질 않았다. 그 어마어마한 물량에 겨우 뚫어 낸 길이 비좁아지며 카델과 라이돈의 모습이 가려져 갔다.

이대로면 길을 낸 의미도 없이 두 팀으로 나뉘어 포위당할 터. 좋지 못한 예감에 루멘이 검집 위로 손을 올렸다.

“다시 돌아가서 대장을 데려와야 해.”

“위험하면 라이돈 경이 알아서 빼 오지 않을까요? 날개 달린 요정이니까요.”

맞는 말이었으나, 라이돈에게 카델의 안전을 맡기는 건 영 믿음이 안 갔다. 그건 반 역시 마찬가지인지, 그의 몸은 정직하게 출구와 멀어지고 있었다. 가르엘은 두 남자의 조급한 태도에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속상하겠네요, 단장님은. 실력이 그렇게 뛰어난대도 자기 단원들이 이렇게나 전전긍긍하다니. 리더에 대한 믿음이 없는 것 같잖아요?”

“……누가 누굴 못 믿는다는 겁니까.”

“글쎄요? 반 경이, 우리 단장님을?”

그 순진무구한 말투에 반이 살벌하게 눈을 부라렸으나, 가르엘은 되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새로운 명령이 떨어지기 전까진 단장의 지시에 충실해야지 않을까요? 함부로 움직였다가 계획에 차질이 생길 수도 있고. 결정적으로 단장님은 누군가 애타게 걱정해야 할 만큼 약한 사람이 아니니까요.”

순순히 인정하긴 싫었지만, 틀린 말은 없었다. 그들은 그동안 카델이 무리하는 모습을 수도 없이 봐 왔기에 이번에도 자연스레 걱정부터 드는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알고 있듯이, 카델은 이만한 위기에 고전할 인물이 아니었다. 걱정하기엔 이르다.

결국 반과 루멘은 가르엘의 의견을 받아들여 대기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두 마법사가 협공의 준비를 마쳤다.

“저건……?”

무식하게 몰려드는 고블린 군단의 사이로, 익숙한 불꽃이 살랑거렸다. 무엇도 태우지 않고, 아름답게 허공을 부유한다. 나비의 형상을 한 자그마한 불꽃.

화접몽.

루멘은 이미 한번 저것을 본 기억이 있었다.

“흠? 주인 닮아 예쁜 마법이네요.”

“함부로 건들지 마시죠.”

빠르게 가르엘의 호기심을 차단한 루멘이 출구에 등을 붙인 채 두 남자를 불렀다.

“연쇄 폭발 마법입니다. 하나만 건드려도 쑥대밭이 될 거예요.”

“군단 소탕에 딱 적당한 광역기군.”

“우리까지 소탕당하기 좋다는 게 문제지.”

카델은 왜 하고많은 마법 중에 이런 위험한 기술을 고른 것일까. 한번 시작된 폭발은 홀 전체를 무너뜨릴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카델은 동료의 안전이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전투를 강행하는 인물이 아니다. 그답지 않은 과격한 전술에 의문을 느끼는 동안, 가르엘이 그들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뭣하면 제가 지켜 드리죠. 어차피 불타도 다시 재생되는 몸이니.”

이미 과거 카델의 [폭혼]을 그런 식으로 견딘 전적이 있었다. 기절했던 반과 루멘은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그렇게 가르엘이 장검을 바닥에 꽂아 넣고 마기를 증폭시키던 순간. 기사단을 조여 오던 고블린 무리가, 기어코 한 마리의 나비를 건드렸다.

그 나비의 주변에 포진한 것은 수십 마리의 또 다른 나비. 루멘과 반은 이어질 폭음을 예상하며 반사적으로 귀를 막았다.

하지만.

“……대단한데요.”

이어진 것은 우렁찬 폭음이 아닌, 순식간에 폭발을 집어삼킨 냉기. 한 마리의 나비에서부터 시작된 폭발은 미친 듯한 속도로 번져 나갔으나, 강대한 냉기가 그 뒤를 따르며 모든 것을 얼어붙였다.

폭발하는 불꽃을 품은 얼음이 솟구친 파도처럼 화려하게 홀을 채워 나갔다. 거기에 더해 라이돈의 냉기는 불꽃의 진로를 뒤틀어 폭발을 벽면으로 유도하며 출입구를 보호하고 있었다.

화접몽에 휩쓸려 폭죽처럼 터져 나간 고블린 시체가 공중에 얼어붙은 채 사위를 메웠다. 그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완벽한 마법에 모두가 감탄하고 있을 무렵.

세 남자가 미리 뚫어 놓은 길을 따라 카델과 라이돈이 등장했다.

“얼마 못 버틸 거야. 빨리 나가야 해.”

카델이 다급한 얼굴로 문 앞에 섰다. 이 층의 유일한 출입문의 위에는, 처음 탑에 입성했을 때처럼 숫자가 적혀 있었다.

달라진 것은 숫자의 크기. 이번엔 5가 아닌 4였다.

그를 확인한 카델이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공략은 내가 아는 그대로야.’

달라진 것이 없다. 그렇다는 건 미리 세워 두었던 계획을 차질 없이 진행할 수 있다는 의미였으나. 카델은 전혀 기뻐 보이지 않았다.

짜증스레 문을 내리친 그가 부하들을 돌아보았다. 조급함과 불쾌함, 괴로움이 섞인 복합적인 시선이 그들을 천천히 훑어내리고, 마침내 한 곳에 고정되었다.

“다음 층으로 넘어갈 수 있는 정원은 네 명이야. 다른 한 명은…… 이곳에 남아서 전투를 이어 가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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