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7화 (237/521)

“좋아, 카델. 하고 싶은 얘기가 있댔지? 해 봐.”

“……여기서?”

요젠의 몸이 시야를 가리고 있기에 백작의 시체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시체가 있는 방에서 입단 문제를 논의하고 것 역시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카델이 꺼리는 것을 알아챘는지, 요젠이 다른 대책을 꺼냈다.

“나가서 하고 싶다면 그렇게 해. 저택 뒤뜰과 이어지는 작은 숲이 있어. 거기서 보자.”

“가, 같이 안 가고?”

“남의 기척을 없애는 법은 죽이는 것밖에 몰라. 원한다면 해 줄 순 있지만, 그럼 얘기를 못 나누잖아?”

“…….”

“먼저 갈게.”

그리 말한 요젠은 갑작스레 모습을 감췄다. 눈앞에서 증발이라도 한 듯, 아무런 전조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그가 남긴 것이라곤 철제문이 움직이며 내는 낡은 쇳소리뿐이었다.

카델은 열린 문의 틈새를 멍하니 바라보다, 벽을 타고 스르륵 주저앉았다. 맥 풀린 시야 너머로 몸과 머리가 깔끔하게 동강 난 백작의 시체가 비쳤다. 자신이 죽인 것은 아니었으나, 책임이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아무리 짐승보다 못한 인간 말종이었대도, 살인은 살인이니까. 찝찝한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쿤라.”

중얼거리듯 이름을 부르자 곧 대답이 돌아왔다.

[깨나 충격받은 모양이로군. 미리 말해 두지만, 이 몸이라고 죽은 사람을 살려 내지는 못해.]

“그딴 건 바라지도 않아요.”

[미묘한 어감인데.]

“그냥, 하나만 약속해 줘요. 내가 그 암살자 손에 죽지 않게 지켜 주겠다고.”

인간의 살의에 떨어 보기는 처음이었다. 요젠의 살기는 카델이 지금껏 느껴 왔던 그 어떤 존재의 기운보다도 어두웠고, 깊었다. 게다가 그는 언제 어디서든, 원하는 자를 가뿐하게 죽일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내였다.

카델 역시 스스로를 보호할 만한 힘이라면 충분히 갖추고 있었으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할 것 같다는 불안감이 피어났다.

[……이 몸을 무시하는 건지, 나눠 준 힘을 얕보는 건지.]

말투만으로 쿤라의 어이없음이 느껴졌다. 카델이 묵묵히 대답을 기다리자, 쿤라는 짜증 섞인 약속을 내놓았다.

[지켜 주마.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게 해 주지.]

“탈골이나 골절도 안 돼요. 내상도 포함시켜요.”

[상상을 초월하는 반쪽이로구나.]

“빨리요.”

[무사히 오늘 밤을 넘길 수 있을 테니, 그만 귀찮게 굴 거라.]

카델은 그제야 얕은 한숨을 쉬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여기저기 꺾이고 괴롭힘당한 전신이 욱신거렸다.

“가르엘이랑 같이 올걸.”

어떤 상처도 회복하는 녀석이니 요젠을 상대하기엔 안성맞춤일 것이었다. 후보가 딱 다섯 가문으로 나뉘지만 않았어도 데려왔을 텐데. 아쉬움에 혀를 찬 그가 축 늘어진 오른팔을 붙든 채 열린 문밖을 넘었다.

‘백작이 죽었으니 여기서 붙잡히면 조사를 받게 될 거야. 그럼 내가 카를로가 아닌 카델이란 것도 밝혀지겠지.’

정체를 숨기기 위해서라도 몰래 저택을 빠져나가야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자신은 기척을 숨기는 데에 재능이 없었고, 루멘처럼 재빠르게 움직이거나 라이돈처럼 몸집을 줄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남은 것은 유일무이한 재능인 마법뿐.

‘이참에 새로운 속성이나 실험해 볼까.’

힘겹게 빠져나온 지상은 여전히 소란스러웠다. 요젠을 찾지 못한 기사와 병사들이 저택 곳곳을 들쑤셨고, 그런 와중에 그의 덫에 걸린 부상자들이 속출했다.

‘어디에 끼어들어도 눈에 띄겠군.’

병사들 틈에 섞이는 건 어려웠다. 하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저택 내부를 돌아다니거나, 앞뜰에 모여 다른 기사들의 보호를 받고 있었다. 어디에도 뒤뜰로 움직이는 사람은 없으니, 혼자 이동한다면 분명히 의심을 산다.

결론을 내린 카델이 중앙 홀의 벽면에 붙어 섰다. 벽에 닿은 손안으로는, 그가 가르엘을 위해 새롭게 터득한 ‘암흑 마력’이 일렁이고 있었다.

구부린 손 틈새로 빠져나온 암흑 마력은 검은 불꽃 같기도, 뭉친 연기 같기도 했다.

날카로운 눈빛이 홀 내부를 채운 인원을 훑어내렸다. 무리 지은 병사 열넷, 짐을 챙겨 이동하는 하인 일곱. 하인들은 전부 빠른 걸음으로 앞뜰을 향하고 있다.

‘하인들을 건드릴 필욘 없겠지.’

그렇다면 중앙 홀에서 입구를 감시하는 병사를 처리해야 한다. 목표를 정한 카델이 구부리고 있던 손을 그대로 주먹 쥐었다. 손아귀를 가득 채우고 있던 마력이 여러 갈래로 퍼져 나가며, 마치 주인의 명령을 받드는 영혼처럼 음산하게 공중을 가로질렀다.

그리고 다음 순간, 고요하게 전진하던 암흑 덩어리가 순식간에 병사들의 눈을 뒤덮었다.

“뭐, 뭐야? 정전인가?”

“불을 켜라! 앞이 안 보이잖아!”

암흑 마력이 병사들의 시야를 차단했다. 카델은 당황하며 허공을 휘젓는 그들을 뒤로한 채 서둘러 뒷문을 향했다. 갑작스러운 병사들의 이상 행동에 홀 안을 기웃거리는 하인들을 피해 비스듬히 고개를 숙이고, 걸음을 재촉했다.

그렇게 빠져나온 뒷문 너머에는 근방을 수색 중인 기사들이 포진해 있었다. 인원은 적었으나 그들을 전부 피해 도망가기도 만만치 않아 보였다.

‘어쩔 수 없군.’

수풀과 건물의 그림자 속에 몸을 숙인 카델이 저린 목을 가다듬으며 우렁차게 외쳤다.

“중앙 홀의 병사들이 습격당했다!”

최대한 소란은 피하고 싶었으나, 잠입에 소질이 없으니 별수 없었다. 숨까지 참은 채 수풀 깊숙이 몸을 묻자, 기사들이 저택으로 달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카델은 후원을 수색하던 기사들이 전부 들어간 것을 확인하곤, 뒷문을 가로막는 암흑 장벽을 세워 두었다.

“서둘러야겠어.”

오랫동안 발을 묶을 순 없을 것이다. 카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뒤뜰을 가로질렀다.

열심히 달려 나간 끝에는, 요젠의 말대로 숲과 이어지는 좁은 길이 나 있었다. 하필 담장으로 가로막힌 곳이었기에, 카델은 잘 움직여지지도 않는 몸으로 담을 타고 올라 그대로 바닥에 곤두박질쳤다.

“아윽…!”

탈골된 오른팔을 피해 떨어졌더니 이번엔 왼팔이 부러진 느낌이었다. 카델은 제 절망스러운 육체 능력을 저주하며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어딨는 거지.’

고통에 오만상을 찌푸린 채로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요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모습을 숨기는 게 특기인 녀석이니 그럴 만도 했지만,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설마 그냥 가 버렸나?’

최대한 빨리 온다고 온 것인데. 요젠에겐 성에 차지 않았을 수도 있다. 카델은 엉망이 된 몸을 질질 끌며 고요한 숲속을 살폈다.

그렇게 몇 분이 흘렀을까. 소득 없는 걸음에 지친 카델이 요젠의 이름을 외쳐 볼까 고민하던 무렵.

“어디까지 가는 거야?”

별안간 그의 등 뒤에서 요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귓가에 속삭이는 나긋한 목소리에 카델이 경기하듯 몸을 떨었다.

“와악! 뭐, 뭐야!”

“왜 그렇게 놀라?”

왜 그렇게 놀라냐니. 정말 몰라서 묻는 걸까. 카델은 벌렁거리는 가슴께를 지그시 누르며 요젠을 돌아보았다.

“계속 뒤에 있었는데. 몰랐어?”

“……계속 있었다고?”

“응. 중앙 홀에서부터 따라왔어. 재밌는… 마력을 쓰던데. 바람이 전부가 아닌가 봐.”

카델은 눈을 가린 붕대 대신 요젠의 올라간 입꼬리에 시선을 두며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속성 마법사거든.”

“그럼 네가 적린 기사단의 단장이 맞겠구나.”

낮은 탄성을 터뜨린 요젠이 고개를 숙여 카델과의 거리를 좁혔다. 얼굴을 코앞에 두고 있음에도 여전히 요젠에게선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날 알아?”

“천재 마법사가 이끄는 제국의 새로운 기사단이라고 들었어. 단장의 이름은 카델이고, 출신은 불명. ……난 알게 됐지만.”

“되도록 비밀로 해 줬으면 좋겠는데.”

“그럴게.”

예상외로 순순히 카델의 비밀을 받아들인 요젠이 조금 더 고개를 내렸다. 그러고는 마치 냄새를 맡듯 카델의 목덜미 부근에 머물렀다. 카델은 그가 자신의 피부에 닿기 전에 물러서고 싶었으나, 요젠의 심기를 거스르기 싫어 다리에 힘을 주었다.

“그래서, 할 말이란 건 뭐야?”

목덜미로 뜨거운 숨결이 닿아 왔다. 간지러웠지만 몸을 비트는 행동조차 할 수 없었다. 꼭 맹수 앞의 사냥감이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언제고 이런 피식자의 기분에 사로잡혀선 안 된다.

눈을 굴려 요젠을 바라보자, 시선을 느낀 그가 천천히 허리를 세웠다.

“그 천재 마법사가 이끄는 제국의 새로운 기사단에, 네가 들어와 줬으면 좋겠어.”

카델의 제안이 상상 이상이었던 듯, 내내 미소를 머금고 있던 요젠의 입가가 움찔 떨렸다.

“……내가 누군지 알고 있잖아?”

“그래. 이번에 확실하게 알게 됐지.”

“그런데도 원해?”

“원해. 다만, 난 네가 사람이 아닌 마족을 죽이는 걸 원하지. 그 부분은 확실하게 짚고 가자고.”

게임 속에서 암살자 포지션의 기사가 존재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인간의 편에서 마족을 죽였기 때문이다. 카델의 적은 인간이 아닌 마족이다.

그러니 요젠의 살의가 향하는 방향. 그것을 비틀지 못한다면, 카델은 그를 기사단에 들일 수 없었다.

그것은 백작의 죽음을 본 뒤 굳어진 결심이었고, 양보할 수 없는 마지노선이었다.

카델의 단호한 어투에, 잠시 침묵을 지키던 요젠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

“방금 죽이고 온 돼지 새끼도 사람으로 쳐주는 걸까? 꽤 너그러운걸. 나는…… 너그러운 인간을 좋아하지 않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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