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5화 (235/521)

자신의 안에 있는 빌어먹을 카델 라이토스의 자아가 기어코 일을 치른 것일까? 카델은 자신이 왜 백작을 살렸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왜 그 순간을 참고 넘기지 못했을까. 기억나는 것이라곤 요젠의 단검이 백작의 목을 꿰뚫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는 거부감이 일었단 것뿐이었다.

“영면의 사자를 찾아라! 백작님을 보호해야 한다!”

복도를 내달리는 백작의 호위 기사들이 보였다. 카델과 정면으로 마주친 그들 중 하나가 카델의 팔을 끌어당기며 급히 말했다.

“백작님은 저택의 지하에 계신다. 쫓아가서 장막을 둘러 드려.”

하필 탈골된 팔을 잡아당긴 탓에, 카델은 비명을 참기 위해 입술이 하얗게 질리도록 깨물어야 했다. 그가 힘겹게 고개를 끄덕이자 기사는 주위를 살피며 경계 어린 눈을 빛냈다.

“영면의 사자가 어디로 갔는지는 보지 못했나?”

“예. 백작님을 방 밖으로 대피시키고 나니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젠장…. 그놈 얼굴은 봤어?”

“아뇨.”

거짓말은 아니었다. 카델은 요젠의 얼굴은 보지 못했다. 어차피 붕대로 눈을 가리고 있어 정면을 보았대도 정확한 인상은 알 수 없었을 테다.

카델에게서 얻을 정보가 없다는 걸 깨달은 기사가 그제야 그의 팔을 놓아 주었다. 카델은 불에 덴 것처럼 화끈거리는 팔을 조심스레 움켜쥐며 고개를 돌렸다.

‘요젠이라면 금방 백작을 찾아내겠지. 빨리 지하로 내려가는 게 좋겠어.’

요젠보다 한발 먼저 도착해야 했다. 그리 판단한 카델이 반대쪽으로 이동하려던 순간.

[반쪽이. 위다.]

쿤라의 음성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치켜든 카델의 시야 속으로, 검게 물든 천장이 들어찼다. 카델과 기사들이 있는 위치의 천장이 기름이 고인 것처럼 질척하게 물들어 있었다. 더 볼 것도 없는 암기였다.

소리 없이 꾸물거리던 암기는 순식간에 단단한 가시가 되어 여러 갈래로 뻗쳐 내렸다.

“숙이세요!”

카델은 반사적으로 천장을 가리는 불의 장막을 생성했다. 갑작스러운 장막의 등장에 대부분의 기사가 몸을 숙이거나 검을 들어 반격 태세를 취했으나.

“……!”

겁을 먹고 장막 바깥으로 도망간 몇몇 기사들은, 그대로 화살처럼 쏟아지는 암기에 꿰뚫렸다. 암기는 기사의 머리와 가랑이를 깔끔하게 관통한 뒤 소리 없이 바닥으로 스며들었다.

눈 깜짝할 사이 절명한 시체들이 툭툭 쓰러져 갔다. 카델은 그 허망한 죽음과 더불어 장막을 두드리는 말도 안 되는 힘의 크기에 경악했다.

‘꼭 그놈 같잖아.’

셀레브의 주먹이 장막을 난타했을 때와 비슷한 충격이었다. 셀레브의 공격이 장막 전체를 울리는 충격파를 동반했다면, 요젠의 암기는 닿은 부분의 범위만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이, 이게 대체…….”

순식간에 눈앞에서 동료를 잃은 기사들이 당황한 소리를 냈다. 암기는 일정 시간 공격을 퍼부은 후 자취를 감췄으나, 카델은 쉽사리 장막을 거둘 수 없었다.

“쿤라. 녀석이 아직 근처에 있습니까?”

조용히 속삭이자 잠깐의 침묵 뒤에 대답이 들려왔다.

[……네게 나눠 준 힘만으론 기척을 감지하기가 힘들군. 가까이에는 없다.]

아무리 일부라지만 이 세계의 최강자라 할 수 있는 적룡의 힘이었다. 그런데도 확실한 위치를 파악하기 힘들 만큼 완벽하게 기척을 숨기고 있다니.

요젠이 근처에 없다는 확답을 받고서야 장막을 거둔 카델은 혼란에 빠진 기사들을 내버려 둔 채 서둘러 지하를 향했다.

‘이건 시간 끌기에 불과해. 단순 교란용 공격일 뿐이다. ……이미 도착했을지도 모르겠는데.’

혼비백산하며 도망치는 하인들에게 위치를 물어물어 도착한 지하의 입구는 좁은 돌계단과 이어져 있었다. 카델은 불덩이를 띄워 어두컴컴한 계단을 비췄다.

급한 발소리가 좁은 공간에 울림을 만들었다. 발소리는 카델의 것뿐이었으나, 그럼에도 안심할 수 없어 몇 번이고 뒤를 돌아봤다.

그렇게 도착한 계단의 끝에는 두꺼운 철제문이 자리하고 있었다.

“백작님. 안에 계십니까? 접니다, 카를로.”

문을 두드리며 조급하게 서성거리자, 얼마 안 가 문 상단에 난 작은 구멍이 열렸다. 그 틈으로 겁에 질린 백작의 눈동자가 드러났다.

“……자, 자네였군.”

“안쪽에 기사들이 있습니까?”

“없네. 전부 바깥에서 영면의 사자를 쫓고 있어.”

총기 잃은 눈빛이 불안하게 카델의 뒤쪽을 살피는가 싶더니, 곧 철제문이 음산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어서 들어오게.”

카델은 좁게 열린 문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카델이 들어오자 백작은 서둘러 문을 걸어 잠갔다.

‘아직 혼자 있는 건가.’

카델은 백작이 숨어 있던 지하실의 내부를 훑어보았다. 천장에는 흐릿한 조명이 켜져 있었고, 벽면에는 몇 개의 횃불이 달려 있으나 불은 붙이지 않은 상태였다.

위급 시를 위한 대피소이리라 예상했는데, 제법 가구들이 많았다. 널찍한 침대도 있었고, 식탁이라기엔 과하게 기다란 테이블과 호신용인 듯한 무기들도 존재했다. 백작은 불도 피우지 않은 벽난로 앞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앓는 소리를 냈다.

“자네 덕분에 살았어. 젠장, 밖에 있는 놈들은 대체 뭘 하고 있었길래 영면의 사자가 내 방에 들어올 때까지 놔뒀냔 말이야! 자네가 없었으면 나는 영영 눈을 뜰 수 없을 뻔했다고.”

높은 확률로 그랬을 것이다. 만약 자신과 구면이 아니었다면, 요젠은 그 방에 있던 모두를 아주 손쉽게 살해했겠지.

‘상상 이상으로 위험한 놈이었어.’

카델은 벽면을 돌며 횃불에 하나씩 불을 붙였다.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요젠에게만 유리해지기 때문이었다.

‘뭔가의 대비를 해 둬야 할 텐데…….’

그는 아직 지하실에 들어오지 못했고, 이곳의 유일한 입구는 철제문뿐이다. 아무리 요젠이라도 문이 열릴 때 나는 쇳소리까지 없앨 순 없을 테다. 좋게 본다면 요젠을 쉽게 경계할 수 있게 된 거지만, 실상은 출입구가 하나뿐인 고립된 공간에 갇혀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기사 영입하려다 비명횡사할 생각은 없어.’

그런 끔찍한 위협은 라이돈 영입 때로 충분하다. 카델은 최소한의 충돌로 요젠을 설득하길 바랐고, 그러지 못한다면 그의 영입을 포기할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포기한 뒤의 목표는 무엇인가. 자신의 생존? 아니면, 케인슈타인 백작의 보호?

마지막 횃불에 불을 붙인 카델이 작게 숨을 골랐다.

‘카델 라이토스의 의지까지 갈 필요도 없어. 눈앞에서 사람이 죽는 걸 두고 보는 쪽이 더 이상하잖아.’

괜히 카델 라이토스의 존재를 의식하느라 되레 답지 않은 선택지를 고를 뻔했다. 카델은 뒤숭숭하게 엉켜 있던 생각을 정리했다.

‘쿤라의 약속대로라면 스토리의 엔딩을 보기 전까진 온전한 내 의지를 느낄 수 있게 돼. 그거면 된 거다. 계속 결론도 못 내는 문제에만 매달린다면, 앞으로 남은 수많은 전투에서 살아남을 수 없어.’

적어도 이런 위급 상황에서까지 이딴 허약한 걱정에 방해받아서는 안 된다. 결단을 내린 카델이 백작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러나 그 순간.

“커헉…!”

갑작스레 뻗쳐 온 커다란 손이 카델의 목을 우악스레 움켜쥐었다. 거센 완력에 떠밀린 몸이 벽면에 부딪히고. 크게 벌어진 눈이 자신의 앞에 자리한 남자의 얼굴을 담아냈다.

“큭… 요, 요젠…!”

요젠 바르딕타였다. 흰 붕대에 가려진 눈은 보이지 않았으나, 뾰족한 입꼬리를 가진 그의 입술은 이어지는 말과는 달리 옅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실망이네. 믿었는데.”

어느 틈에 들어온 거지? 문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문은 여전히 닫힌 상태였고.

‘설마 처음부터……,’

처음부터 백작과 함께 지하실에 있었다는 가정밖엔 할 수 없었다. 그 말은 곧 요젠이 등장한 이유가 백작이 아닌 자신에게 있다는 소리.

카델은 급히 눈을 굴려 백작이 있던 소파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곳에는, 입이 틀어막힌 채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필사적인 비명을 지르는 백작과, 그를 포박하고 있는 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요젠과 똑같은 생김새를 가졌으나, 몸을 이루고 있는 것은 온통 암기였다. 액체처럼 진득한 요젠의 암기가 그와 똑같은 분신을 만들어 낸 것이다.

“남을 속이는 건 좋지 않아. 그건 대가를 치러야 하는 일이거든.”

“이거, 놔…!”

탈골되지 않은 왼팔을 들어 요젠을 공격하려 했지만 그대로 붙들렸다. 요젠은 망설임 없이 카델의 손목을 꺾으며 몸을 밀착시켰다.

“네 심장 소리는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았는데. 넌 왜 백작을 살렸지? 그건 모순이잖아.”

사정없이 숨통을 조이는 손길에 점점 눈앞이 하얘졌다. 카델은 서서히 몸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이 정도로 가까운 거리라면 마법을 썼을 때 나까지 타격을 받아.’

하지만 당장 요젠을 떼어 내지 않는다면 이대로 질식하게 될 것이었다. 빠르게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카델은 요젠을 설득할 몇 마디 대신 다른 이의 이름을 외쳤다.

“쿤, 라…!”

“……쿤라?”

지금 이곳에서 카델을 도울 수 있는 것은 쿤라의 힘뿐이다. 간신히 쥐어짠 외침과 함께, 목걸이의 펜던트가 작게 발광했다.

곧이어 해제됐던 비늘 갑옷이 카델의 상체를 뒤덮기 시작했다. 본래 모습과 달리 카델의 몸에 달라붙듯이 생성된 비늘은 그의 목을 조르는 요젠의 손아래까지 파고들었다.

생경한 감각을 느낀 요젠의 미간에 얇은 주름이 졌다.

“이건…….”

그리고 그가 주춤하며 손아귀에 힘을 푼 순간. 납작하게 누워 있던 비늘이 일제히 몸을 세우고, 수십 개의 칼날이 되어 정면으로 쇄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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