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가르엘 몬자시’의 호감도가 4 상승했습니다.]
[현재 호감도: 72/100]
카델이 떠오르는 시스템 창을 응시하며 피식 웃자, 가르엘도 따라 웃으며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그의 입가를 닦아 주었다. 멍하니 그 손길을 받아 내다, 자신 역시 가르엘을 엉망으로 만들었음을 깨닫고 함께 손을 뻗어 입가를 문질러 주었다.
그에 멈칫하던 가르엘이 이내 가늘게 눈을 휘었다. 긴 입맞춤에 기력이 빨린 듯, 카델은 나무 기둥에 뒷머리를 댔다. 가르엘은 드러난 카델의 흰 목덜미를 지분거리며 조용히 말했다.
“말해 주지 않을 건가요. 적룡과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
“비밀 없는 사이가 되고 싶은데.”
닿아 오는 지긋한 시선에도 카델은 최대한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그런 게 가능할 리 없었다. 질문에 대답하려면 마땅한 말을 찾아야 했고, 카델 라이토스가 아닌 신여환의 대답을 위해 필사적으로 머리를 쥐어 짜내야 했다.
그렇게 떠올린 답도 여전히 제 생각이라 단정 지을 수 없었다. 연속된 절망감에 무너지며, 카델은 체념하듯 날것의 감정을 내놓았다.
“내가 특별한 힘을 가지고 있대.”
“특별한 힘이요?”
“전에 말했잖아. 난 끝이 정해진 삶을 살고 있다고. 그런 거겠지.”
“……전혀 기뻐 보이지 않네요. 보통 인간은 자신이 특별하다고 느낄 때 기뻐하던데.”
카델은 자신의 목덜미를 매만지는 가르엘의 손을 잡고 끌어 내렸다. 그리고 그의 부드러운 손가락을 힘없이 주물렀다.
“내 힘이 아닌 것 같으니까. 주제에 맞지 않는 힘이라…… 훔쳐 온 기분이 들어.”
“운명이 버겁나요?”
가르엘의 시선은 여전히 카델을 탐색하고 있었으나, 그곳에는 그를 위로하고자 하는 다정함이 묻어 있었다. 카델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버거우면 그건 정말… 복에 겨운 거지. 그냥 내가 한심해서. 생각보다 훨씬 덜떨어진 인간이었는데, 여태 그걸 모르고 살아온 것 같아서. 속상해서…… 그래서 그래.”
“본인에게 엄격하네요. 단장님은.”
“그런가.”
가르엘의 손을 놓고,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끔찍한 진실을 알았으나 그렇다고 오도 가도 않은 채 멈춰 있을 수는 없었다. 자신의 곁에는 여전히 하찮은 단장을 위해 많은 것을 버린 부하들이 있었기에.
자신의 불행한 고뇌가 그들의 삶에 영향을 끼치지 않기를 바랐다. 끝내 자신이 침몰하더라도, 그들은 아주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 했다. 죄 많은 손아귀에 욕심껏 움켜쥔 삶들은 마땅한 보답을 받아야 했으므로.
“다들 걱정하겠다. 돌아가자.”
가르엘이 확인할 것이 있다며 어딘가로 떠난 뒤, 카델은 곧장 화염구를 쏘아 신호를 보냈다. 부하들이 모두 모일 때까지 날릴 생각이었으나, 세 번째 화염구를 쏘기도 전에 루멘이 등장했다.
루멘은 카델을 발견하자마자 그의 몸 상태부터 확인했다. 집요한 검증의 끝엔 겁도 없이 적룡을 따라간 그의 안일함을 지적했고, 무사해서 다행이라 안도했으며, 종내에는 두 번 다신 이런 일을 벌이지 말라고 경고했다.
“무모한 것도 하루 이틀이야. 무슨 생각으로 적룡을 따라갔는진 몰라도, 대장이 살아나온 건 순전히 운이라고. 왜 매번 자기 운을 시험하지 못해서 안달 난 사람처럼 구는 거지?”
카델의 손목을 그러쥔 그의 얼굴에는 격양된 감정이 고스란히 떠올랐다. 꽤 열이 오른 듯 눈가가 벌겋게 달아올랐고, 눈빛도 거칠었다. 카델은 그의 충혈된 눈을 마주하다 멋쩍게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자신이 적룡을 따라간 데엔 그가 자신을 죽이지 않으리란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으나, 여전히 설명할 방도는 없었다.
“미안해. 마음이 좀… 급했어.”
“두 번 급하면 저세상도 가겠군.”
“……많이 화났어?”
슬쩍 눈치를 살피자 싸늘하게 카델을 노려보던 루멘이 나지막한 한숨을 터뜨렸다. 신경질적으로 제 머리칼을 쓸어 올린 그가 한층 누그러진 표정으로 카델의 얼굴을 살폈다. 허탈하게 움직이던 시선이 어느 한곳에 머물렀다.
“부었네.”
입술이었다.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입술을 가린 카델이 떠오르는 질척한 기억에 어색한 미소를 머금었다. 심란한 마음에 충동적으로 저지른 키스였다. 후회하진 않았지만, 뒤늦게 찾아오는 부끄러움까지 무시할 순 없었다.
루멘은 피가 몰려 빨갛게 부어오른 카델의 입술을 가만히 응시하다, 손을 뻗어 표면을 문질렀다. 부드러운 손길에도 쓰라린 통증이 느껴져 작게 눈살을 찌푸리자, 루멘의 미간도 좁아졌다.
“적룡이랑 하진 않았을 테고. 가르엘 경인가?”
“……뭘 생각하는 거야.”
순순히 인정하기가 껄끄러워 발뺌했다. 그에 루멘이 짜증스럽다는 듯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손길을 거뒀다.
“글쎄. 난 대장과의 임명식을 떠올리고 있었는데. ……격했나 보군.”
죄지은 사람처럼 시선을 피한 채 침묵하는 카델의 앞에서, 루멘은 몇 번 입술을 달싹이다 결국 고개를 돌렸다. 스스로 본인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그가 장검에 감긴 카델의 망토를 풀었다. 그리고 그것을 넓게 펼쳐 카델의 등에 둘러 주었다.
“가 봐.”
루멘은 카델의 뒤편을 턱짓하며 말했다. 고개를 돌리자, 라이돈을 부축하는 가르엘과 가쁜 숨을 몰아쉬는 반이 보였다.
그들을 발견하자마자 발걸음이 절로 움직였다. 빠르게 달려간 카델이 부하들의 앞에 섰다. 라이돈은 카델을 보자마자 가르엘을 밀쳐 내려 했으나, 마음대로 되지 않는 듯 울상을 지었다.
“다친 거야? 다쳤으면 고집부리지 말고 가르엘한테 치유술 써 달라고 했어야지!”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라이돈의 모습에 카델이 다그치듯 성을 냈다. 만나자마자 몰아치는 잔소리에 라이돈의 눈썹이 억울하게 내려갔다.
“헤소니아가 적룡의 부하 자리를 물려줬어, 카델. 적룡의 명령에 거부를 못해. 억울해. 슬퍼. 잔소리 하지 말고 안아 줘.”
칭얼거린 그가 기어코 가르엘을 밀어 내고 카델를 와락 끌어안았다. 포옹보다는 쓰러지는 것에 가까웠기에, 카델은 묵직한 거구의 요정을 감당하느라 다리가 후들거리도록 힘을 주어야 했다.
‘적룡의 명령에 거부를 못 한다니……. 쿤라와 헤소니아 사이에 뭔가의 계약이 있었던 건가?’
뜻밖의 사실에 의문이 떠올랐으나, 금세 거뒀다. 지금은 쿤라와 다시 만날 생각도, 다른 정보를 물어볼 의지도 없었기 때문이다.
가르엘은 라이돈이 마력 고갈 때문에 기력이 없을 뿐 외상이나 내상은 남지 않았다며 카델을 안심시켰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카델을 짓누르고 있는 라이돈을 끌어당겼다.
라이돈은 순순히 떨어지면서도 카델을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물었다.
“적룡이 카델을 부른 게 헤소니아 때문이야?”
쿤라와의 대화 속에 헤소니아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으나, 카델은 어색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단장이야말로.”
라이돈이 떨어지자, 뒤편에서 둘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반이 다가왔다.
“다친 덴 없어요?”
조심스레 묻는 그의 얼굴은 땀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대체 얼마나 격하게 산을 돌아다닌 건지, 단복도 여기저기 쓸려 찢겨 있었다.
고생한 것이 훤히 드러나는 반의 모습에 걱정과 죄책감이 들었으나, 곧바로 표현하지는 않았다. 기실 그보다는 못했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반을 본 순간, 카델은 기분 나쁜 깨달음을 얻었다. 반 헤르도스는 ‘카델 라이토스’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영입한 기사. 신여환이 알지 못하는 추억들을 가진 ‘카델 라이토스’의 동료라는 것을.
그렇다면 반을 상대할 때 카델 라이토스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게 되는 것이 아닐까. 지금껏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던 반에 대한 감정들이, 거짓말처럼 멀어지고 있음을 느꼈다.
“난 괜찮아.”
말이 절로 딱딱하게 튀어나왔다. 이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카델 라이토스가 자신의 감정에 끼어들 여지를 주고 싶지 않았다.
반은 평소와 다른 카델의 태도에 살짝 당황한 기색이었다. 굳은 낯으로 머뭇거리던 그가 카델에게 한 발짝 다가갔지만, 카델은 그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았다.
“단장—”
“산을 벗어날 때까진 쿤라, 아니, 적룡이 다시 나타날 일은 없을 거야. 그렇다고 느긋하게 굴 수는 없으니, 내일부턴 쉬는 시간을 줄이자. 뭐, 그간의 쉬는 시간 대부분이 나를 위한 거긴 했지만.”
망설임 없이 등을 돌린 카델이 다른 부하들을 향해 말했다. 미안하지만 지금은 반을 상대할 여력이 남지 않았다. 모두의 앞에서 티를 내진 않고 있었으나, 현재 카델은 새롭게 알게 된 진실의 소용돌이 속에서 극도의 혼란을 느끼고 있었다.
그가 평소처럼 상황을 정리하고 계획을 세우는 것은, 오로지 단원들을 위해서였다. 그들에 대한 책임감이 카델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때에 부하에 대한 감정까지 제 것이 아닐지 모른다는 의심에 불을 지핀다면. 그는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었다.
일종의 자기방어인 셈이다. 난데없이 벌어진 거리감에 어리둥절하기만 한 반은 전혀 짐작하지 못하겠지만.
카델은 자신에게 무어라 말을 붙여 보려는 반을 못 본 체하며 씁쓸하게 돌아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