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4화 (224/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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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돈은 멍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보았다. 서서히 노을 지는 주홍빛 하늘은 언제나 그가 가장 좋아하던 풍경이었으나, 오늘만큼은 달리 보였다. 몇 시간 동안 똑같은 하늘만 바라본다면, 심지어 그 행위에 강제성이 더해졌다면. 누구라도 마냥 좋아할 순 없을 테다.

“내상은 전부 치료했어요. 보이는 외상도 없고……. 여전히 몸은 안 움직여지나요?”

바닥에 대자로 뻗어 대답 없이 눈만 굴리는 라이돈의 옆에는, 여태껏 그를 치유해 준 가르엘이 앉아 있었다. 그는 라이돈이 다시 몸을 움직일 수 있도록 치유술에 힘을 쏟았으나, 아직까지 명확한 원인조차 찾아내지 못한 상태였다.

‘이 힘이 계약의 대가인 줄 알았으면 먹는 척하고 버려 버릴걸.’

라이돈은 계속되는 가르엘의 질문을 무시하며 멀쩡하던 사지가 굳어 추락하기 전, 적룡이 꺼냈던 말을 떠올렸다.

“묘하게 익숙한 힘이라고 생각했더니. 헤소니아의 후계자였나.”

“헤소니아의 권능을 얻었으나, 그 대가는 모르는 모양이군.”

적룡은 헤소니아를 알고 있다. 그리고 라이돈의 예상대로라면, 헤소니아가 가진 봉인의 힘은 적룡과의 거래를 통해 얻은 것일 테다.

‘무슨 대가를 치른 거지? 적룡의 명령에 대한 절대적 복종? 흐음, 최대 횟수 정도는 있었으면 좋겠는데. 평생을 그 거대 도마뱀 밑에서 살아야 한다면 자살할지도 몰라.’

정말이지 죽어서까지 짜증 나는 짓만 하는 요정이었다. 라이돈은 상상 속에서나마 헤소니아의 얼굴에 침을 뱉어 주곤, 자신에게 빛 마력을 불어넣는 가르엘을 향해 눈살을 찌푸렸다.

“쓸데없는 짓 그만해. 너도 카델 찾으러 가.”

“물론 그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요. 라이돈 경이 이렇게 덫에 걸린 쥐처럼 꼼짝도 못 하는 상황이잖습니까. 내버려 뒀다가 곰한테 물려가기라도 한다면 단장님을 뵐 면목이 없답니다.”

어쩔 수 없다며 고개를 가로젓는 가르엘에 라이돈은 이 상태로도 마법을 쓸 수 있노라 항변했으나, 마력 고갈 상태에 돌입한 요정의 주장은 그다지 설득력이 없었다.

결국 라이돈은 얌전히 가르엘의 쓸모없는 치유술을 받아들여야 했다. 이러다 마기가 조금이라도 흘러 들어오면 그걸 빌미로 내쫓을 생각이었다.

그렇게 라이돈과 가르엘이 발이 묶인 사이. 반과 루멘은 적룡이 날아간 방향을 따라 카델의 흔적을 수색하는 중이었다.

가파른 경사로를 끊임없이 뛰어오르면서도 두 남자 사이에선 이렇다 할 대화가 없었다. 평소처럼 누군가를 깎아내리며 투덕거리지도 않았다. 그저 살벌한 얼굴로 적룡의 자취를 따라갈 뿐이었다.

먼저 뜀박질을 멈춘 쪽은 반이었다.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떨어진 무언가를 집어 들었다. 기울어진 턱선을 따라 투명한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

붉은 망토였다. 자신의 것도, 루멘의 것도, 남은 두 단원의 것도 아닐 테니. 이것의 주인은 카델임이 분명했다. 한창 달릴 때보다도 심장이 격하게 뛰어 댔다.

반이 따라오는 기척이 없자 이상함을 눈치챈 루멘이 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그가 죽일 듯 노려보고 있는 망토를 발견했다. 짧은 순간, 루멘의 표정에 균열이 일었다. 그는 반의 손에 들린 망토를 거칠게 낚아챘다.

망토를 응시하는 그의 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원래도 서늘했던 분위기는 분노와 예민함으로 점철되어 가까이 다가가기만 해도 얼어붙을 것 같은 냉기를 풍겼다.

힘을 준 손아귀 안에서 망토가 엉망으로 구겨졌다. 루멘은 분노를 눌러 참듯 꽉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기절시켜서라도 데려갔어야지.”

살기 어린 시선은 반을 향하지 않았으나, 분노의 대상이 누구인지는 명백했다. 그럼에도 반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침묵하는 그의 앞에서, 루멘은 망토를 제 검집에 감아 묶으며 등을 돌렸다.

루멘은 지체 없이 추격을 이어 갔고, 반은 그의 뒷모습이 충분히 멀어졌을 때에야 덜덜 떨릴 만큼 강하게 그러쥔 주먹에서 힘을 풀었다.

카델을 막지 못한 자신에 대한 혐오감이 사납게 들끓었으나, 그마저도 카델을 찾아내야 한다는 간절함을 이기진 못했다.

*

“……두 가지 삶의 선택지라.”

적룡은 깊게 생각에 잠긴 채 바닥의 한 점을 응시했다. 그의 앞에서 카델은 판결을 기다리는 죄인처럼 조급하게 적룡의 눈치를 살폈다.

아무리 자신이 이곳을 현실처럼 살아간다고 한들, 이 세계의 시작이 어느 게임이었다는 사실을 쉽게 외면할 수는 없었다. 자신에겐 언제나 ‘진짜 세계’가 존재했다. 하지만 이 세계에서 창조되어 살아가는 이들에게, 이곳은 유일무이한 현실이었다.

유일하리라 믿었던 자신의 세계가 사실은 지어낸 이야기에 지나지 않았음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 리 없다. 때문에 카델은 최대한 이 세계에 관한 언급을 피하려 했으나, 시스템을 설명하기 위해선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주제였다. 모든 사건은 자신이 게임에 빙의된 후부터 시작되었으니.

다행히도 적룡은 자신의 세계가 누군가의 창조물일 뿐이며, 많은 이들이 향유하던 세계라는 점을 큰 어려움 없이 받아들인 듯했다.

“기묘하군. 그쪽 세계에서 이곳은 그저 만들어진 가짜에 불과하다면서, 선택지 중 하나는 이 세계에서의 삶이라니. 고민할 가치가 있으니 넣어 둔 거겠다만… 의중이 모호해.”

카델 역시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 세계에서의 삶은 고민할 가치조차 없다고 생각했다. 당연히 원래 세계로 돌아가야 했으니까.

하지만 이곳에서 기사단을 꾸리며 소중한 이들을 만나고, 짊어진 것이 늘어날수록. 그는 염두에도 두지 않았던 새로운 삶을 꿈꾸게 되었다. 지금 와서는 터무니없는 욕심이었음을 알게 되었지만.

체념하듯 조소를 머금자, 적룡의 시선이 움직였다. 인간의 나약한 모습은 지겹도록 지켜봐 왔다. 그런 그의 눈에, 지금의 카델은 무너지기 일보 직전의 아슬아슬함을 품고 있었다.

보통이라면 그가 나약함을 이겨 내든, 감정에 잡아먹히든 방관하며 놔뒀을 테다. 하지만 이 인간은 특별했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세계의, 그곳에서조차 특별한 일을 겪어 본 희귀한 영혼이 아니던가. 이대로 망가지게 둘 수는 없었기에, 적룡은 여태 꺼내지 않았던 정보를 던져 주기로 했다.

“그 몸에 갇힌 영혼은 확실히 뛰어난 역량을 품고 있다. 다른 인간보다 유달리 눈부시다는 점은 인정하지. 하지만 그 빛이 자연스러운 건 아니야.”

“……그게 무슨 말이죠?”

“그 힘, ‘시스템’이라는 힘에 영향을 받은 영혼이라는 소리다. 처음엔 이 몸조차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기운을 불어넣을 때 알게 됐지. 그건 작위적으로 만들어진 영혼이야.”

작위적으로 만들어진 영혼이라니. 카델 라이토스는 이 세계의 주인공이었다. 큰 틀에서 보았을 때, 만들어진 세계의 만들어진 영혼이라는 것이 이상할 점은 없었다.

적룡은 의미를 모르겠다는 듯 미간을 좁힌 카델을 가볍게 턱짓했다.

“태어나기를 반쪽으로 태어난 영혼이야. 마치 누군가의 개입을 위해 만들어진 영혼처럼 온전하지 못하지. 처음부터 반쪽짜리였기에 네 영혼과 결합할 수 있었던 거다.”

“반쪽짜리……?”

“어쩌면 네가 말한 ‘빙의’를 염두에 두고 태어난 인간일 수도 있지. 아니, 아마 그게 맞을 거다. 만약 네가 네 세계로 돌아가게 된다면, 그 반쪽짜리 영혼은 얼마 버티지 못해 사그라질 테니.”

새로운 진실을 차근차근 이해해 가려던 카델의 노력은, 적룡의 마지막 말에 허망하리만치 빠르게 무너졌다.

너무 많은 이야기가 정리도 되지 않은 채 머릿속을 메워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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