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3화 (223/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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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눈을 떴을 때, 카델은 자신이 어느 동굴 안에 있음을 깨달았다. 굼뜨게 눈을 깜빡이자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는 것이 느껴졌다. 땀이 식으며 체온이 내려갔으나, 오한이 들지는 않았다. 그의 등 뒤에 있는 존재 때문이었다.

적룡은 카델의 뒤에 앉아 그를 품듯이 끌어안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둘 다 상의를 탈의한 상태였다. 카델은 맨 등에 닿아 오는 탄탄한 근육의 감촉에 본능적으로 몸을 옹송그렸으나, 적룡의 손이 그의 가슴을 짓누르며 행동을 제지했다.

“네 몸에 기운을 순환시키고 있으니 움직이지 말거라. 성가신 힘이라 신경 쓸 게 많아.”

“기운…?”

무심코 되물은 목소리가 형편없이 쩍쩍 갈라졌다. 카델은 본인 목소리에 본인이 놀라 인상을 찌푸렸다. 기묘할 정도로 최악으로 치닫는 컨디션이 그저 우연만은 아닐 것 같았다.

‘차라리 치고받고 싸우는 게 더 편할 것 같은데.’

적룡과 붙어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몸이 달궈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저 따뜻한 수준이 아니었다. 몸속에 끓는 물을 들이부은 것처럼 과한 열기가 퍼져 나가고 있었다. 앓는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노력했음에도 절로 달뜬 숨소리가 튀어나왔다.

“참거라.”

적룡의 낮은 음성이 귓전을 울렸다. 이미 손끝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고통을 감내하고 있던 카델로서는 참으로 황당한 요구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커헉…!”

불에 달군 꼬챙이가 몸을 관통하듯, 극심한 열기와 통증이 동시에 전신을 꿰뚫었다. 적룡은 허리를 꺾으며 바들거리는 카델의 상체를 결박해 그가 바닥에 나뒹굴지 않도록 고정했다.

그렇게 눈을 까뒤집은 채 한참을 꺽꺽거리던 카델은, 다시 의식을 놓기 직전에서야 점차 사그라지는 고통 속에서 헐떡였다. 끔찍했던 고통의 여운으로 몸이 잘게 떨렸다. 얼굴은 생리적으로 흐른 눈물과 침으로 엉망이 되었으나, 닦아 내야 한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이제 네 힘은 전부 다스려 놓았으니, 대화만으로 괴로워질 일은 없을 거다.”

적룡은 흐물거리는 카델을 떼어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힘이 몽땅 빠져 버린 카델은 동굴 벽에 몸을 기댄 채 눈만 굴려 적룡의 움직임을 좇았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거대한 동굴임에도 그의 걸음에는 막힘이 없었다. 제집처럼 동굴을 가로지른 적룡은 그림자에 가려진 공동에 들어갔다가, 무언가를 들고 다시 돌아왔다.

“마실 건 이것뿐이더군. 싫어하는 인간은 없었으니, 너도 마시거라.”

카델은 적룡이 던져 올린 것을 간신히 낚아채 들여다보았다. 투명한 크리스털 병에 담긴 액체였다. 뚜껑을 열어 액체의 냄새를 맡은 그가 헛웃음을 뱉었다.

“……술이잖아.”

이런 몸 상태로 술을 마시고 싶진 않았으나, 당장 뭐라도 마시지 않으면 목이 메마르다 못해 찢어질 것 같았다. 짧은 고심 끝에 결국 술병을 기울여 목을 축였다. 후끈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술은 상당히 시원하고 향긋했다. 목 넘김이 깔끔한 차를 마시는 것도 같았다.

카델이 단숨에 반병을 비워 내는 동안, 어느새 그의 앞으로 다가온 적룡이 팔짱을 낀 채 카델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슬슬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해 주었으면 하는데. 이 몸에겐 시간이 아주 많지만, 인간인 네 녀석은 일분일초가 아까울 테니 말이야.”

적룡이 기운을 불어넣어 준 덕분인지, 그를 마주해도 더 이상 속이 메스껍거나 머리가 어지럽지는 않았다. 카델은 곧장 대답하는 대신, 근처에 널브러진 제 옷을 찾아 느릿느릿 껴입었다. 적룡은 카델의 앞에 쭈그려 앉은 채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다. 몸집이 큰 탓인지 구부정하게 앉은 자세가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그는 대답을 재촉하듯 카델을 빤히 응시했고, 카델은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 올라 그의 질문에 대해 고민했다. 하지만 떠오르는 답변은 전부 시원찮은 것들뿐이었다.

“아무것도 모릅니다.”

“……무슨 뜻이지?”

“말 그대로요. 대답해 드릴 만한 정보가 제겐 없다고요. 오히려 이쪽에서 물어보고 싶네요. 제가 집어삼킨 영혼이란 게, 대체 뭡니까?”

적룡은 카델의 말이 진심인지 아닌지를 가늠하듯 그의 눈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러고는 비릿한 미소를 머금은 채 바닥에 완전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인간은 무지를 죄로 여기지 않는 듯하나,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이 몸에게 있어 무지는 죄다.”

다소 건방진 자세로 한쪽 무릎을 세우고 그 위에 팔을 걸친 적룡이 삐딱한 시선으로 카델을 훑었다. 그리고 아주 간단한 사실을 일러 주듯 말했다.

“확인한바, 네 안에는 또 다른 영혼이 존재하더군. 이쪽 세계의 영혼이다. 네가 그 저주와도 같은 힘을 통해 그 아이의 영혼을 억누르고 몸의 주도권을 가진 거지.”

“……예?”

“몸은 빼앗겼으나 아직 영혼은 죽지 않았다. 생생하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시들지도 않았지. 분명한 자아를 가지고 있어.”

자신의 안에 또 다른 영혼이 존재한다니. 만약 그런 것이 가능하다면, 그 영혼의 주인은 ‘카델 라이토스’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말은.

“자, 잠깐만요. 제 안에 자아를 가진 또 다른 영혼이 있다는 건, 그러니까…… 그 영혼이 지금, 이 안에서 모든 걸 지켜보고 있다는, 그런 얘깁니까? 제가 몸을 빼앗고, 대신 살아가는 이 모든 현실을?”

갑작스런 충격에 몸을 가누지 못하는 사람처럼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카델은 뻣뻣한 머리를 굴려 어떻게든 객관적인 사실만을 받아들이려 했으나, 불가능했다.

자신이 빼앗은 카델 라이토스라는 인물의 영혼은 어디로 갔을지. 막연히 상상해 본 적이 있었다. 상상 속에서 그의 영혼은 시스템의 보관소에 들어 있기도 했고, 의식 불명 상태일 신여환의 몸에 들어 있기도 했으며, 아예 소멸해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도 했다.

하지만 같은 몸을 공유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은 전혀 해 본 적이 없었다. 그건 너무도 끔찍한 일이었으니까.

적룡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인 채 턱을 문질렀다. 귀한 물건을 품평하듯 카델을 향한 시선에선 신중한 기색이 떠올라 있었다.

“지켜보진 못한다. 몸의 주인은 너니까. 이 세상을 보고 느끼는 것은 오로지 네 몫이다. 다만 그 녀석은 너의 내면과 뒤엉키지.”

“내면…?”

“너의 생각과 행동에 간섭한다. 쉽게 예를 들어 주지. 넌 다른 세계에서 넘어온 것치곤 이쪽 세계에 꽤 빠르게 적응했을 거야. 사람을 대하는 데 큰 어려움도 없었을 거고. 그렇지 않나?”

카델은 마른침을 삼키며 눈을 내리깔았다. 아니라고, 적응이 무척 힘들었다고 대답하고 싶었으나, 글쎄. 모든 것이 낯설다고 느끼기는 했지만, 그런 것치곤 행동하는 데 있어 망설임이 적기는 했다. 자신이 이렇게까지 위기에 강한 성격이었나, 감탄하는 데서 그친 일이었는데.

카델이 대답하지 않자 적룡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너라면 하지 않았을 일, 너라면 느끼지 않았을 감정, 너라면 내리지 않았을 결정. 영혼은 그 모든 것에 간섭하고 있다. 그것이 녀석의 자의인지 아닌지는 중요치 않지. 여태껏 이상한 점을 눈치채지 못했다는 게 더 놀랍군그래.”

“……그 말은, 지금 제가 하는 생각과 느끼는 감정까지 전부… 온전한 제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뜻입니까…?”

“어떤 관점에서 본다면 그럴 수도 있지. 어쩌면 막 진실을 알게 된 이 상황마저 빠르게 받아들일지도 모르겠군. 그 영혼은 이미 모든 것을 인지하고 있었을 테니까.”

사고 회로가 뚝 끊긴 것처럼, 더 이상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용량 초과였다. 카델은 뒤늦게 술병을 쥐고 있는 손이 덜덜 떨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양손으로 그러쥐어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자신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떤 기분인지. 명확히 느끼는 것이 두려워졌다. 자신의 것이 아닌 카델 라이토스의 의지가 끼어들까 봐. 당장 끼어든대도 그것을 구분해 낼 자신이 없었다. 여태껏 하지 못한 일을 지금 와서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이 두려움까지 카델 라이토스의 감정은 아닐까. 모든 것을 의심하게 됐다. 그러다 문득, 도저히 떨쳐 낼 수 없는 한 가지 의문에 도달했다.

“그럼… 제가 누군가를 보며 느끼는 감정도, 제 것이 아닐 수 있다는…….”

차마 말을 끝맺지 못한 채 적룡을 쳐다보았다. 그는 그런 카델이 흥미롭다는 듯 매끄럽게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물론이지. 만약 네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됐다면 그건 너의 사랑일 수도, 네 안에 있는 다른 영혼의 사랑일 수도, 두 영혼의 적당한 호감이 합쳐져 만들어진 거품 같은 사랑일 수도 있다는 소리다.”

그동안 치렀던 전투를 통해, 카델은 자신에게 제법 무모한 면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무리 퀘스트를 클리어하기 위함이고, 클리어하지 못하면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없는 진퇴양난의 상황이었다 한들. 목숨이 여러 개인 것처럼 굴었다는 점을 부정할 순 없었다.

그처럼 위험한 전투는 처음이었다. 겪어 본 적도, 겪어 볼 일도 없었다. 그러니 온통 처음뿐인 전투 속에서 자연스럽게 무모한 결정을 내렸던 스스로의 행동은, 여태껏 빛을 발하지 못했던 숨겨진 성정의 일부이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생각해 보면 진짜 카델이야말로 무모한 놈이었지.’

반의 영입 스토리에서 보았던 진짜 카델 라이토스. 그 남자야말로 무모하다고 할 수 있었다. 남을 위해 스스로를 불사르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던 사내였으니.

그때 생각하지 않았는가. 자신은 카델 라이토스처럼 하지 못할 거라고. 목숨을 걸어 목숨을 구하는 일은,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그런 주제에 매번 수도 없이 목숨을 걸었다.

결국 처음부터 카델 라이토스의 영향을 받고 있었던 거다. 스스로에게서 찾아낸 의외의 면은, 소중하고도 새로운 자아의 발견이 아닌 잠시 빌린 남의 것에 불과했다.

또한 그 모든 의외성 덕분에 수많은 난관을 헤쳐 갈 수 있었으므로, 이 세계의 주인공은 여전히 카델 라이토스였다. 자신은 그의 자리를 빼앗아 공을 가로채려는 도적에 불과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어.’

시스템은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았다. 그에게 두 가지 선택지를 쥐여 줬을 뿐, 그가 남의 몸을 가로챈 것에 대해 일언반구도 꺼내지 않았다.

카델 라이토스에게 있어 시스템은 그야말로 재앙이나 다름없었을 테다. 그렇다면 자신은? 그 재앙의 파도에 몸을 싣고 카델 라이토스를 집어삼킨 자신은? 지옥에서 온 사자쯤 되는가? 아니면 지옥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자신이 누군가의 삶을 약탈했다는 사실이 지금처럼 절절히 다가온 적이 없었다. 이제야 실감이 났다. 비록 자의가 아니었다 한들, 그의 것을 빼앗아 웃고 떠든 모든 순간이. 그 모든 나날이 역겹게만 느껴졌다.

“설명은 충분히 한 것 같은데. 많은 것을 알려 줬으니, 이젠 네가 알고 있는 것을 전부 말해 보거라.”

적룡은 카델이 느끼고 있을 모든 혼란에도 개의치 않고 그를 독촉했다. 카델이 대체 무슨 수를 써서 다른 세계의 차원을 넘어온 것인지가 궁금했다. 그가 알지 못하는 세계에 관한 궁금증이 오래도록 잠들었던 감각을 깨우는 듯했다.

카델은 파리하게 질린 얼굴을 쓸어내리며 숨을 골랐다. 새어 나오는 숨소리가 곧 쓰러질 사람처럼 위태로웠지만, 어떻게든 정신을 차려 보겠다는 듯 눈빛만큼은 또렷했다.

그는 바싹 마른 목소리를 끄집어내 자신이 겪었던 일들을 나열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시스템이란 존재를 믿을 수가 없었다. 그에겐 온전한 진실만을 알려 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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