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2화 (222/521)

*

카델은 눈앞의 남자를 유심히 살폈다. 그는 불꽃처럼 화려한 적색 머리칼을 허리까지 기다랗게 늘어뜨렸고, 큰 키와 근육이 고루 잡힌 탄탄한 몸을 가졌으며, 눈동자는 어떤 색이라고 콕 집어 말할 수 없을 만큼 오묘한 녹빛을 띠었다.

카델이 꿈속에서 보았던 남자와 똑같은 외형. 적룡이 등장한 후부터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듯, 눈앞의 남자는 적룡의 인간형이었다.

“번거로운 과정을 거쳤군.”

인간의 모습을 갖춘 적룡은 환청 같은 울림이 아닌 진짜 목소리를 냈다. 꿈속에서처럼 은근한 권태감과 귀찮음이 느껴지는, 명확하지 않은 높낮이의 음성이었다.

카델은 꿈에서 보았던 곳과 똑같은 호숫가에서 기다란 머리칼을 짜증스레 쓸어 올리는 적룡을 향해 말했다.

“내 동료들을 어떻게 한 겁니까.”

“걱정하는 건가?”

“당연하죠. 설마 해친 겁니까? 제가 오면 해치지 않겠다고 했잖아요.”

적룡은 카델의 공격적인 태도가 흥미롭다는 듯 게슴츠레 눈을 접었다.

“걱정이라……. 웃기는군.”

그의 얼굴에 떠오른 짙은 조소에 카델은 강한 불쾌감을 느꼈다. 뭐가 우스운 건지 따져 묻고 싶었으나, 그보다는 부하들의 안위가 더욱 중요했다.

대답을 재촉하는 카델의 시선에 적룡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죽이지는 않았다.”

목숨은 살려 줬다는 건가. 완전히 안심할 순 없어도, 어느 정도는 마음이 놓였다. 카델은 그제야 참았던 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너무 긴장한 탓인지 심장이 뻐근했다.

적룡은 기다란 다리를 뻗어 카델의 앞으로 다가왔다. 빠르게 좁혀지는 거리에 훅 고개를 치켜든 카델이 경계 어린 얼굴로 뒷걸음질 쳤다. 꿈속에서의 지독했던 두통이 떠오른 탓이었다. 그에 적룡은 무리한 접근을 관두고 적당한 거리를 둔 채 멈춰 섰다.

“……왜 날 부른 거죠?”

“왜라고 생각하지?”

“어떻게 제 꿈에 찾아온 건데요?”

“어떻게 꿈을 꾸게 했냐는 것부터 물어야 하는 게 아닌가?”

어떻게 꿈을 꾸게 했냐니.

적룡의 발언에 카델의 입이 작게 벌어졌다. 그는 마치 카델이 꿈을 꾸지 못하는 몸이란 걸 아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설마 시스템의 존재를 알고 있나? 간섭 자체가 고의였다는 얘기야? 대체 어떻게……?’

적룡은 카델의 의심스러운 시선을 태연하게 받아 내며, 그가 미처 꺼내지 못한 질문의 답을 했다.

“이 세계의 것이 아닌 힘을 가지고 있더군.”

“…….”

“힘이라기엔 저주에 가까웠지만.”

적룡은 시스템에 대해 알고 있다.

그 사실을 인지하자마자 급격히 숨이 가빠졌다. 기대감인지 두려움인지 모를 것들이 머릿속에 잔뜩 들어차며 눈앞이 아득해졌다.

“어떻게 그걸…….”

“처음엔 남의 세계에서 활개 치는 힘이 거슬려 찾아갔던 것뿐이다. 그런데 거기서 꽤 흥미로운 걸 발견했거든. 몇천 년을 살면서도 보지 못한 것이었기에, 이 몸으로선 참으로 오랜만에 직접 행차해 보았지.”

게임 속 적룡도 이런 이야기를 했던가? 적룡의 스토리를 따로 읽어 본 적은 없지만, 아마 높은 확률로 아닐 것이다. 적어도 이벤트를 안내해 주던 적룡은 매번 ‘축복받은 신의 아이’라며 카델 라이토스를 예뻐했으니까. 그에게 있어 카델 라이토스란 존재는 세계의 평화를 지킬 수 있는 특출한 인간의 영웅일 뿐이었다.

카델은 혼란스러운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차근차근 대화를 진행했다.

“저주라는 건 무슨 소리죠?”

“그 힘은 운명을 구속하는 저주다.”

운명을 구속하는 저주. 카델이 굳은 낯으로 그의 모호한 말을 곱씹는 동안, 적룡은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와 카델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빛에선 강한 흥미와 함께 은근한 혐오감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카델은 긴 머리칼이 제 앞에 그림자를 드리울 때서야 정신을 차렸다. 멈칫하며 물러서려 했으나, 적룡이 먼저 팔을 낚아챘다. 그는 자신보다 한참은 작은 카델을 잡아먹을 것처럼 몸을 굽혔다.

“또한 영혼을 죽이는 저주이기도 하지.”

“그게 무슨…….”

카델은 코앞까지 다가온 적룡의 얼굴이 부담스러워 몸을 내빼려 노력했지만, 그럴수록 팔을 잡아당기는 힘은 강해지기만 했다.

적룡은 곤혹스러워 보이는 카델의 잿빛 눈동자를 응시하며, 잔혹한 비밀을 속삭이듯 비정하게 읊조렸다.

“느끼고 있느냐? 네가 집어삼킨 영혼의 존재를. 죽지도 못한 채 이 안에 갇혀 꿈틀대고 있구나.”

적룡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보다 곤혹스러운 것은, 갑작스레 시야를 점령한 시스템 창의 등장이었다.

[경고! 기형적 존재는 시스템을 위협합니다. 접근하지 않을 것을 추천합니다.]

[해당 인물에 대한 데이터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분석을 시작합니다.]

[분석 완료까지 남은 시간: 02시간 59분 59초]

‘경고’라는 문구가 마치 경광등 빛처럼 요란하게 깜빡였다. 순식간에 붉게 물든 시야 속에서, 적룡은 여전히 의미 모를 말을 지껄였다.

“계약에 의한 정당한 대가인가? 아니면 일방적인 약탈? 어떻게 다른 세계에서 온 네가 이곳의 영혼을 탐닉할 수 있었던 거지? 네게서 그 정도의 권능은 느껴지지 않는다만.”

적룡이 이것저것을 물어 왔지만 카델로서는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 대목이 한 군데도 없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속이 거북했다.

시스템의 경고 문구 너머에서 적룡의 눈동자가 음험하게 번뜩였다. 그를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지끈거렸고, 이유 모를 소름이 돋았으며, 눈앞이 아득하게 흐려지고 선명해지기를 반복했다.

“대답하거라. 이곳에 온 목적이 뭐지?”

“이거 놔…!”

숨통을 죄어 오는 고통이었다. 결국 버티다 못한 카델이 발작적으로 적룡의 가슴을 향해 화염구를 날렸다. 동시에 스스로를 보호하는 방어막을 둘렀음에도 지척에서 뜨끈한 열기가 끼쳐 왔다.

카델은 공격을 맞고서야 느슨해진 적룡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욱신거리는 팔을 움켜쥐었다. 절로 고개가 수그러지며 눈에 힘이 풀렸다.

‘씨발, 대체 뭐야. 대체 뭐냐고.’

아무래도 이 세계의 적룡은 게임 속 적룡과는 거리가 먼 존재인 듯했다. 그는 시스템의 힘을 감지했고, 강한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카델이 알지 못하는 사실까지 밝혀냈다.

그것을 자세히 들어 봐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시스템이 등장한 후부터 몸 상태가 좋지 못했다. 온 근육이 구타라도 당한 듯 뻐근하게 뭉친 느낌이었다.

카델은 본능적으로 복부를 감싸 안은 채 눈을 들었다. 그러자 가장 먼저 적룡의 무표정한 얼굴이 보였다. 그는 카델이 화염구를 날린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공격에 아파하거나 당황한 기색은 없었다. 당황한 것은 되레 카델이었다.

‘비늘…?’

화염구가 적중했을 적룡의 가슴 위로, 반투명한 붉은색의 비늘이 장막처럼 뒤덮여 있었다. 적룡은 아무 일도 겪지 못했다는 듯 무심하게 카델을 응시하며, 마찬가지로 무감한 목소리를 냈다.

“네 힘이 나를 거부하고 있는 모양이군. 네겐 듣고 싶은 이야기가 많으니……. 도와주마.”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