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9화 (219/521)

[이 땅에 인간이 발을 들인 건 오랜만이군. 그것도 이렇게나… 요란스럽게 말이지.]

기묘한 목소리가 머릿속을 강타하듯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라이돈의 [환언]과 비슷한 종류였으나, 이쪽은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메스꺼운 기분이 들 만큼 심한 여운이 남았다.

카델은 반사적으로 머리를 짚은 채 정면을 바라보았다. 내려온 적룡은 카델과 반이 있는 바위와 제법 가까이에 있었다. 적룡이 머리를 숙인다면 바로 그들을 집어삼킬 수 있을 정도의 거리였다.

“단장. 조금씩 물러나죠.”

카델에게 속삭인 반이 등에 매단 대검의 손잡이를 움켜쥐며 안광을 빛냈다. 그 역시 난생처음 마주한 격이 다른 위압감에 긴장한 듯 잔뜩 날이 서 있었다.

카델은 자신의 앞을 막고 조금씩 물러나는 반을 따라 뒷걸음질 쳤다. 갑작스런 적룡의 등장과 조금 전부터 느껴지는 묘한 기시감에 심장이 요란스럽게 뛰어 댔다.

[초대한 기억이 없으니 불청객이겠지. 이 몸은 인간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 당장 죽여도 상관없겠다만, 구미가 당기지는 않는구나.]

죽이겠다는 거야, 말겠다는 거야. 카델은 정신없는 와중에도 열심히 머리를 굴리며 적룡과의 ‘대화’의 가능성을 셈했다. 당장이라도 모두를 깔아뭉갤 기세인 놈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한에서, 흥미로나마 주의를 끌 수 있다면.

하지만 적룡은 처음부터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찾아온 듯했다.

[이 인간을 데려가겠다. 나머지는 살려 주지.]

적룡이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그 느긋한 움직임에 지면이 갈라지고 주변의 나무가 으스러지는 묵직한 굉음이 울렸다.

적룡의 또렷한 시선은 한 남자를 향하고 있었다. 카델. 그는 카델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반을 한 번 흘기더니, 코웃음을 치는 것처럼 콧김을 뿜었다. 작은 숨결일 뿐임에도 몸이 흔들릴 만큼 강한 바람이 전신을 덮쳤다.

[셋을 세지. 그동안 이 인간을 버리고 도망간다면, 뒤쫓지 않으마.]

하나. 둘.

이어지는 음성에 메스꺼움도 덩달아 강해졌다. 카델은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은 기분에 휩싸인 채 반을 옆으로 밀쳐 냈다.

“도망가.”

한 번에 들어먹으리란 기대는 하지 않았으나, 그럼에도 말했다. 상상을 초월하는 실물에 간이 쪼그라들기는 했어도, 여전히 카델의 기억 속 적룡은 무언가를 닥치는 대로 잡아 죽이는 괴물은 아니었다.

반의 당황한 시선이 닿아 왔다. 그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는 듯 눈가를 찌푸렸으나, 적룡의 목소리가 ‘셋’을 읊조린 순간. 반과 적룡의 모습이 순식간에 잔상처럼 멀어졌다.

“젠장, 이렇게 될 줄 알았다고.”

두어 번 눈을 깜빡인 후에야 카델은 루멘이 자신을 낚아채 도망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황한 그가 반사적으로 루멘의 어깨를 움켜쥐며 시선을 움직였다.

“야, 우리가 이렇게 도망가면 다른 애들은…….”

“알아서 살겠지. 저놈은 지금 대장을—”

본인 걱정이나 하라며 카델을 타이르려던 루멘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동시에 납덩이처럼 묵직한 광풍이 둘을 덮쳐 왔다. 휘어진 나무의 뿌리가 드러날 정도로 숨 막히는 강풍이었다. 속절없이 붕 떠오르는 육체에 루멘이 카델을 품 안에 끌어안은 채 등을 돌렸다.

“큭……!”

버텨 볼 재간도 없는 풍압에 밀려나던 중, 거대한 나무 기둥이 둘을 가로막았다. 뻑 소리가 날 만큼 강하게 몸을 부딪친 루멘이 이를 악물었다.

“루멘!”

놀란 카델이 루멘을 불렀으나, 대답을 들을 새는 없었다. 날아온 적룡이 다시금 그들이 선 하늘을 가린 것이다.

[무지한 인간이로군.]

그들을 내려다보는 적룡의 아가리가 벌어지며 작은 틈이 생겨났다. 카델은 그 틈새로 차오르는 새빨간 불꽃을 발견하곤 서둘러 장막을 둘렀다.

불꽃을 머금은 입이 크게 벌어지며, 녹여 내지 못할 것이 없을 듯한 뜨거운 열기가 폭우처럼 쏟아져 내렸다. 불꽃이라기보단 용암에 가까운 온도였고, 범위는 그들이 선 숲을 통째로 태워 버릴 만큼 방대했다.

그러나 브레스가 카델의 장막을 파고들기 직전.

“멈추지 말고 달려, 카델!”

지독한 한기를 동반한 얼음 장막이 공격을 가로막았다. 카델은 얼음 장막을 중심으로 두 갈래로 뻗쳐 가는 브레스를 바라보다, 장막의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라이돈. 그가 속절없이 녹아내리는 얼음 장막을 마구잡이로 강화하며 적룡을 가로막고 있었다. 순식간에 절반 이상의 마력을 끌어 올린 라이돈이 한 번도 보인 적 없던 다급한 얼굴로 외쳤다.

“어서!”

카델은 자신이 여기서 도망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으나, 부하들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은 카델이 무어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를 지키기 위해 달려들었다.

“단장! 이리 오세요!”

“말이 씨가 된 것 같아 영 찜찜한데요.”

반은 장막을 거둔 카델의 손목을 낚아챘고, 가르엘은 루멘의 가슴팍에 손을 올렸다. 손끝에서 퍼져 나온 마기가 체내에 스며들며 금이 간 뼈와 경직된 근육을 원상태로 되돌렸다.

카델은 자신을 끌고 가려는 부하들의 틈에서 홀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산맥이 통째로 저놈 둥지야. 도망가는 건 불가능하다고! 더 다치기 전에 그냥 날 보내.”

“미쳤어, 대장? 쓸데없는 희생정신을 여기서까지 발휘하지 마.”

충격에서 회복된 루멘은 나머지 동료들의 등을 떠밀며 반대편으로 물러났다. 그의 차가운 시선이 카델의 양옆을 차지한 반과 가르엘을 훑었다.

“시간을 벌어 볼 테니 어떻게든 숨겨.”

반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가르엘은 개운치 못한 얼굴로 안대를 끌어 내리며 말했다.

“죽지만 마세요. 숨만 붙어 있다면 어떻게든 살려 드릴 테니.”

카델은 자신의 의견을 완전히 묵살한 채 척척 호흡을 맞춰 가는 부하들의 모습에 황당함을 금치 못했으나, 끊임없이 몰아치는 브레스와 그에 맞서 폭발적으로 끓어오르는 라이돈의 마력은 상황을 심각하게 이끌고 있었다.

‘일단 잡혀가서 얘기 좀 하고 온다고 해도 안 들어 줄 것 같은데…?’

카델은 반의 손에 질질 끌려가면서도 계속해서 뒤를 돌아보았다. 라이돈과 루멘의 실력을 믿지만, 상대는 적룡이었다. 무리하게 시간을 끌다가 크게 다치기라도 한다면.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그는 여차하면 부하들에게서 도망쳐 적룡을 찾아가겠노라 마음먹었다.

‘적룡이 왜 날 원하는지 알 것도 같으니.’

쉼 없이 달려 나가는 카델의 눈빛이 의미심장하게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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