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스템 오류! 허락되지 않은 외부의 힘이 감지되었습니다.]
[보호 프로그램 발동. 외부의 힘을 차단합니다.]
[영혼 재봉합을 시작합니다.]
[복구까지 남은 시간: 10초]
시스템 창에 무슨 말이 적혀 있는지 일일이 확인할 여유는 없었다. 카델은 뇌를 쥐어짜듯 갈수록 고통스러워지는 두통을 이기지 못한 채 주저앉았다. 몸에 흐르는 전류의 감각은 거세져만 갔고, 남은 것은 오로지 고통뿐이었다. 남자는 바닥에 머리를 처박은 채 헐떡대는 카델은 무감하게 내려다보다, 곧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곧 찾아가지.”
냉랭한 기약과 함께, 10초의 복구 시간이 종료됐다.
*
카델은 물에서 막 건져 올린 사람처럼 크게 숨을 몰아쉬며 눈을 떴다. 부산스럽게 눈을 깜빡이며 주위를 둘러보자, 깨어난 부하들이 이동할 채비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익숙한 동료들의 모습을 담아내면서도 한동안 꼼짝할 수 없었다. 고통은 사라졌으나, 모든 감각이 생생하게 남아 여운을 주고 있었다.
“응? 자기, 일어났어? 더 자도 되는데.”
카델과 눈이 마주친 라이돈이 활짝 웃으며 다가왔다. 그가 뻗은 손을 잡고 흐물흐물한 상체를 일으켜자, 다른 단원들 역시 그에게로 관심을 돌렸다.
“피곤하면 더 주무셔도 돼요, 단장. 업어 줄게요.”
“그래, 대장. 반보다는 한 번도 안 깨고 푹 잔 라이돈에게 부탁하는 편이 나을 것 같지만.”
호의로 가득한 그들의 시선에 카델 역시 서서히 현실감을 되찾았다. 그는 어색한 미소와 함께 일어나 짐가방을 둘러멨다.
“괜찮아. 다음엔 나도 보초 설 테니까, 그냥 자게 놔두지 마.”
“자는 모습이 귀엽지 않다면 고려해 보죠.”
“……저기, 가르엘.”
밤사이 약해진 모닥불의 불씨를 비벼 끄던 가르엘이 카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카델은 푹 자고 깨어난 사람답지 않은 불편한 얼굴로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밤사이에 뭐, 이상한 게 찾아오거나 하진 않았지?”
“이상한 거라면?”
“그냥 짐승이라든가, 마물이라든가…….”
“없었습니다. 놀라울 정도로 평화로웠어요.”
“……사람은? 사람은 없었어?”
가르엘이 고개를 가로젓자, 카델은 무언가 미심쩍다는 듯 푹 한숨을 내쉬었다. 걸리는 것이라도 있는 건가. 물어보려 했으나, 카델이 먼저 선수를 쳤다.
“별일 없었으면 됐어.”
서둘러 태연함을 가장하는 카델의 모습에, 가르엘은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 말았다.
둘째 날의 산행은 첫날보다 고되지 않았다. 여전히 경사는 가팔랐으나, 바위로 가득했던 초입과는 달리 평지가 많았기 때문이다.
기사단은 영양가 없는 대화나 농담을 주고받으며 산행의 피로를 떨쳐 내려 노력했는데, 그중 가장 효과가 좋은 것은 바로 적룡에 관한 이야기였다.
“만약 산 정상에서 적룡을 만나게 된다면 다들 어떻게 할 겁니까?”
가르엘이 어김없이 물통을 가득 채운 술을 홀짝이며 묻자, 반은 생각할 가치도 없다는 듯 빠르게 답했다.
“단장을 들고 튈 겁니다.”
“뭐, 어느 정도 예상했던 반응이군요. 루멘 경은요?”
“마찬가지겠죠.”
“……이런. 그럼 라이돈 경은?”
“흠? 싸워 보겠지. 용의 브레스가 센지 내 마법이 센지 궁금하잖아.”
라이돈은 상상만으로도 기대된다는 듯 눈을 빛내며 웃었다. 가르엘 또한 다들 속이 투명해서 좋다며 시원스럽게 웃어 젖혔다. 고개를 돌린 그가 마지막으로 카델에게 질문했다.
“단장님은요?”
“일단 저 두 놈이 날 들고 튀지 못하게 막아야겠지. 라이돈의 공격도 제지하고.”
“그다음은?”
“얘기를… 해 볼까 하는데.”
“오, 신선한 대답이네요. 기록에도 적룡이 인간의 언어를 할 수 있다는 얘기가 있었습니다. 가능하다면 시도해 보는 게 좋긴 하겠어요.”
게임 속 적룡은 인자한 할아버지에 가까운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같은 세계에 빙의한 것이니 적룡의 성향도 여전하지 않을까. 따스한 적룡과 안면을 튼다면, 적어도 손해 보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다, 문득 떠오르는 꿈의 기억에 작게 인상을 썼다.
‘그놈은 대체 뭐였을까.’
시스템의 오류를 파고든 바이러스? 아니면, 오류를 만들어 낸 원인? 뭐가 됐든 심상치 않은 존재임이 확실했다.
되도록 다시 만나는 일 없이 끝났으면 좋겠는데. 카델은 아직도 두통이 느껴지는 듯한 관자놀이를 꾹꾹 압박하며 앞선 부하들을 뒤따랐다.
정상을 코앞에 두고, 기사단은 폭포를 경치 삼아 휴식 시간을 보냈다. 서서히 해가 지고 있었으므로, 오늘은 이쯤에서 야영을 할 계획이었다.
카델은 널찍한 바위에 걸터앉아 한참을 폭포만 바라보았다. 가파른 암벽을 가로지르며 떨어지는 거품 섞인 폭포수가 주위의 모든 잡음을 삼켜 냈다. 귀가 청소되는 듯한 강렬한 물소리에 집중하다, 몸을 뒤로 눕혔다.
바위에 닿은 등이 딱딱하게 배겼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게 잠시 눈을 감고 있으려니, 누군가 옆으로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단장, 야영 준비 끝났어요. 일어나세요.”
“……조금만 더 누워 있을래. 여기 시원해서 좋다.”
“그럴래요?”
간신히 한쪽 눈을 뜨자 옆자리를 차지한 반의 등이 보였다. 그가 옆을 지키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묘하게 안심이 되는 듯해, 카델은 설핏 미소 지으며 다시 눈을 감았다.
산행은 고되었으나, 마족과의 전투가 없는 모험은 카델의 마음 한구석을 간질거리게 했다. 동료들과 소소한 잡담을 나누고, 미지의 장소를 탐험하고, 서로에게 의지하는 것. 어린 시절에나 꿈꿔 보았던 이상적인 모험이었기에, 카델은 이대로 이 편안한 나날이 이어지기를 소망했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이 세계는 그의 평온을 바라지 않는 듯했다.
“……단장.”
반의 손길이 카델을 급하게 흔들어 깨웠다. 카델이 의아한 표정으로 눈을 뜨자, 예고 없이 다가온 어둠이 대지를 온통 뒤덮었다.
“뭐야?”
잠깐 눈만 감고 있었다고 생각했건만, 그새 잠이라도 들었던 걸까. 난데없이 어두워진 시야에 당황하는 카델의 옆에서 반이 하늘을 가리켰다. 그의 손을 따라 움직인 시선의 끝으로, 카델은 바랐으나 부하들은 바라지 않았던 존재가 들어찼다.
“적룡…….”
해가 진 것이 아니었다. 갑작스레 내려앉은 어둠은 다름 아닌 적룡의 그림자였다. 놈의 몸뚱이는 그들이 올려다보는 하늘을 모조리 가릴 만큼 거대했던 것이다.
너무도 큰 탓에 적룡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집채보다 큰 날개를 펄럭일 때마다 몰아치는 바람에 머리가 제멋대로 헝클어졌다. 어둠에 잠긴 시야로 볼 수 있는 것이라곤 불꽃처럼 이글거리는 붉은 비늘과 그림자 속에서도 유독 도드라지는 에메랄드빛 눈동자뿐이었다.
카델과 반은 물론 야영지에 있던 나머지 단원들까지. 적룡의 웅장한 자태에 압도되어 함부로 행동하지 못했다.
‘적룡을 만나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은 했지만, 진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게다가 이렇게 직접 실물을 보게 되니 안 만나는 게 나았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만큼 적룡의 등장은 위협적이었고, 그의 목적을 알지 못했기에 이쪽을 향한 시선이 적의인지 호기심인지조차 분별할 수 없었다.
모두가 침을 삼키며 적룡의 움직임에 주시했다. 상대가 먼저 움직이기 전에 섣부르게 행동해선 안 된다는 본능적인 직감에 의한 것이었다.
그들의 경직된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적룡은 폭포와 이어진 강 위로 하강했다. 적룡이 우아하게 날개를 펄럭이며 내려앉자, 땅이 크게 진동하며 사방으로 물이 튀었다.
카델은 전신에 끼얹어진 강물에 인상을 쓰며 얼굴의 물기를 훔쳤다. 그리고 다음 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