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7화 (217/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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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린 기사단은 날이 밝는 대로 곧장 행동을 개시했다. 그들이 선택한 루트는 ‘베릴 산’을 넘어 둥켈하이로 가는 것이었는데, 새벽같이 카델을 찾아온 루멘의 의견이었다.

봉우리가 높은 편이긴 하지만 최고봉까지는 아니고, 적룡의 출몰 기록이 가장 적었던 산. 카델은 최고봉이 아니라는 부분에 주목하며 기쁘게 의견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가 한 가지 간과한 사실이 있었는데, 베릴 산이 고요의 산맥의 최고봉이든 아니든. 카델의 체력은 혹독한 등산을 버텨 내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이렇게 매번 고생하면 기초 체력 정도는 늘어날 법하지 않아? 내가 많은 거 바래? 적어도 고작 산 초입에 숨넘어갈 사람처럼 헐떡대진 말아야지.’

죽을상을 한 카델이 어떻게든 거친 숨소리를 참아 보려 입술을 깨물었다. 다른 부하들은 전부 산책이라도 나온 것처럼 평온하기만 한데, 자신만 백 살 먹은 노인처럼 바들거리는 꼴이 부끄러웠다.

“많이 힘들어 보이는데.”

바득바득 이를 갈며 버텼으나, 오히려 그 모습이 더 눈에 띈 모양이었다. 루멘은 최후방을 차지한 카델의 힘겨운 사투를 지켜보며 걸음을 늦췄다.

“안 힘들어. 거뜬해.”

“숨소리가 트롤급이야, 대장.”

“그건 네 귀가 쓸데없이 밝아서…… 아, 됐어. 말 시키지 마.”

목소리를 내는 것조차 벅찼다. 카델이 짜증스레 손을 내젓자, 루멘이 피식 웃으며 카델의 뒤로 내려왔다. 그러고는 한 손으로 카델의 등을 짚고 밀어 주기 시작했다.

“……뭐야. 필요 없어.”

“이렇게 느려서 어느 세월에 산 넘게. 난 브레스 맞고 죽을 생각 없거든.”

자존심이 상해 그의 친절을 뿌리치려 했으나, 그러기엔 너무도 편안한 손길이었다. 걷는 힘이 절반으로 축소되니 그제야 살맛이 났다.

결국 카델은 모두의 안전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배려를 받아들이겠다며 은근슬쩍 루멘의 손에 몸을 기댔다. 뒤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는 무시했다.

아침 일찍부터 시작된 산행이었으나, 해가 저물 때까지 고작 중턱밖에 오르지 못했다. 경사가 험했고, 길이 끊겨 낭떠러지를 돌아가야 하는 등 변수가 너무도 많았기 때문이다.

“주변이 온통 경사로예요. 바위도 날카롭고.”

루멘과 함께 야영할 만한 곳을 찾아다니던 가르엘이 설설 고개를 저으며 동료들이 모인 나무 아래에 짐을 던져두었다.

“오늘은 그냥 여기서 묵죠. 마음 같아선 더 돌아보고 싶은데, 우리 단장님의 상태가 영……. 좋지 못하니까.”

가르엘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반의 등에 업힌 채 미역처럼 축 늘어진 카델이 있었다. 산을 오르는 내내 루멘이 등을 밀어 주고, 라이돈과 비행하며 체력 소모를 최소화했으나, 평균적인 지형이 험해서인지 그는 평소보다 쉽게 지쳤다.

카델은 반의 어깨에 묻고 있던 고개를 들어 힘없이 중얼거렸다.

“미안하다, 얘들아……. 내가 진짜, 여기만 내려가면 꼭 운동을 시작할게.”

자신을 챙기느라 배는 지쳤을 부하들을 볼 면목이 없었다. 카델의 우울한 다짐에 그를 편안하게 고쳐 업은 반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운동 도와드릴게요, 단장.”

“……고맙다.”

그나마 평평한 바닥에 짐을 풀고, 모닥불을 피웠다. 카델은 음식이고 뭐고 전부 마다한 채 바닥에 드러누워 눈을 감았다. 놀랍도록 지친 탓에 턱을 움직여 음식을 씹을 기력조차 없었다. 보다 못한 라이돈이 제 몫으로 챙겨 온 초콜릿을 억지로 입 안에 밀어 넣은 후에야 겨우 혀를 굴릴 뿐이었다.

그렇게 녹초가 된 카델이 무기력하게 뻗어 있을 무렵. 나머지 부하들은 이어질 산행을 위해 무기를 점검하거나, 육포와 빵을 뜯으며 체력을 보충했다.

“한 명씩 교대로 보초를 서죠. 저부터 시작할 테니, 두 시간 간격으로 바꿉시다.”

가르엘이 말하자 카델의 옆자리에서 사탕을 녹여 먹던 라이돈이 손을 흔들었다.

“내가 제일 마지막에 할래.”

“그러시죠. 두 분은요?”

“두 번째로.”

가르엘과 반이 첫 번째와 두 번째, 라이돈이 마지막을 차지했으니, 루멘은 자연스럽게 세 번째를 맡게 됐다. 묵묵히 받아들였으나, 그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자신이 깨워 봤자 다음 차례인 라이돈은 깨어나지 않을 것이고, 자연스럽게 날이 밝을 때까지 홀로 보초를 서게 되리란 걸. 그 점을 지적하기도 귀찮아 루멘은 라이돈을 한번 흘기고 말았다.

날이 밝는 대로 움직여야 했으므로 취침은 빨랐다. 기사단은 잠이 오든 오지 않든 억지로라도 눈을 감았다. 가르엘만이 따뜻한 불 앞에서 사위를 경계했다.

나뭇가지로 모닥불을 들쑤시던 그가 눈을 굴려 카델을 보았다. 곤히 잠든 카델의 얼굴 위로 주홍빛 불빛이 부드러운 음영을 남기며 일렁였다.

‘그새 잠들었네.’

카델의 체력 수준을 몰랐던 가르엘로서는 그의 탈진이 제법 충격적이긴 했으나, 그런 점조차 귀엽기만 했다. 그 허약한 모습이 되레 가련하게 느껴졌으니. 콩깍지가 단단히 씐 듯했다.

“……무서운 얼굴이라니까.”

한쪽 입꼬리를 끌어당긴 그가 피식 웃으며 다시 모닥불을 뒤적였다.

가르엘은 카델이 꿈도 꾸지 않는 깊은 잠에 빠졌으리라 생각했다. 찌푸림 하나 없이 평온한 얼굴이었으니까.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다.

카델은 빙의된 이래 처음으로, ‘무의식 상태’에 돌입하지 않았다. 그는 시스템을 무시한 채 비정상적인 꿈속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카델의 밤은 언제나 한결같았다. 몰려오는 잠기운을 이기지 못해 까무룩 잠이 들면, 시스템은 그를 ‘무의식 상태’로 진입시켰다. 그곳에서 호감도에 따른 단원들의 스토리 감상을 모조리 스킵하면, 그 이후는 완전히 암전이다.

꿈이랄 것도 없이 푹 자고 깨어나는 것이다. 딱히 아쉬움은 없었고, 오히려 원래 세계의 일들을 되새길 일이 없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번은 달랐다. 그는 무의식에 진입했다는 시스템 창도 없이, 누군가 발목을 잡아당기는 듯한 강한 인력을 느끼며 속절없이 의식을 잃었다.

깨어나니 보이는 것은 누군가의 과거도 자신의 기억도 아닌, 난데없이 펼쳐진 호수였다. 대낮의 호수는 물결마다 빛을 머금은 채 반짝였고, 수면 위로 주변을 감싼 나무와 수풀의 그림자가 아른거렸다.

‘꿈…인가? 내가 꿈을 꾸고 있다고…?’

낯선 감각이었다. 물론 꿈을 꾼다는 것 자체가 오랜만이긴 했지만, 이것은 평범한 꿈과는 달랐다. 마치 자각몽처럼 정신이 또렷했고, 몸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카델은 기이할 만큼 분명한 오감을 느끼며 호숫가를 거닐었다.

‘뜨는 시스템 창도 없고……. 뭐지. 의심스러운데.’

시스템의 오류 정도로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카델은 왠지 모를 싸함을 느꼈다. 봐서는 안 될 것을 본 사람처럼 자꾸만 긴장됐다.

한참 호숫가를 서성이던 카델의 걸음이 멈춘 것은 맞은편의 한 남자를 발견했을 때였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기척도 없이 나타난 남자는, 자리에 멈춰 선 채 카델을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기다란 적색의 머리칼. 불꽃처럼 강렬한 존재감을 뽐내는 머리칼은 긴 기장임에도 엉긴 부분 없이 비단처럼 윤기가 흘렀다. 그리고 카델은 그제야, 자신이 있는 호숫가에 바람 한 점 불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기묘한 영혼이군.”

거리가 벌어져 있음에도 남자의 음성이 또렷하게 들려왔다. 묵직하면서도 거친 느낌이었고, 동시에 미성과도 같은 부드러운 음역을 가졌다. 한마디로 설명이 불가한, 그야말로 기묘한 목소리였다.

남자가 다가오지 않았기에 카델이 먼저 발을 뻗었다. 남자는 카델이 제 앞까지 다가오는 동안에도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당신이 날 여기로 부른 겁니까?”

카델의 물음에 남자는 비스듬히 입꼬리를 올리며 가소롭다는 듯 미소 지었다. 꽤 재수 없는 표정이었으나, 가까이서 본 남자의 얼굴에선 그런 표정조차 찰떡같이 어울릴 만큼 고귀한 분위기가 풍겼다.

장발임에도 여리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만큼 큼직한 골격의 소유자였다. 카델보다 한참은 키가 커서, 바짝 고개를 치켜들어야 겨우 얼굴을 볼 수 있을 정도였다. 타는 듯한 머리칼과는 달리 눈동자는 부드러운 녹빛을 띠고 있었는데, 단언컨대 카델이 살면서 본 녹색 중 가장 신묘하며 아름다운 빛깔이었다.

삼라를 품은 눈동자가 이런 색깔일까. 여러 채도의 녹색이 다채롭게 어우러진 눈동자는 스치듯 보는 것만으로도 넋을 빼앗길 만큼 신비로웠다. 뿐만 아니라 투명할 정도로 깨끗한 피부나 주름 하나 없이 매끈한 입술, 끝이 뾰족하고 날렵하게 뻗은 콧대, 군더더기 없이 완벽한 얼굴 윤곽은 도통 사람처럼 보이지가 않았다. 사람보다는 어딘가의 웅장한 조각상처럼 느껴졌다.

‘이제는 사람 얼굴에 좀 무뎌졌나 했더니.’

그의 부하들과는 또 다른 느낌의 미남이었다. 그저 미남으로 치부해도 되는 걸까, 고민이 될 정도로.

만약 카델이 하루가 멀다 하고 빛이 나게 잘난 미남들의 틈에 끼어 살지 않았더라면, 지금 이 순간 바보처럼 얼을 빼고 있었을지 몰랐다.

“당신이 부른 게 아니라면 난 왜 여기 있죠? 이것도 모릅니까?”

“궁금한 것이 많구나.”

“이 상황에 궁금한 게 없는 것도 이상할 것 같은데요.”

“그저 꿈이라 치부하면 될 일이거늘.”

꿈을 꾸지 않는 몸이라 그랬다. 남자는 곤란해하는 카델의 얼굴을 탐색하듯 훑어보더니, 기다란 검지를 뻗어 카델의 미간을 짚었다.

“뭐 하는—”

그러자 돌연, 몸을 통째로 꿰뚫는 듯한 아찔한 통각이 느껴졌다. 생경하고도 숨 막히는 감각에 가슴이 부풀며 눈이 크게 벌어졌다.

몸속 혈관 사이사이로 얄팍한 전류가 흐르는 것처럼 고통의 틈새에서 간지러운 자극이 느껴졌다. 카델은 반사적으로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마력을 끌어 올렸으나, 소용없었다. 체내에선 아무 힘도 느껴지지 않았다.

“큭… 그, 그만…!”

겨우 다리를 움직인 카델이 주춤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남자의 손가락이 떨어졌음에도 고통은 여전했다. 카델은 점점 심해지는 두통에 머리를 감싼 채 원망스럽게 남자를 노려보았다.

“나한테 뭘, 한 거야…!”

사나운 시선에도 남자는 아무렇지 않게 코웃음을 쳤다. 여유롭게 팔짱까지 낀 채 비틀거리는 카델을 지켜보던 그는, 묘한 불쾌함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 몸이야말로 궁금하군.”

그와 동시에, 지금껏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시스템 창이 연속적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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