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6화 (216/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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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5일 동안 이어진 항해가 마무리되며, 기사단은 스니벡 공국에 입항했다. 고요의 산맥은 스니벡 공국과 둥켈하이 왕국을 가르는 국경선이기도 했으므로, 산맥을 넘기 전에 스니벡 공국에 들러 채비를 할 계획이었다.

여관에 들러 객실을 예약하고, 다음 날 아침까지 자율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카델은 그대로 침대에 뻗은 채 숙면을 취하다 아침을 맞이할 생각이었으나, 갑작스레 찾아온 가르엘이 달콤한 계획을 망쳐 놓았다.

“술 정도는 다른 부하들이랑 마셔도 되잖아.”

“물론 물어봤죠. 하지만 반 경은 문전박대했고, 루멘 경은 경멸의 눈길을 보냈고, 라이돈 경은…… 아, 재생 능력만 아니었다면 엄청난 동상의 흔적을 보여 드릴 수 있었을 텐데. 어쨌든, 전부 거절당했습니다.”

넉살 좋게 웃은 가르엘이 가면 대신 착용한 안대의 위치를 바로잡았다. 가르엘은 유명한 성기사였으나, 외국의 일반인들에게까지 얼굴이 알려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후드에 가면까지 꾸역꾸역 눌러쓴 쪽이 더 수상해 보이니. 다른 기사들과 협업이라도 하지 않는 한, 이런 곳에서까지 정체를 숨길 이유는 없었다.

가르엘은 카델을 끌고 ‘설원의 주전자’라는 주점에 들어갔다. 북부에 위치한 나라답게 전부 도수가 센 술이었고, 따뜻하게 마시는 술도 판매하고 있었다. 카델은 그다지 술이 당기지 않았지만, 걸어오는 동안 몸이 얼었기에 핫 토디를 한 잔 주문했다.

술을 기다리는 동안 가르엘이 먼저 대화를 시도했다.

“흑마법은 언제 배운 거예요?”

“배운 적 없어. 앞으로 배울 예정인 거지.”

“……그게 가능한가?”

“말했잖아. 난 끝이 정해진 삶을 살고 있다고. 그 정도 특별한 운명이면 이런 것도 가능해.”

일일이 변명을 지어내기도 귀찮아 담백하게 말하자 가르엘이 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 건지 가늠이 안 가네.”

“너한텐 거짓말 안 해. 서로 밑천까지 다 드러낸 판에, 꾸며 봤자 번거롭기만 하지.”

카델은 테이블을 톡톡 두들기며 바삐 움직이는 점원의 모습을 좇았다. 가르엘은 그런 카델을 바라보며 혀로 느리게 입술을 축였다.

“보통은 꾸며 내야 매력적인 법인데. 내 단장님은 솔직할수록 끌린단 말이야.”

[기사 ‘가르엘 몬자시’의 호감도가 2 상승했습니다.]

[현재 호감도: 68/100]

뜬금없이 떠오르는 시스템 창에 카델이 진심으로 대단하다는 듯 헛웃음을 뱉었다. 이전에도 본인이 헛소리할 때마다 일일이 호감도가 올랐던 거라면, 입단과 동시에 높은 수치를 보인 것도 이해가 갔다.

“……참 꾸준한 인간이네.”

“한결같은 남자는 별롭니까? 제법 인기가 많다고 들었는데.”

누구에게서 들은 건진 몰라도 이런 식의 한결같음을 말하는 건 아니었을 거다. 핀잔을 줘 봤자 전혀 타격받지 않을 것이 뻔했기에, 카델은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따뜻한 술이라서인지 취기도 더 빠르게 도는 듯했다. 카델은 점점 데워지는 몸을 느끼며 뜨끈한 목을 쓸어내렸다. 그의 시선이 벌써 다섯 잔을 비우고 있는 가르엘을 향했다. 가르엘은 안주로 시킨 통닭은 건드리지도 않은 채 오로지 술만 마셨다. 안주를 먹으면 술맛이 흐려진다는 이유에서였다.

“적당히 마시고 일어나자. 내일 가야 할 곳이 어딘지 잊은 건 아니지?”

“음, 걱정 마요. 내일이 되면 단장님보다 상쾌한 아침을 맞이할 테니.”

“……부럽다고 하면 무례한 건가?”

“화가 나서 덮쳐 버릴지도 모릅니다.”

눈썹을 까딱이며 짐짓 엄한 표정을 짓는 가르엘에, 카델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는 거의 다 마신 술잔을 앞으로 밀어 내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자신에겐 숙취를 해결해 줄 마기가 없으니, 내일을 위해 몸 보전을 해 둬야 했다.

그렇게 부하의 지독한 음주가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동안, 뜻밖의 흥미로운 이야기가 들려왔다.

“그자가 둥켈하이에 돌아왔다더군.”

“그자?”

“‘영면影面의 사자’ 말일세. 벌써 몇 명이 죽어 나갔다나 봐. 원한 살 만한 귀족들은 밤잠을 못 이루고 있다지. 호위랍시고 여기저기서 사람을 끌어오는 모양이던데.”

“흐흐, 진짜 영면의 사자면 그쪽 그림자 기사단이 호위를 맡아도 죽을걸.”

영면의 사자. 익숙한 이명에 반쯤 감겨있던 카델의 눈이 크게 뜨였다.

‘영면의 사자라면, 요젠의 이명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역시 처음부터 둥켈하이에 있었던 건 아니었나 보네. 서둘러야겠어.’

요젠의 출신지는 둥켈하이였으나, 그는 한곳에 머무르는 자가 아니었다. 암살자의 특성상 한 곳에 뿌리를 내리는 일은 잘 없으니.

이야기를 듣던 카델은 문득 떠오르는 기억에 멍하니 입술을 잘근거렸다.

“돈은 필요 없어. 대신 네 얼굴을 기억할게.”

얼굴을 기억한다는 건 무슨 의미였을까. 어차피 카델이야 이미 요젠의 얼굴을 알고 있으니 쌍방이라 쳐도, 다른 사람이었다면 일방적으로 얼굴을 알리게 된 셈이었다.

묘하게 찜찜한 의문은, 예상치 못한 인물의 도움으로 해소되었다.

“유명하죠, 영면의 사자. 저도 몇 번 들어 본 적 있습니다.”

언제부터 같이 듣고 있었던 건지, 가르엘이 자연스럽게 운을 뗐다.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카델을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유명한가?”

“그럼요. 아직까지 그 누구도 얼굴을 보지 못한 암살자가 아닙니까. 본 사람을 전부 죽이는 건지, 정말 아무에게도 얼굴을 보여 주지 않은 건지는 몰라도.”

“……그래?”

그렇다면 얼굴을 본 사람을 전부 죽였기 때문일 것이다. 끝까지 눈을 뜨지 말라고 했던 건 아무래도 그런 의미였겠지. 지난 일임에도 괜스레 소름이 돋았다.

“대단한 자예요. 그렇게 많은 귀족, 심지어 왕족까지 암살했는데도 여전히 명성을 유지하며 살고 있다니. 그자에게 의뢰를 넣은 사람들의 뒷배가 작용했을지도 모르지만, 그 끈질긴 추격을 피하며 살아남았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하죠.”

“귀족만 골라 죽인다는 말이야?”

“엄밀히 말하자면 쓰레기 같은 귀족을 죽여요. 기준은 그자만이 알겠지만, 보통 인망 없는 귀족을 노려서, 평민들 사이에선 제법 인기가 좋다고 들었어요.”

의적 같은 느낌인 걸까. 카델은 성능 외에는 일말의 관심도 없던 요젠의 새로운 정보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나 이어진 가르엘의 말은, 카델의 심장을 나락으로 떨어뜨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림자처럼 기척 없는 손길이 얼굴을 더듬는대요.”

“……응?”

“주변을 둘러봐도 아무도 보이지 않고, 얼굴에 닿았던 손의 감촉만이 선명하죠. 그게 그자가 남기는 일종의 낙인이라고 해요. 그렇게 얼굴을 기억한 자는, 언제 어디에 있어도 자기 손에 죽을 수 있다는.”

“…….”

“꽤 유혹적인 낙인 아닌가요? 한 번쯤 만나 보고 싶은 인물이란 말이죠.”

가르엘은 즐겁다는 듯 웃었으나, 카델은 전혀 웃을 수 없었다. 자꾸만 어딘가에서 한기가 끼쳐 오는 듯 몸이 서늘해지기까지 했다. 은은하게 돌던 취기도 가신 지 오래였다.

‘그런… 설정이 있었어…?’

그 기묘한 얼굴 만지기가 사실은 죽음의 낙인이었다니. 언제고 수틀리면 찾아와 죽이겠다는 협박이었다니. 카델은 진심으로 요젠의 영입을 망설이기 시작했다.

‘괜히 눈에 띄었다가 비명횡사하는 거 아니야? 지금이라도 포기하는 건…….’

잠시 고민하던 카델이 거칠게 머리를 털었다.

‘아니야. 그런 거라면 오히려 아군으로 옆에 두는 게 마음 편해. 자기편이면 안 죽일 거 아니야.’

……안 죽이겠지?

결국 차오르는 불안감을 버티지 못한 카델이 가르엘이 마시던 술잔을 낚아채 목구멍으로 들이부었다. 제정신으론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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