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4화 (214/521)

“명예롭고 긍지 높던 그의 영혼은 이 땅을 떠났으나, 신의 곁에서 평온한 투쟁을 이어 가리라.”

관을 중심으로 좌우에 도열한 황혼 기사단의 검끝이 하늘을 가리켰다. 뻗치는 빛줄기가 고요한 함성처럼 상공을 가로지르고. 경건한 분위기 속에서, 카델은 뚜껑 열린 관을 바라보았다.

다른 이들의 눈에는 관 속에 가지런히 누운 가르엘의 시체가 보일 테지만, 카델의 눈에는 가르엘의 무게와 엇비슷한 바위가 보일 뿐이었다. 진짜 가르엘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있을 테다.

“숭고한 영혼에 세보의 손길이 함께하기를.”

대사제가 축복을 내리자 장례식에 참석한 손님들이 하나둘씩 일어나 관 안으로 꽃송이를 던져 넣었다. 적린 기사단이라고 다르진 않았다. 그들은 지저분한 돌덩이 위에 꽃을 올려 두며 드디어 이 연극의 막이 내렸음을 실감했다.

카델은 새롭게 단장이 된 모들렌에게 가볍게 묵례했다. 그 역시 옅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숙이고는 카델에게 악수를 청했다.

“곧바로 인테 설원으로 떠나신다 들었습니다. 무운을 빌죠.”

단단한 손을 마주 잡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모들렌은 어깨를 반듯하게 펴며 비장한 어투로 말했다.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뛰어난 기사단이 될 겁니다. 그러니 죄책감이나 동정심을 품지 않으셨으면 좋겠군요.”

“……새겨 두죠.”

모들렌이 그에게 주어진 시련을 이겨 낼 것임을 의심치 않았다. 마지막 인사를 마친 카델이 부하들을 남겨 둔 채 가르엘을 찾아나섰다.

그는 묘지를 둘러싼 나무 사이에서 누가 봐도 수상한 차림새를 하고 있었는데, 푹 눌러쓴 후드는 둘째 치고 화려하기 짝이 없는 가면이 참으로 볼만했다.

유려한 곡선으로 왼쪽 눈과 광대뼈를 가로지른 검은색 가면에는 눈가를 뒤덮은 은색의 장미가 그려져 있었다. 대체 무엇으로 그려 넣은 것인지, 장미는 햇빛 아래에서 과할 정도로 반짝이고 있었다. 카델은 자신을 반기는 가르엘을 향해 딱 한 마디를 던졌다.

“촌스럽습니다.”

“하하, 어쩔 수 없었어요. 마음 놓고 가면을 고를 시간이 없었거든요. 어쨌든 가면 아래는 고급스러우니, 그걸로 된 거 아닙니까?”

카델이 질색하며 고개를 가로젓자 가르엘은 쾌활한 웃음소리를 냈다.

‘환상의 날개만 제대로 작동했어도 훨씬 편했을 텐데 말이지.’

가르엘을 완전히 죽은 사람으로 만들었으니, 남은 것은 그가 눈에 띄지 않도록 겉모습을 바꾸거나 가리는 일이었다. 그 문제에 대해 카델은 자연스럽게 [환상의 날개]를 떠올렸으나, 안타깝게도 가르엘에게는 아티팩트의 힘이 통하지 않았다.

‘그게 요정에 한해서만 작동하는 건 줄 누가 알았겠냐고.’

하이론의 부가 설명이 없었기에 당연히 제약 없는 아티팩트인 줄 알았다. 하지만 환상의 날개를 착용한 가르엘의 외형에는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반과 루멘도 마찬가지로, 오로지 라이돈의 외형만이 변화에 성공했다.

결국 가르엘은 온몸을 꽁꽁 싸맨 채 정직하게 정체를 숨겨야만 했다. 좀 더 완벽한 분장을 원했던 카델에겐 아쉬운 일이었으나, 가르엘은 나름대로 만족하는 듯했다.

“이제 배를 타러 가야 하는 거죠?”

“네. 인테 설원 봉인 관리에는 저희 기사단만 투입될 테니, 거기에선 갑갑하게 있지 않아도 될 겁니다.”

“기대되네요. 새로운 동료들과의 새로운 모험이라니.”

가면 아래 드러난 가르엘의 입꼬리가 시원스럽게 올라갔다. 그 밝은 미소와 함께, 카델의 눈앞으로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축하드립니다. S급 기사 ‘가르엘 몬자시’ 영입 완료!]

[현재 기사단 코스트: 18/25]

“잘 부탁합니다, 단장님.”

능청스럽게 경례 자세를 취하는 가르엘의 모습에, 카델 역시 비스듬히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그래. 이제 말 편하게 해도 되지? 동료잖아.”

“이런. 여기서 가슴 떨리는 전 변태인 걸까요?”

“넌 항상 변태였어. 남들 앞에서는 변태 가면으로 부르면 되겠네.”

“좋습니다. 이름값 한번 충실하게 해 보죠.”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결국 가르엘은 무사히 입단을 마쳤다. 변화한 자신의 마음처럼, 가르엘의 우울함에도 따뜻한 온기가 얹어지기를 바라며. 카델은 떨어진 부하들을 불러 모았다.

*

이곳에 온 뒤 두 번째로 승선하는 배였다. 다닐라 왕이 신경 써 준 덕에 이번에는 널찍한 선실과 편안한 항해를 위한 최소한의 선원, 탁 트인 전경을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카델은 그 모든 것을 뒤로한 채, 새로운 동료의 새로운 컨셉에 대한 일장연설을 하기 바빴다.

“가르엘은 흑마법을 다루는 마검사야. 흑마술사 집단에 소속되어 있다가, 그들의 잔인한 행태에 질려 도망쳐 나온 거지. 그걸 용병 시절의 내가 우연히 구해 줘 이어진 인연이 어찌저찌 다시 닿아서 합류하게 된 거고. 얼굴을 가리는 건 과거 도망자 시절의 습관이랄까……. 얼굴 드러내기를 극도로 꺼리는 예민한 성격이라고 하자. 어때. 완벽하지?”

카델이 선실에 둘러앉은 부하들을 돌아보며 묻자, 누구보다 빠르게 손뼉을 친 반이 자신의 완벽한 단장을 추켜세웠다. 라이돈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카델의 얼굴만 빤히 들여다보았고, 루멘은 턱을 쓸며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당사자인 가르엘만이 의견을 내었다.

“설명하는 얼굴이 귀여우니 완벽하다고 말하고 싶지만요. 안타깝게도 전 흑마법을 다루지 못한답니다, 카델…… 단장님.”

“괜찮아. 내가 다룰 수 있으니까.”

“……그건 예상하지 못했네요.”

카델의 자신만만한 표정에 부하들의 놀란 시선이 모여들었다.

어차피 숨길래야 숨길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의 손에는 [순환의 물약] 들렸고, 이전과 똑같은 속성을 그대로 찍을 생각이 없었으니. 다루는 속성이 달라지는 건 예정된 일이었다.

“대장이 흑마법…까지 사용할 수 있는 줄은 몰랐는데.”

“언제부터 쓸 수 있었던 거예요, 단장…?”

“그럼 4속성 마법사인 거야? 대단한데!”

여태껏 카델이 흑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것이 꽤나 충격적인지, 순수하게 감탄하는 라이돈과는 달리 반과 루멘의 표정은 썩 좋지 못했다. 카델은 그런 그들을 위해 명쾌한 설명을 덧붙였다.

“배우면 다 해. 여태껏 필요를 못 느꼈을 뿐이지.”

난 세기의 천재니까.

당당하고도 뻔뻔한 발언이었음에도 그 누구도 반박하지 못했다. 카델이 시스템의 구조를 구구절절 설명해 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그들은 그저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럼 다들 그렇게 알아 두는 걸로. 앞으로 우리 목숨을 관리해 줄 귀한 치유사니까, 비밀 유지 정도는 이쪽에서 도와주자고. 알겠지?”

부하들의 떨떠름한 동의를 얻어 낸 카델이 다시금 말을 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우린 인테 설원까지 최단 거리로 이동할 거야.”

“최단 거리라는 건…?”

가르엘이 묻자 카델은 들고 있던 지도를 펼쳐 들었다. 그의 손끝이 인테 설원과 가장 인접한 국가인 둥켈하이 왕국을 가리켰다.

“둥켈하이를 가로질러 일직선으로 이동한다.”

“그다지 좋지 못한 생각 같은데.”

반박은 루멘의 몫이었다. 그는 진심으로 꺼려진다는 듯 미간을 모으며 지도를 가리켰다.

“조금 돌아가더라도 스니벡 공국을 통해 가는 게 나아. 둥켈하이에 들어가려면 왕국을 둘러싸고 있는 산맥을 넘어야 한다고.”

“나도 알아.”

“……저 산맥이 뭐라고 불리는 지도 알아?”

루멘의 물음에 대답한 이는 반이었다.

“적룡의 둥지를 무사히 넘을 수 있는 건 훈련된 암살자뿐이라고 들었어요, 단장. 제가 생각하기에도 너무 위험한 것 같은데요.”

적룡의 둥지. 둥켈하이의 삼면을 둘러싼 산맥의 또다른 이름이었다. 둥켈하이의 폐쇄적인 분위기에 가장 큰 기여를 한 존재이기도 했다.

진짜 이름은 ‘고요의 산맥’으로, 오로지 ‘고요함’을 통해서만 적룡의 화를 면할 수 있다는 데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실제로 산맥을 넘는 모든 이들이 적룡을 마주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 마주칠지 몰랐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산맥을 넘을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오래 전엔 둥켈하이를 침략하려던 슬라우스라는 왕국의 군단이 산맥을 넘던 도중 몰살당했다죠. 기록된 것 중 가장 단기간에 이루어진 대규모 학살이었다던데. 뭐, 그 후로는 적룡이 깨어났다는 소식을 들어 본 적이 없긴 하네요.”

“산맥을 넘는 사람이 없으니 소식도 없겠죠.”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는 가르엘을 싸늘하게 흘긴 루멘이 다시 카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난 반대야. 스니벡 공국으로 돌아가는 동안 인테 설원의 봉인이 깨지는 한이 있더라도, 적룡의 둥지는 넘지 않는 게 맞아.”

루멘의 입장은 단호했고, 다른 부하들 역시 굳이 위험을 무릅쓰며 고요의 산맥을 넘어야 하는 이유를 납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부하들의 중심에서, 카델은 조용히 당황하는 중이었다.

‘이 산맥이 그렇게 흉흉한 곳이었어…?’

적룡이 사는 장소라는 건 알았다. 그곳이 퀘스트를 진행하는 스테이지라서는 아니었고, 게임 내 대부분의 이벤트가 ‘고요의 산맥에 사는 적룡’에게서 시작됐기 때문이다.

‘게임에선 플레이어에게 불가사의한 현상의 원인을 설명해 주는 정보통 느낌이었는데. 대량 학살까지 하는 용이었단 말이야?’

게임 속에서 보아 왔던 적룡은 제법 친근한 분위기를 풍겼기에, 카델은 산맥을 넘는 데에 긴 고민을 하지 않았다. 적룡이 자신들을 해치지 않으리란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거대하고 인자한 용을 실물로 볼 생각에 되레 설레기까지 했었다.

예상 밖의 난관이다. 여기서 자신이 ‘그 용, 생각보다 착할지도 몰라’라고 떠들어 봤자 설득력은 전혀 없을 테다.

‘그렇지만 둥켈하이에 들리지 못하면 요젠을 만날 수 없는데…….’

카델이 굳이 최단 거리를 고집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요젠 바르딕타. 그를 다시 찾아가 입단을 권유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만나지 못한대도 시도는 해 보고 싶었다.

고민하던 카델이 펼쳤던 지도를 돌돌 말아 접으며 입술을 잘근거렸다. 처음보다 자신감이 상실된 눈빛이 부하들을 힐끔거렸다. 그렇게 한참을 고심하던 그는, 이내 멋쩍은 미소와 함께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사실 나, 둥켈하이에 숨겨 둔 부하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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