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1화 (211/521)

“가르엘 경.”

불빛 하나 없는 여관의 뒷골목. 건물 그림자 속에 파묻힌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카델을 바라보는 얼굴에선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내게 실망했습니까?”

참으로 힘없는 물음이었다. 화를 내려다가도 되레 진이 빠지게 하는 무력함에, 카델은 그의 옆자리에 나란히 섰다. 꽉 막힌 뒷골목에서 그나마 볼만한 것은 흐린 밤하늘뿐이었다.

“어떤 부분에서요? 책임감 없이 라이돈 따라 밖을 돌아다닌 걸 말하는 거라면, 예. 굉장히 실망했죠.”

“미안합니다. 생각이 짧았어요. ……제대로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나 봅니다. 내가 정말 죽은 사람이 된다는 걸.”

가르엘은 달빛이 흐리게 뭉개진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조소를 머금었다. 카델은 시선을 내려 그런 가르엘의 옆모습을 응시했다.

“모들렌 경에게 심한 상처를 준 부분이라면, 아직 잘 모르겠어요.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가 안 가거든요. 내게는 그들의 믿음을 배신하는 게 두려워 떠난다 하지 않았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의 폭언에는 진심이 담기지 않았다. 그것이 진심일 리 없었다. 만약 그가 황혼 기사단을 짐이라 여겼다면, 그들을 위해 마족의 힘을 숨기고 죽을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기회라고 여기지 않았을까.

가르엘의 진심이 듣고 싶었으나, 그는 대답이 없었다. 입을 꾹 다문 채 침묵을 고집할 뿐이었다.

“마족 혼혈이라는 사실을 밝혔다면 덜 상처받았을 겁니다. 모들렌 경도, 당신도. 왜 그렇게까지 필사적으로 숨겨야 했던 겁니까? 누구에게도 득이 되지 않는 선택이었어요.”

“모들렌은 나를 원망해야 합니다.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더더욱. 원수보다도 미워해야 해요.”

“대체 왜 그래야 하냐고요.”

갑갑함을 참지 못한 카델이 언성을 높이자, 가르엘의 시선이 느리게 움직였다. 그는 어둠 속에 잠긴 카델의 잿빛 눈동자를 응시했다.

“그러지 않으면 그 순진한 녀석은 결국 나를 이해하려 들 테니까. 나의 더러운 힘을 받아들이고, 위해 줄 테니까.”

“……그게 문제가 됩니까?”

“녀석은, 녀석이 이끌 새로운 황혼 기사단은, 영원히 제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될 겁니다. 그걸 어떻게 참나요? 나는 못 견딥니다. 처음부터 그 녀석들의 긍지를 지키기 위해 죽음을 선택했던 겁니다. 그런데 덜 상처받기 위해 스스로 긍지를 버리게 만들라고요? ……그렇겐 못 해요.”

가르엘은 단 한 번도 자신의 기사단을 짐이라고 여겨 본 적이 없었다. 황혼 기사단은 언제나 그의 자랑이었다. 그랬기에 자신 역시 그들의 자랑이기를 바랐다. 누구도 흠잡지 못할 훌륭한 단장이 되고자 노력했다. 고됐지만 기뻤다. 누군가를 제대로 이끌고 있다는 자부심마저 있었다.

지금은 전부 환상 같은 과거의 행복에 불과했으나, 자신의 부하들만큼은 계속해서 충만한 긍지를 느끼기를 바랐다. 마족의 피가 섞인 단장을 받아들이는 고통 따윈 겪지 않기를 바랐다. 마족의 피가 섞인 몸으로 마족을 토벌했던 단장이란 존재에 대해 고심하는 시간 따위, 갖지 않기를 바랐다.

“나를 원망한다면 모들렌은 예전의 황혼 기사단보다 훨씬 나은 기사단을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겁니다. 내 그늘에서 벗어나고자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겠죠. 성장할 겁니다. 난 그걸 원해요. 녀석들이 나라는 오점을 깨닫지 못한 채 훌륭하게 성장하는 것. 나의 죽음이 그들의 양분이 되기를 원합니다, 카델 경.”

“하지만 그건…….”

모들렌과 가르엘, 둘 모두에게 가혹한 처사였다. 진실을 모른 채 동경했던 단장을 원망해야 하는 모들렌도, 그 원망을 고스란히 받아 내며 스스로를 갉아먹게 될 가르엘도. 찢어지게 고통스러울 것이다.

“만약 경이었대도 이렇게 했을 거예요. 아니, 어쩌면 나보다 좋은 선택을 했을지도 모르죠. 나보단 그대가 더 뛰어난 단장의 재목이니. ……그래도 나는 나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내 옆에 있는 한 당신은 황혼 기사단과의 만남을 피할 수 없을 겁니다. 언제가 됐든 다시 만나게 될 거고, 매번 모들렌 경의 저주와 원망을 맞닥뜨리게 되겠죠.”

“알고 있어요.”

“괴로울 거예요. 도망도 못 갈 거고요.”

“그렇겠죠.”

가르엘은 결심을 물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랬기에 카델은 고민했다. 그는 가르엘이 모들렌에게 모든 사실을 밝히기를 바랐다. 그것이 모두가 덜 상처받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그것은 가르엘의 결의를 무시하는 것이기도 했다.

상처받는 것이 그의 선택이라면, 자신은 그것을 존중해 줘야 하는 걸까.

“난 경이 죽는 것도 원하지 않지만, 경이 아픈 것도 원하지 않아요.”

“……다정한 말을 해 주는군요.”

“오늘이 지나면 되돌릴 수 없을 겁니다. 이게 마지막 기회일 수 있어요.”

카델은 다정한 사람이었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외지의 인간을 위해 목숨 걸고 싸울 때도, 자신이 살기를 바란다며 위해 누구보다 열렬히 진심을 전할 때도. 그는 다정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가르엘은 누구의 상처도 원하지 않는다는 카델의 진심을 충분히 느끼고 있었다.

그에 반해 자신은 지나는 곳마다 생채기를 남기고 있는 처지다. 이런 글러 먹은 삶을 어떻게 구제하겠다는 건지. 여전히 의문이 들었지만, 여전히 외면할 수 없는 남자였기에. 가르엘은 몸을 돌려 카델을 바로 보았다.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

“부탁이요…?”

“잠시만 안아 주세요. 내가 모들렌에게 돌아가지 못하도록, 아주 꽉.”

가볍게 팔을 벌리자 당황한 카델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러나 망설임은 짧았고, 놀랍게도 카델은 기꺼이 제 품 안에 들어와 주었다. 허리를 감싸는 힘이 느껴졌다. 이게 최선인가 싶은 힘이긴 했으나, 단단하게 얽힌 온기가 싫지 않아 입을 다물었다.

“이번만 들어주는 겁니다. ……빌어먹게 힘들어 보이니까.”

어깨를 감싸 안아도, 머리 위에 뺨을 기대도. 카델은 도망가지 않았다. 정말이지 좋은 단장이 아닌가. 이렇게나 부하를 위해 주다니, 감명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랬기에 가르엘은 지그시 눈을 감고, 속삭이듯 말했다.

“그거 압니까? 모들렌은 거의 제가 키우다시피 한 녀석이에요. 처음엔 정말 답도 없이 못난 놈이었는데…. 지켜보는 재미는 있었지만요.”

“상상이 잘 안 가는데요.”

“보면 깜짝 놀랐을 겁니다. 세상에 그 정도로 재능 없는 인간이 있다는 게 충격적일 지경이었으니까요.”

“너무하네. 지금 본인은 천재라고 자랑하는 거예요?”

“……그래서 미움받는 게 무서워요.”

카델의 고개가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가르엘이 기댔던 뺨을 떼어 내자, 곧 빤한 시선이 닿아 왔다.

“무서워요. 많이 아플 것 같아서. 그건 내 마기도 치유해 주지 못하는 거니까, 조금 겁이 납니다. ……많이 원망하겠죠? 정말 싫어할 텐데. 더 이상 날 존경하지 않을 겁니다.”

“…….”

“부하들에게 하루빨리 날 잊으라고 하겠죠. 그래야 성장할 수 있을 테니까. 난 완전히 잊힐 겁니다. 살아서 그 전부를 지켜보게 될 거예요.”

그리 말하는 가르엘은 옅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으나, 누구보다도 서글퍼 보였다. 카델은 천천히 손을 뻗어 그의 왼쪽 눈을 가린 안대를 끌어 내렸다.

“대신 온전한 당신을 기억해 줄 사람이 생겼잖아요. 나도, 내 부하들도. 경의 옆에 있을 겁니다. 그 앞에선 아무것도 숨기지 않아도 돼요.”

가르엘의 입꼬리가 작게 떨렸다. 카델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너무도 끔찍했으나, 정작 카델의 얼굴은 평온하기만 해서. 도무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가늠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카델의 뒷머리를 눌러 제 가슴팍에 기대어 놓고, 자신의 얼굴을 보지 못하도록 막았다.

“……투정도 받아 주는 좋은 단장님이네요.”

“이런 투정쯤은 익숙해서.”

“좋아요. …좋네요, 전부.”

굳이 다시 고개를 들지 않는 그의 배려와 끝끝내 자신을 놓지 않는 팔까지. 모든 것이 좋았기에, 가르엘은 떠오르는 두려움을 잠시 묻어 두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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