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엘의 얼굴을 응시하는 모들렌의 눈빛이 거칠게 떨렸다. 그의 눈에 비친 남자의 얼굴은 여전히 기괴하기만 했으나, 모들렌은 조금씩 확신하고 있었다.
“단장님…이잖아요. 그렇죠?”
간절한 목소리가 계속해서 사실을 확인하려 들었다. 뒤늦게 그를 따라잡은 카델이 절망적인 표정으로 모들렌과 가르엘을 번갈아 보았다.
반과 루멘에게 붙들린 채 자신이 헛것을 보았나 보다며 자조하던 모들렌은, 그들이 자신을 놓아주자마자 곧장 태세를 바꿔 가르엘을 뒤쫓았다.
그리고 어떻게 해 볼 틈도 없이 가르엘을 따라잡았다. 카델은 가쁜 숨을 헐떡이며 입을 가렸다. 온몸의 피가 싹 빠져나가는 듯한 아득한 기분이었다.
뒤따라온 반과 루멘이 서둘러 모들렌을 떼어 놓으려 했으나, 가르엘이 그를 저지했다.
“……제가 해결하죠.”
들려오는 익숙한 음성에 작게 휘청거린 모들렌이 잡고 있던 그의 어깨를 놓았다. 가르엘을 향한 시선에는 공포마저 어려 있었다.
반면 가르엘은 어느 정도 평정을 찾은 듯 침착한 어투로 말했다. 그의 시선은 모들렌이 아닌 카델을 향하고 있었다.
“미안합니다, 카델 경. 이 일은 제가 직접 해결하도록…….”
“같이 가죠.”
“하지만—”
“이 이상 화나게 만들지 말고, 제 말 들으세요.”
카델의 싸늘한 태도에 가르엘도 더는 고집을 피우지 못했다. 모들렌은 이 혼란스럽게만 한 사태 속에서 가르엘과 카델 사이의 심상치 않은 기류를 느꼈다. 본능적으로 카델이 가르엘의 죽음과 연관되었음을 직감한 그가 돌아보았으나, 카델은 시선을 피했다.
‘이렇게 된 이상 삼자대면을 하는 수밖에.’
가장 알아선 안 되는 이에게 정체를 들켰다. 하지만 그렇다고 계획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카델은 가까스로 마음을 다잡으며 반과 루멘을 향해 말했다.
“라이돈 찾아와.”
*
모들렌과 적린 기사단에게 걸려 있던 환혹술이 해제됐다. 그들의 앞에 있는 이는 더 이상 기묘하게 변화하는 낯선 남자가 아니었다. 죽었어야 했고, 죽은 척하고 있어야 할. 가르엘 몬자시였다.
“카델, 화났어…?”
“그래.”
“……미안해.”
모두의 환혹술을 풀어 준 라이돈이 은근슬쩍 카델의 옆에 붙어 왔다. 라이돈은 눈치를 살피며 카델을 껴안으려 했으나, 카델의 손길이 매몰차게 그를 내쳤다. 처음으로 자신을 진절머리 난다는 듯 쳐다보는 카델의 서늘한 눈빛에, 라이돈이 울상을 지으며 눈을 내리깔았다.
“잘못했어, 카델. 화내지 마.”
“나가.”
“카델…….”
“반, 루멘. 라이돈 데리고 나가 있어. 끝나면 찾아갈게.”
카델은 라이돈의 애타는 시선도, 망설이는 걸음도 전부 무시했다. 라이돈과 가르엘의 무책임함에 화가 났다. 이것은 모두를 속이고 상처 입히는 계획이었다. 그렇다면 적어도, 상처받을 사람에 대한 존중은 보여야 하는 것이 아닌가. 최소한의 성의를 보여야 했다.
그들의 무심함에 그들이 속인 사람이 두 번이나 상처 입게 됐다. 카델은 그 사실이 무엇보다도 화가 났다.
“이제 설명해 주시죠. 죽은 단장님이 어떻게 부활한 건지. 카델 경은 어떻게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는 건지.”
급히 잡은 여관의 객실에는 카델과 가르엘, 모들렌만이 남아 있었다. 모들렌은 가르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최대한 침착하게 질문하려 애썼다. 이것이 대체 무슨 상황인지, 화를 내야 마땅한 상황인지, 무언가의 오해가 있는 것인지. 정확하지 않은 채로 감정부터 앞세우고 싶지 않았다.
대답은 카델이 먼저였다.
“사실만 말씀드리죠. 가르엘 경은 처음부터 죽지 않았습니다. 경이 보았던 시체는 라이돈의 환혹술로 이루어진 환상이었어요. ……저의 명령이었고요.”
모들렌이 부산스럽게 눈을 깜빡였다. 그는 자신이 들은 정보를 최대한 객관적으로 받아들이려 했고, 그럴수록 이성이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간신히 감정을 억누른 그가 더듬더듬 말했다.
“왜… 왜 그런 일을 벌인 겁니까?”
“그건…….”
가르엘을 영입하기 위해서. 그의 치유술로 자신의 부하들을 보다 안전한 환경에서 싸우게 만들고 싶어서.
막상 입 밖으로 꺼내려니 지극히 이기적이며 사적인 욕심일 뿐이라, 카델은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그를 대신한 이는 가르엘이었다.
“내가 더 이상 황혼 기사단에 머무르기 싫었으니까. 카델 경에게 부탁했어.”
“머무르기 싫었다뇨……?”
“매일 질리도록 말하지 않았나? 네게 단장 자리를 넘겨주겠다고. 그걸 전부 농담으로 넘겨 듣고 있던 거라면 서운한데.”
카델의 태도는 모들렌을 향한 죄책감으로 가득 차 있었으나, 가르엘은 그래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이 상황이 귀찮은 듯했고, 어서 해결하고 싶어 안달이 나 보였다. 그 모습이 카델에게는 더없이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적어도 지금까지 그가 알고 있던 가르엘은, 부하의 믿음을 배신하지 않기 위해 죽음을 택하려던 남자였으니. 이런 식으로 굴 이유는 조금도 없었다.
“단장님의 기사단이잖아요. 단장님이 아주 오래전부터 이끌어 온…….”
“그래, 네 말이 맞아. 황혼 기사단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끌어 왔던 나의 기사단이지. 아주 오랫동안 지고 있던 짐이기도 하고 말이야.”
허탈하게 웃은 가르엘이 한 모금 마신 술통을 기울여 내용물을 바닥에 들이부었다. 독한 술이 목재 바닥을 적시며 모들렌의 신코까지 술 방울이 튀어 올랐다.
“난 지겨워, 모들렌. 왕국 전체가 황혼 기사단에게 품고 있는 기대감도, 매 출정마다 승리를 거둬야 한다는 부담감도. 전부 지겹다고. 왜 그것들을 나 혼자 감당해야 하는 건지, 이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아.”
“혼자 감당하지 않으면 됐잖아요. 저희 단원들은 언제나 단장님의 짐을 나눌 각오가 돼 있었습니다.”
“아니. 너흰 그럴 각오도, 의지도 없었어.”
내용물이 바닥나자 가르엘은 신경질적으로 술통을 내던졌다. 그리고 목석처럼 굳어 있는 모들렌을 응시했다.
“이봐, 모들렌. 날 짓누르던 중압감에 가장 크게 일조한 게 누구인 줄 아나? 바로 너희들이야. 너희는 갈림길에서조차 오른쪽 왼쪽을 택하지 못해 내게 의지했지. 누구보다도 내 명령에 충실히 따랐지만, 그만큼 내 명령만을 목을 빼고 기다렸어.”
“그렇지 않아요. 저희는 단장님을 위해—”
“신을 위해 싸우는 자는 전장 속에서조차 빛나야 한다. 그들에게 신의 가호가 있는지 없는지, 모두가 지켜보거든. 나는 매 전장을 의식했고, 아기처럼 손가락 물고 기다리는 너희에게 최고의 승리를 안겨 주기 위해 머리를 쥐어짜야 했어. ……그래. 좋은 단장이라면 마땅히 감내해야겠지. 어쩌면 거기에서 즐거움을 찾을지도 몰라.”
점점 어둡게 물들어 가는 목재 바닥에서부터 짙은 술 냄새가 풍겼다. 그 술 냄새 때문인지, 아니면 이 갑갑한 상황 때문인지. 카델은 점점 갈피를 잡을 수 없게 되었다.
가르엘의 분노가 진심일 리 없는데. 그는 배신당한 모들렌보다도 더욱 거세게 감정을 표출하고 있었다.
“그런데 난 아니거든. 난 좋은 단장이 못 돼. 그러니 모든 걸 원망하기 시작했겠지.”
“단장님은 누구보다 훌륭한 사람입니다.”
“네겐 그랬을 거야. 그렇게 연기해 왔으니까. 하지만 지금도 그렇다고 할 수 있겠어? 신실한 성직자는 술을 마시지 않아. 여자와 밤을 보내지도, 남자와 입을 맞추지도 않지. 넌 내가 그 모든 걸 하는 모습을 지켜봐 왔잖아. 그런데도 날 좋은 단장이라고 말하는 건, 그냥 네가 나와 같은 짐을 지기 싫기 때문에. 내가 이 자리에 오래 머물기를 바라니까 하는 소리 아닌가? 내가 철저히 망가져 부서지더라도 끝까지 자리를 지키기를 바란 거잖아.”
그의 말은 모들렌의 충성에 대한 모욕이나 다름없었다. 카델은 파리하게 질린 모들렌의 안색을 살피며 입술을 잘근거렸다.
이렇게까지 몰아붙이지 않아도 됐다. 모들렌은 가르엘이 살아 있음을 알고서도 섣부르게 흥분하지 않던 사내였다. 차분하게 전말을 설명하고, 어떻게든 용서를 구했다면. 모들렌은 기꺼이 모든 것을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가르엘 경. 그만하십쇼.”
일단 가르엘의 독주를 멈춰야 한다는 생각에 한 걸음 다가갔으나, 가르엘은 카델의 접근을 저지하며 모들렌에게 비수를 꽂았다.
“지긋지긋해. 기사단도, 왕국도, 국민도. 난 더 이상 너희를 지키고 싶지 않아. 그래서 이 숨 막히는 관 속에서 날 좀 꺼내 달라고, 카델 경에게 부탁했다. 아주 애처롭게 매달렸어. 너희와의 인연을 끊어 낼 수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었거든.”
“…….”
“그러니 너도 이만 포기해. 제발 내 장례를 치러 달라고, 모들렌. 죽어야만 벗어날 수 있잖아. 네 불쌍한 단장을 좀 보내 줘.”
모들렌은 단 한 마디도 꺼내지 못했다. 너무 큰 충격을 받은 탓인지, 넋이 나간 사람처럼 간신히 숨만 쉬고 있을 뿐이었다. 가르엘은 그런 모들렌을 가만히 바라보다, 조용히 읊조렸다.
“날 향한 충성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네 기억 속에서 날 지워. 이게 내 마지막 명령이다.”
그는 대답을 듣지 않았다. 홀로 선언하듯 말한 뒤, 그대로 객실을 벗어났다. 카델은 죽은 듯이 굳어 있는 모들렌과 활짝 열린 문 너머를 번갈아 보았다.
너무도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모들렌을 몰아붙이는 가르엘의 행동을 제대로 막아 보지도 못했다.
“……모들렌 경.”
카델의 부름에도 모들렌은 꼼짝하지 않았다. 꽉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고, 깜빡임 없는 눈동자는 점점 빨갛게 충혈되어 갔다.
그를 위로하고 싶었으나, 자신의 위로는 조롱밖에 되지 않음을 잘 알았다. 결국 카델은 머뭇거리며 객실을 빠져나왔다. 조심스럽게 방문을 닫은 그가 낮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돌렸다. 좁은 복도에는 그 누구의 모습도 비치지 않았다.
“또 어디로 간 거야.”
그의 해결 방식은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가르엘을 찾아갈 때였다. 카델은 무거운 걸음을 옮겨 그의 흔적을 쫓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