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9화 (209/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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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델은 돌발 상황으로 계획이 어그러지는 것을 피해 만남까지 미뤘지만, 라이돈과 가르엘이 이미 그들이 만들어 낸 돌발적인 상황에 재미를 붙이는 중이었다. 만약 그가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국왕보다 라이돈을 먼저 찾아갔을 것이 분명했다.

“흐응, 뭐야. 맛있잖아?”

“그렇죠? 배 모양보다는 이 조개 모양 화이트 초콜릿이 더 달아요.”

“……진짜네!”

한창 시체 행세를 하고 있어야 할 가르엘은 얼굴을 훤히 드러낸 채 대낮의 도시를 활보하고 있었다. 그 시체 행세를 도와야 할 라이돈 역시, 큰 날개를 여과 없이 드러내며 한껏 관광을 즐기는 중이었다. 전부 환혹술로 외형을 바꾼 덕이었다.

시작은 라이돈의 단순한 변덕으로, 그는 가르엘의 옆을 지키는 것이 지루하다며 제멋대로 성을 빠져나가려 했다. 가르엘 역시 지루한 것은 마찬가지였으나, 그래도 그는 이 전국민 사기극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정도는 인지하고 있었다. 때문에 처음엔 라이돈을 만류했지만.

“카델 경이 본다면 엄청나게 나무랄걸요. 혼나고 싶은 겁니까?”

“흥, 어차피 카델은 여기 안 와. 그리고 내가 지루해서 말라 죽는 것보단 낫잖아? 자리 좀 비운다고 내 환혹술이 풀리는 것도 아니고. 난 나갈래.”

“그래도 만약 일이 잘못되면…….”

“내 환혹술은 절대 안 풀려. 그러니까 혼자 시체처럼 누워 있든가 해. 또 막으면 진짜 죽인다?”

라이돈의 확신에 찬 목소리에 결심이 흔들리기도 했을뿐더러, 무엇보다도.

“먹고 있어요. 난 술 좀 사 올 테니까.”

며칠 동안 입에도 못 댄 술이 너무나도 고팠다. 어차피 장례식 전까지는 잘 보관된 시체를 찾아올 사람도 없을 거다. 있더라도 만져서 실체를 확인하기야 하겠는가. 가르엘은 자신의 새로운 동료를 믿어 보기로 했다.

덕분에 라이돈은 최악이었던 가르엘의 이미지가 어느 정도 쇄신되고 있음을 느꼈다. 그가 추천해 준 모든 디저트가 한결같이 극상의 맛을 자랑했기 때문이었다.

“혓바닥은 정상인가 봐.”

조개 모양 초콜릿을 쉼 없이 녹여 먹으며 시장을 구경하던 라이돈은, 문득 떠오른 생각에 눈썹을 치켜들었다.

“……흐음. 설마 여기서 그 인간들을 만나진 않겠지.”

현재 라이돈은 가르엘과 도시를 구경하기 위해 도시 내의 인간들을 대상으로 한 환혹술을 걸어 외형을 바꿨다. 하지만 미테란 산지에서 걸었던 환혹술 역시 유지 중이었으므로, 만약 첫 환혹술의 대상인 황혼 기사단과 적린 기사단이 도시 내에 있다면. 그들에겐 이중 환혹술이 적용됐다는 말이었다.

라이돈도 이중 환혹술에 걸린 상대가 어떤 환상을 보는지는 알지 못했다. 걸려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가르엘과 적린 기사단이 마주칠 일은 없을 테지만, 만약 황혼 기사단을 만나게 된다면. …… 그건 충분히 큰일로 번질 수 있었다.

자신이 옆에 있으면 혹시라도 기사단을 마주쳤을 때 곧장 환혹술을 조정해 줄 수 있겠지만, 지금은 가르엘이 술을 사 오겠다며 자리를 비운 상황.

“……뭐. 만나겠어.”

잠시 생각하던 라이돈이 어깨를 으쓱하며 남은 초콜릿을 전부 입 안으로 털어 넣었다.

쉽게 말해 청승을 떨고 있었다. 그야, 그토록 존경하고 따랐던 단장님의 죽음이 아니던가. 하루 정도는, 적어도 장례식 전날 정도는. 몰아치는 감정에 패배감을 느껴도 되는 것이 아닐까. 그리 생각하며 술집을 찾았다.

그곳에서 적린 기사단을 마주칠 줄은 조금도 상상하지 못했지만.

“사람들 눈에 띌까 봐 일부러 구석진 술집을 찾은 건데……. 이런 모습을 들킬 줄은 몰랐습니다. 부끄럽네요.”

“전 황혼 기사단도, 화이트 왕국의 국민도 아닙니다. 제 앞에서까지 애쓰지 않으셔도 돼요, 모들렌 경. 이왕 만난 김에 편하게 술이나 마시죠.”

카델은 식사를 겸할 생각으로 술집을 찾은 모양이었다. 인파를 피해 이런 외진 곳까지 찾아오게 되었는지도 몰랐다. 왕국을 수호했던 타지의 용병단이 제국의 기사가 되어 돌아오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니까. 눈에 띄면 곤란한 쪽은 오히려 이쪽일지도.

모들렌은 카델의 옆을 차지하고 앉은 반과 루멘에게도 멋쩍은 인사를 건넸다. 이런 상황만 아니었다면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친목을 다질 수 있었을 테다. 하지만 모들렌은 가벼운 농담을 던질 기력조차 없었다.

가르엘의 생전에는 그가 떠맡긴 일을 처리하느라. 사후에는 그의 빈자리를 감당하느라. 심신이 전부 지쳐 버렸다.

루멘과 반도 과묵한 편에 속했으므로, 자칫하면 무거운 분위기에 질식한 세 남자가 동반 장례를 치를 뻔했으나. 다행히 그들에겐 카델이 있었다.

“황제 페하가 인테 설원의 봉인을 점검하라는 임무를 주셔서요. 출발 전에 가르엘 경의 장례식에 참석하려고 들렀습니다.”

“……그렇군요. 쉴 틈이 없어서 힘드시겠어요. 제국에는 다른 기사단도 많으니 여유가 있을 줄 알았는데.”

“어딜 가든 신입이 제일 많이 구르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러려니 하고 있어요. 이참에 공적이나 쌓으면 좋죠.”

카델은 모들렌의 빈 잔을 채워 주며 쓴웃음을 지었다. 기사단이 되기 전에도 제법 유명세를 떨치던 세력이었으니, 제국에서도 귀하게 여겨 주지 않을까 싶었는데. 제국의 황제는 아무래도 인재를 아끼기보다는 최대한 활용하는 타입인 듯했다.

카델의 외형을 미묘하게 바꿔 둔 것도 그랬다. 카델은 이것이 제국인이 선호하는 외모이며, 그럴싸한 배경도 없는 용병 출신이 이름난 기사들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능력뿐 아니라 외적으로도 빼어나야 한다는 황제의 결정이라고 했다.

진정으로 그를 아낀다면 이런 식으로 이미지 메이킹을 하는 게 아니라, 카델의 존재 자체가 제국의 힘이라는 것을 강조해야 하는 게 아닌가. 주제넘지만 그런 생각도 들었다.

‘만약 적린 기사단이 화이트 왕국 소속이었다면, 미래가 조금은 달라졌을까.’

취기가 돌아서일까.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상상을 하게 됐다. 카델은 물론 반과 루멘, 지금은 보이지 않는 요정까지. 그들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바스킨 마을에서의 전투를 통해 충분히 절감했다.

황혼 기사단이 있으니 적린 기사단이 제국 봉인 문제에 대표 격으로 보내지진 않았을 테지만, 다닐라 국왕은 인재를 아끼는 사람이다. 기사단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분명 적린 기사단을 추가 파견 보냈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그들 같은 실력자가 포함되었다면. 자신이 부족하여 지키지 못한 단장은, 어둡고 좁은 관 속에서 썩어 가지 않아도 됐을 텐데.

“……모들렌 경?”

우울한 상념에 빠져 있던 모들렌이 작게 어깨를 떨었다. 함께 흔들린 잔에서 술이 넘쳐흘렀다. 그를 불렀던 카델이 당황하며 닦을 것을 찾았으나, 모들렌은 괜찮다며 손을 내저었다.

“취했나 봅니다. 이러다가 내일 사고라도 칠까 무섭네요.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괜찮겠어요? 데려다드릴게요. 아니면 마차라도…….”

“아뇨, 아뇨. 괜찮아요. 정말 괜찮습니다. 바람 좀 쐬면 금방 깰 거예요.”

단장이 된 지 얼마나 됐다고 남 앞에서 이런 한심한 꼴이라니. 스스로를 질책한 모들렌이 애써 미소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술값은 제가 치를 테니, 여러분은 마음껏 마셔 주세요. 그럼…….”

그러나 그 순간.

주인장을 찾아 움직이던 모들렌의 시야 속으로, 이상한 형상이 포착되었다. 그것은 무언가를 계산하고 있는 한 남자의 모습이었다.

‘저게… 뭐지…?’

문제는 그 남자의 형태가 일정하지 않다는 것이었는데, 명확한 설명이 불가할 정도로 기묘한 형상이었다.

맨 처음에는 평범한 남성의 모습으로, 딱히 특징이 없는 밋밋한 외모와 중키, 적당한 살집을 가진 남자로 보였다. 그러나 눈을 깜빡일 때마다 남자의 머리는 하얗게 색이 바랬으며, 피부는 흉하게 녹아내렸고, 키가 커지고 줄어들기를 반복했다. 일관적이지 않은 형태로 계속해서 변화하는 것이다.

모들렌은 미간을 찌푸린 채 눈을 비볐다. 헛것을 볼 만큼 술을 많이 마시진 않은 것 같은데. 게다가 취했으면 전부 이상하게 보일 것이지, 왜 저 남자만 저런 꼴로 보인단 말인가. 남자가 이상한 것이라기에는, 계산하는 주인장도 가게 안의 손님들도. 전혀 놀란 기색이 없었다.

자신의 눈에만 저런 기묘한 광경이 보이는 것이다.

—라고 모들렌은 생각했으나. 실상은 달랐다.

“대장, 저거…….”

“라이돈 짓이겠죠?”

카델은 제 옆에서 속삭이는 두 부하의 목소리를 들으며 떨리는 입술을 달싹였다. 불안정한 시선이 기이한 형체로 변화하는 남자와 모들렌을 번갈아 살폈다.

‘왜 쟤가 저기 있어? 진짜 죽고 싶은 거야?’

남자의 형상은 불확실하고 변칙적이었으나, 카델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는 가르엘 몬자시였다. 라이돈의 환혹술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큰 문제였다면 가르엘이 지금 여기서 술 계산이나 하고 있진 않겠지. 그냥 우릴 여기서 만날 줄 몰랐던 거야.’

라이돈이라면 몰라도 가르엘까지 이런 식으로 안이하게 굴다니. 창백해진 카델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서둘러 부하들을 돌아보자, 그들도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모들렌에게 다가갔다.

“몸 가누기가 힘들어 보이는데. 부축해 드리죠, 모들렌 경.”

“기대십쇼. 괜히 버티지 말고.”

루멘과 반이 각각 모들렌의 양팔을 잡아끌기 시작했다. 두 남자의 우악스러운 악력에 어쩔 수 없이 끌려가면서도, 모들렌의 시선은 가르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에 카델은 아예 모들렌의 눈앞에서 까치발을 들고 시야를 차단했다.

“어이고, 많이 피곤해 보이시네. 제 부하들이 데려다드릴 테니, 부디 거절 말고 안전하게 돌아가세요.”

카델은 자꾸만 가르엘을 살피려 하는 모들렌의 어깨를 짚고 그의 시선을 따라 목을 길게 내뺐다.

“자, 잠시만요, 카델 경. 잠시만…….”

“계산은 제가 하겠습니다. 이제 제국의 기사가 됐으니까요. 돈은 잘 벌거든요.”

“저기, 잠시 확인할게…….”

“괜찮습니다! 뭐가 됐든 전부 괜찮아요!”

여기서 모들렌에게 가르엘의 존재를 들킨다면 끔찍한 파국이 일어날 것이다. 일단은 어떻게든 모들렌을 이곳에서 빼내야 했다. 하지만 간절한 카델의 바람과는 달리, 모들렌은 변칙적인 남자의 모습 속에서 기어코 익숙한 부분들을 발견해 냈다.

“단장… 가르엘 단장님……?”

찰나씩 스쳐 가는 환한 백발과 자색의 눈동자, 익숙한 체격, 익숙한 자세. 당연히 헛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확인해 보고 싶은 사람이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일부러 사람이 적은 술집을 찾아 장례식이 진행되는 동안 마실 술을 구매하고 있던 가르엘. 여유롭게 계산까지 마친 그는, 출구 쪽에서 질질 끌려가고 있는 모들렌과 그를 끌고 가는 적린 기사단을 발견했다.

약간은 불안했으나 저들과 마주치게 될 확률은 극히 희박하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가르엘은 그 희박한 확률을 뚫고 등장한 인물들에게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무리 대부분의 상황을 관망하듯 살아가는 그일지라도, 이건 타격이 컸다.

‘이건, 진짜 죽는 게 나을 것 같은 상황인데.’

여기서 당황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끝이다. 최대한 당당하게. 모들렌이고 카델이고 모르는 사람인 척 자연스럽게 행동해야 했다.

가르엘은 술통을 허리춤에 고정한 뒤, 굳이 숨으려는 노력도 없이 출구를 향해 거침없이 나아갔다. 괜히 이곳에 머무르며 접근할 빌미를 주는 것보단 빠르게 사라지는 편이 나았다.

“다, 단장님…. 단장님!”

“허어, 모들렌 경! 심하게 취하셨습니다! 아무리 슬퍼도 이렇게 무너지시면 안 되죠. 이제 한 기사단을 이끄는 어엿한 단장이 아닙니까!”

가르엘이 빠져나가려 한다는 것을 눈치챈 카델은 흥분 상태에 돌입한 모들렌을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반과 루멘 역시 속으로나마 이 사태의 원흉을 욕하며 열심히 무력을 행사했다.

그렇게 적린 기사단의 도움을 받으며, 가르엘은 최대한 넓은 보폭으로 술집을 빠져나갔다.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서둘러 라이돈을 찾아가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카델 경이 날 버리겠다고 해도 할 말이 없겠어.’

피곤해서 정신이 나가기라도 한 걸까.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터무니없는 실수에 스스로도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가르엘은 어떻게든 이 황당한 실수를 만회하고자 급하게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라이돈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 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러나 가르엘이 골목 하나를 꺾어 들어가기가 무섭게.

“모들렌 경! 가지 마세요!”

카델의 처절한 외침과 함께, 누군가 그의 어깨를 붙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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