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8화 (208/521)

화이트 왕국의 선착장.

한 번의 시행착오 끝에 적린 기사단은 무사히 왕국 안에 발을 들일 수 있었다. 시원한 해풍과 맑은 바닷물은 그들이 이곳을 떠나기 전과 다를 것이 없었다.

반은 카델의 이동 마법 성공을 기뻐하며 그를 마구잡이로 칭찬했고, 루멘 역시 놀림에 가까운 칭찬을 해 주었으나. 카델의 표정은 전혀 기뻐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절망적으로 굳어 있었다.

‘환청이었을 거야. 환청.’

마법진이 발동되기 직전에 들었던 나긋한 음성. 마지막 순간, 암살자는 숨겨 왔던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그의 정체는 다름 아닌 ‘요젠 바르딕타’였다.

‘말이 돼? 요젠? 그게 요젠이었다고? 걔가 요젠일 줄 알았으면 내가 바짓가랑이를 붙들어서라도 입단해 달라고 애원을 했지. 가르엘이고 라이돈이고, 둘이 알아서 잘하라고 놔두고 둥켈하이에 살림을 차렸지!’

쉽게도 미련을 떨쳐 냈던 과거의 자신이 원망스러워 애꿎은 머리카락만 쥐어뜯었다. 들려오는 걱정의 소리도 무시한 채 바닥에 쭈그려 앉은 카델이 음울하게 중얼거렸다.

“내 인생 왜 이래…….”

요젠 바르딕타는 그의 최종덱에 포함되었던 S급 기사로, 카델의 마지막 기사 영입 후보 1순위에 빛나는 암살자이기도 했다.

‘만날 수 있으리라곤 기대도 안 했단 말이야. 그냥 그림의 떡으로 남겨 두려고 했는데…….’

기대가 없었기에 자신을 도운 암살자의 정체가 요젠이라는 사실이 더욱 충격적이었다. 만약 그가 요젠일 확률을 조금이라도 염두에 두었다면, 바퀴벌레처럼 끈질기게 이름을 알아내려 했을 텐데. 그렇게나 바라던 꿈의 기사를 코앞에서 멍청하게 날릴 줄 알았더라면…….

“단장, 마력을 너무 써서 몸에 이상이라도 생긴 거예요? 약방을 찾아볼까요?”

“일단 업혀 봐. 여관부터 찾아가는 게 좋겠군.”

말도 없이 끙끙 앓기만 하는 카델의 행동에 부하들은 안절부절못하며 해결 방안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약방을 쓸어 올 기세로 발을 구르는 반의 독촉에, 카델은 자신의 앞에 놓인 루멘의 등을 툭툭 두들기며 느리게 일어섰다.

“아니야. 괜찮아. ……가자.”

“힘들면 그냥 업혀.”

“루멘이 기분 나쁘다면 제가 업어 드릴게요, 단장. 무리하지 마세요.”

기분 나쁜 것은 루멘의 등이 아니라, 요젠 바르딕타를 놓치고서 ‘인성은 합격!’이라며 흐뭇해하기나 한 자신의 멍청함이었다. 카델은 끝끝내 부하들의 호의를 거절하며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둥켈하이 어디쯤 있는 숲인지도 모르고. 다시 찾아간다 해도 만나 줄지가 미지수고. ……됐다. 지금은 잊는 게 나아. 적어도 둥켈하이 내에 있다는 건 알게 됐으니까.’

과거의 멍청함을 되새겨 봤자 자괴감만 늘어날 뿐이다. 카델은 차오르는 후회를 떨쳐 내려 애쓰며, 원래의 계획을 이행하기로 했다.

*

“유감이라는 제국 황제의 서신을 받자마자 자네가 방문했으니, 짐이 그대의 기사단을 위로 선물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터무니없는 착각은 아니라고 생각하네만.”

카델은 다닐라 왕의 발언을 농담으로 치부해도 되는지를 고민하며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국왕은 첫 만남 때처럼 카델과 장난기 섞인 대화를 이어 가려는 듯했지만, 눈빛에선 차마 숨기지 못한 슬픔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일전, 가르엘은 자신의 왕에게 ‘인복이 없어 인재에 욕심을 낸다’는 평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런 자에게 가르엘 몬자시라는 존재는 분명 특별했을 것이다. 성기사인 그가 망나니처럼 바깥을 누빈다는 사실을 알았을 텐데도 눈감아 준 것을 보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대가 가르엘의 시체를 발견해 줬다지.”

“……예.”

“그래. 그렇군.”

다닐라 왕은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행동에 위엄과 여유가 흘러넘치던 그였으나, 오늘은 유독 쓸쓸해 보였다. 그 원인 제공자가 바로 자신이었으니. 카델은 이 자리가 그저 불편하기만 했다.

“고맙네. ……비록 경은 짐에게 루멘 도미닉의 입단도 숨기고, 아름다운 화이트 왕국 대신 그대를 위협하기나 할 제국을 택했지만. 고마운 건 고마운 게지.”

“그, 그건…….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때 당시에 루멘은 정말 제 부하가 아니었어요.”

“됐네. 짐은 그렇게 속 좁은 사내가 아니야.”

당황한 카델의 모습이 재밌었는지, 낮게 웃은 다닐라가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러고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래. 누군가를 원망한다면, 그 대상은 마족이 되어야겠지.”

그 싸늘한 목소리를 듣지 못한 척, 카델은 조심스레 눈을 내리깔았다. 소중한 기사를 잃은 그가 어떤 심정일지, 조금이나마 이해가 갔기 때문이다. 침묵은 카델이 보일 수 있는 최소한의 존중이었다.

씁쓸한 속내를 갈무리한 다닐라는 평소의 인자한 낯으로 카델에게 말했다.

“가르엘의 장례는 내일 오후에 치러질 예정이네. 자네도 그의 마지막을 지켜봐 주었으면 좋겠군.”

“물론입니다.”

“후에는 배 한 척을 내어주도록 하지.”

인테 설원으로 향하려면 항해는 필수였으므로, 카델을 위한 국왕의 배려인 셈이었다. 카델은 정중히 감사를 표했고, 다닐라는 여행길에 지쳤을 그를 보내 주었다.

알현실을 빠져나가는 동안 카델의 얼굴에선 별다른 감정이 비치지 않았다. 억제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루멘과의 대화 이후, 카델은 가르엘의 일에 최소한의 감정을 쓰기 위해 노력했다. 바닥없는 괴로움에 허덕일지라도, 자신은 가르엘을 다시 살려 낼 생각이 없었다. 무엇이 됐든 가르엘은 결국 자신의 기사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남의 것을 뺏으면서 울며불며 사죄해 봤자 상대방은 어이없어할 뿐이니. 뻔뻔할지언정 꼴불견은 되고 싶지 않았다.

‘내일 오후라면 하루 정도 시간이 남은 셈이네. 당장 라이돈을 보러 가는 건…… 역시 힘들겠지.’

반지의 실을 따라간다면 라이돈을 볼 수 있을 테지만, 지금쯤 그는 시체 행세 중인 가르엘과 함께 있을 것이다. 괜히 찾아갔다가 돌발 상황이 벌어지는 건 원치 않았다.

‘다음 메인 퀘스트를 대비하는 게 낫겠어.’

계획도 짤 겸, 식사도 할 겸. 부하들과 시간을 보내는 게 좋겠다. 결정한 카델이 부하들을 찾아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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