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이 차단된 덕에 오히려 나머지 감각이 생생하게 깨어났다. 청각과 후각이 평소보다 배는 예민해진 것이 느껴졌다.
습한 흙냄새라든가, 선선한 바람을 따라 쓸리는 나뭇잎 소리라든가, 곤충의 울음소리라든가. 만약 카델을 안내하는 남자가 암살자만 아니었다면, 나란히 걷는 발소리도 들렸을 테다.
“……옆에 있는 거 맞지? 나 계속 앞으로 걸으면 되는 거지?”
“열 걸음 뒤에 왼쪽으로 꺾어.”
목소리라도 들려주기에 망정이지. 꼭 광활한 숲속을 홀로 걷는 기분이었다. 짧은 대화를 통해 그가 미치광이 살인귀와는 거리가 멀다고 판단한 카델은, 혼자라는 기분을 떨쳐 내기 위해 주기적으로 그의 존재 여부를 확인했다.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인데. 우리 통성명이나 할래?”
“모르는 게 나을 텐데.”
“……그렇구나. 그럼 넌 이 숲에 사는 거야?”
“가끔.”
호락호락하지 않은 남자였다. 은근슬쩍 암살자의 정체를 유추해 보려던 카델은 상당한 두께의 철벽을 직면하곤 깔끔하게 심문을 포기했다.
‘괜히 욕심부렸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목이 떨어질 수도 있으니까.’
이렇게 소름 돋을 만큼 기척을 완벽하게 죽이는 걸 보면 최소 A급 암살자다. 잘못 자극했다간 장막을 펼칠 새도 없이 목숨을 잃게 되리라. 그리 생각하니 새삼 길 안내를 부탁한 것이 미친 짓 같아 마른침이 넘어갔다.
‘나도 쟤가 라이돈 같은 성격이면 부탁 안 했지. 사람이 좀, 정이 있어 보이니까 눈 딱 감고 부탁한 거 아니야.’
거슬리는 침입자 정도는 단숨에 죽일 수 있을 텐데도 굳이 정체를 묻고, 살아 나갈 기회를 주고, 필요한 정보까지 순순히 내어줬다. 조금 유별난 부분은 있을지 몰라도 상식은 탑재한 듯했으니. 지금도 그 덕분에 쉽게 부하들을 찾아갈 수 있게 되지 않았는가.
그렇게 카델이 애써 암살자의 존재를 푸근한 곰돌이 정도로 미화하고 있을 무렵. 남자의 나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넌 내가 별로 무섭지 않나 봐.”
“……무서워해야 할 이유가 있나? 날 도와주고 있는 사람인데.”
“보통은 무서워하던데. 네 숨소리는 안정적이네. 듣기 편해.”
왜 남의 숨소리를 신경 쓰는 것일까. 한번 의식하기 시작하면 자연스러웠던 호흡도 어색해지기 마련이다. 카델은 최대한 거슬리지 않는 숨소리를 내기 위해 뒤늦은 노력을 기울였다.
“네 말을 종합해 보자면, 난 정직한 심장 소리에 안정적인 숨소리까지 갖춘 사람인 거네?”
“아직까지는.”
“그래, 뭐. 난 그런 것까진 모르겠지만… 네 목소리도 꽤 편안해. 나긋나긋해서.”
“……섬뜩한 게 아니고?”
“섬뜩? 보통 이런 목소리를 섬뜩하다고 하진 않지. 최대한 나쁘게 말해 봤자 졸린 목소리.”
물론 좀 전처럼 아무런 기척도 없이 튀어나와 대뜸 귓가에 속삭인다면 섬뜩하긴 하겠다만, 그건 목소리가 섬뜩한 게 아니라 상황이 섬뜩한 거다.
카델의 말에 남자는 다시금 침묵을 지켰다. 되돌아온 정적 속에서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기던 카델은, 문득 떠오른 의문에 미간을 좁혔다.
‘……혹시 암살자들은 섬뜩해지고 싶어 하나?’
어쩌면 이 남자는 공포의 대상이 되고 싶은 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한 마디, 한 마디에 온몸의 털이 바짝 곤두설 만큼 소름 끼치는 섬뜩함이 느껴진다고 해야 했을지도.
가능한 한 암살자의 비위를 맞춰 주고 싶었던 카델은 길어지는 침묵에 자신의 실수를 정정하려 했으나, 남자가 먼저 선수를 쳤다.
“다섯 걸음 뒤에 눈을 떠. 그 방향으로 쭉 걷다 보면 네 동료들이 나올 거야. 다른 두 명은 이미 서로 만났거든.”
“아……. 고마워.”
“빨리 숲을 빠져나가는 게 좋을 거야.”
“응? 왜?”
카델이 물었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몇 번을 되물어도 마찬가지였다. 그제야 카델은 암살자가 곁을 떠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정도면 사람이 아니라 유령 아니야……?’
처음부터 끝까지 실체를 보지 못했으니, 기묘한 꿈이라도 꾼 기분이었다. 남자의 말대로 다섯 걸음 뒤에 눈을 뜬 카델은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당연하게도, 암살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누구였을까.”
누구였든 일단 인성은 합격이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카델이 두 부하를 찾아 이동했다.
*
한편, 같은 숲에 떨어져 가장 먼저 서로를 발견한 반과 루멘. 두 남자는 카델을 찾기 위한 짜증스러운 동행을 이어 가는 중이었다.
“떨어져도 하필 네놈과 떨어지다니. 되는 일이 없어.”
“투덜거릴 시간에 대검이나 한 번 더 휘두르지 그래. 이번에도 내가 일일이 피를 먹여 줘야 하나? 보모는 다른 곳에서 찾으라고.”
“역겨운 소리 하지 마. 네놈을 썰어서 피를 채우는 수가 있으니까.”
“그 느려터진 속도로 날 썰겠다고? 꿈도 야무지군. 볼 때마다 멍청한 구석이 있단 말이야.”
카델을 수색하며, 그들은 총 34마리의 마물을 해치웠다. 도대체가 어떻게 돼먹은 숲인지, 걸음걸음마다 사방에서 마물이 튀어나왔다.
반은 동강 난 고블린 시체를 신경질적으로 걷어차며 미간을 구겼다.
“이동 마법 때문에 마력도 부족할 텐데. 단장은 대체 어디 있는 거지?”
“어쩌면 이 숲엔 없을 수도 있어. 완전히 다른 곳에 떨어졌을 확률도 무시 못 하니까.”
“본인같이 재수 없는 소리만 하는군.”
“멍청한 소리보단 낫지.”
“……시체 묻기 좋은 숲이라는 생각은 안 드나?”
“오는 길에 좋은 터를 몇 군데 봐 둔 참이야.”
카델만 아니었다면 진즉에 칼부림이 났을 분위기였다. 걸음을 멈춘 채 살벌한 시선을 교환하던 두 남자는, 맞은편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퍼뜩 고개를 돌렸다.
“반! 루멘! 어디 있어?”
카델의 목소리였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기 싸움을 멈춘 그들이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달려 나갔다.
“단장! 괜찮아요? 다친 덴 없어요?”
“대체 어디 있었던 거야? 혼자 지옥에라도 떨어진 줄 알았잖아.”
암살자의 말대로 얼마 걷지 않아 반과 루멘을 발견할 수 있었다. 카델은 멀쩡해 보이는 두 부하의 모습에 크게 안도했으나, 정작 부하들은 단장과의 재회에도 쉽사리 마음을 놓지 못했다. 그들은 카델이 본 적도 없는 마물을 언급하며 상대하느라 마력을 과하게 사용하진 않았는지, 상처를 입진 않았는지를 집요하게 캐물었다. 산책에 가까운 평화로움을 느꼈던 카델에게는 터무니없는 걱정이었다.
“마물? 한 마리도 못 봤는데.”
“한 마리도 못 봤다고? 그게 말이 돼? 이쪽은 여기에 파손된 마계 봉인이라도 있는 게 아닌지 의심했을 정도라고.”
“못 만났다니 다행이긴 한데요…….”
15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서른 마리가 넘는 마물을 죽여야 했던 두 남자는 본인들이 운이 없는 것인지, 카델이 유달리 운이 좋은 것인지를 고민해야 했다.
그에 카델은 짚이는 것이 있는 듯 가만히 턱을 문질렀다.
‘빨리 숲을 빠져나가라던 게 마물 때문이었나? 오는 길엔 한 마리도 못 봤는데, 혹시 그건…….’
그 암살자가 전부 치워 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런 것치곤 마물의 비명 한 번 듣지 못했으나, 뛰어난 암살자라면 마물이 눈치채기도 전에 먼저 선수를 쳤을 테다.
‘진짜 그런 거라면 A급이 아니라 S급 정도는 되는 암살자일 텐데.’
역시 이름 정도는 알아 뒀어야 했나. 좀 더 과감하게 인연을 쌓아 둘걸.
S급 기사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니 곧장 아쉬움이 피어났다. 하지만 그렇다고 별다른 수가 있는 건 아니었다. 작정하고 몸을 숨긴 암살자를 찾아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고, 그들에겐 새로운 기사 영입보다 급한 일이 있었으니.
짧게 입맛을 다신 카델은 애써 미련을 털어 내며 가방을 뒤적였다.
“아까는 내가 마력 조절에 실패해서 둥켈하이까지 날아와 버렸지만, 이젠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감이 잡혔어. 가져온 물약 다 마시면 화이트 왕국까지 갈 마력은 채워질 테니까, 바로 이동하자.”
“……여기 둥켈하이예요, 단장?”
“멀리도 날아왔군.”
부하들은 이곳이 둥켈하이인 것을 어떻게 알아냈는지 궁금한 기색이었으나, 카델은 슬쩍 말을 돌리며 답변을 회피했다. 설명하기 힘들기 때문이었다. 이름도, 얼굴도, 신분도 모르는 암살자의 도움을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다 마실 동안 주변 좀 경계해 줘.”
둥켈하이에서 화이트 왕국까지 날아가려면 최소 여덟 병은 마셔야 할 듯싶었다. 카델은 바닥에 주저앉은 채 전투적으로 물약을 들이켜기 시작했다.
그리고 카델이 하마처럼 물약을 마시는 동안, 반과 루멘은 기다렸다는 듯 튀어나오는 마물을 상대했다. 이 숲에 마물이 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던 카델로서는 놀라울 만큼 많은 숫자였다.
그렇게 역류하려는 물약을 배 속에 꾸역꾸역 밀어 넣은 카델이 더부룩한 속을 달래며 바닥에 섬세한 이동 마법진을 그려 넣었다.
“……됐다. 이번엔 진짜 성공할 거야.”
“물론이죠, 단장. 믿어요.”
“그럼. 단장의 볼록해진 배를 위해서라도 꼭 성공해야지.”
카델은 훅 숨을 몰아쉬며 마법진 위에 섰다. 한 번의 실패로 문제를 파악했으니, 이번에는 정말 성공할 자신이 있었다.
어느 정도 채워진 마력을 확인한 그는 부하들을 안으로 불러 모았다.
“좋아, 간다!”
카델은 지체 없이 마법진을 발동시켰다. 눈부신 섬광이 번지며 시야가 하얗게 물들었다. 뒤이어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기묘한 감각이 전신을 휩쓸고.
“요젠 바르딕타. 내 이름이야.”
그를 이곳까지 안내해 줬던 목소리가, 흐릿한 환청처럼 귓가를 파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