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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면 화이트 왕국의 항구이리라. 가장 많은 마력의 잔재가 남은 곳이니, 마법진은 그곳에서 생겨날 것이었다.
항구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국왕을 찾아가 적린 기사단의 방문을 알려야 했다. 가르엘 몬자시의 죽음과 밀접하다면 밀접하게 연관된 제국의 기사단이니 환영은 못 받더라도, 바스킨 마을의 마족을 막아 낸 전적이 있는 이쪽을 매몰차게 내쫓지는 못할 터. 그 뒤에는 가르엘의 장례식에 참석하여 라이돈이 제대로 일을 처리하고 있는지를 확인할 생각이었다.
‘그럴… 생각이었는데…….’
항구에 언제 이렇게 나무가 울창하게 자라난 걸까. 카델은 풍성한 나뭇잎에 가려진 하늘을 올려 보며 멍하니 입을 벌렸다.
“반…? 루멘……?”
말도 안 된다.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는 거다. 현실을 부정하며 부하들의 이름을 불러 보아도 들리는 대답은 없었다.
자리에 멈춰 선 채 곰곰이 상황을 파악하던 카델은, 이내 헛웃음을 터뜨리며 얼굴을 가렸다.
“씨발.”
설마 했는데. 이곳이 어디의 숲인지는 몰라도, 일단 부하들은 지옥으로 날아간 모양이었다. 카델은 입술을 잘근거리며 주섬주섬 가방을 열었다.
이럴 때일수록 침착하게 행동해야 한다.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며 바닥난 마력을 충전하기 위해 물약을 들이켜던 카델은, 갑자기 떠오른 시스템 창에 마시던 것을 뿜어 버렸다.
[가까운 곳에 영입 가능한 기사가 존재합니다.]
[인원수: 1]
“여, 여기서? 여기서 튀어나온다고?”
이런 깊은 숲속에 영입 가능한 기사가 있다니? 설마 환혹의 숲으로 돌아오기라도 한 것일까? 그럴 리는 없다. 마법진의 경로에 그쪽 방위는 발끝도 걸치지 못했다.
‘아니면 설마, 다른 요정족이 사는 숲인가?’
그럴 가능성도 충분했다. 카델은 아깝게 절반을 버리게 된 물약을 마저 들이켜며 눈을 굴렸다.
‘요정이래도 라이돈이 있으니 능력 봉인 문제는 없는 셈이지. 하지만 한 기사단에 요정 두 명은 좀…….’
오히려 라이돈 때보다 설득은 쉬울지 모른다. ‘헤소니아’라는 요정 왕의 힘을 물려받은 라이돈이 있으니, 그 존재만으로 입단의 구미가 당길 것이다. 그럼에도 카델은 영 내키지 않았다.
‘하루빨리 기사단을 완성하는 게 중요하긴 하지만 말이야.’
라이돈이 새로운 요정의 존재를 받아들일지도 미지수였고, 사실상 라이돈보다 나은 요정일 확률도 낮았다. 그렇다면 그냥 못 본 척 넘겨야 하는 걸까.
‘아무래도 그게―’
나을 것 같다고 생각한 순간.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던 뒤편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를 찾는 건가?”
갑작스런 등장에 카델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어깨를 들썩였다. 너무 놀란 나머지 등줄기를 타고 연속으로 소름이 돋았다.
빠르게 뒤를 돌아 상대의 정체를 확인하려 했으나,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기척도 없었다. 바람에 나뭇잎 쓸리는 소리를 제외한다면, 숲속은 그저 적막할 뿐이었다. 환청이라기엔 너무나 선명한 음성이었는데. 머뭇거리던 카델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누구—”
그러나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 예고 없이 뻗친 누군가의 손이 카델의 눈을 가렸다.
“뭐, 뭐야! 누구야!”
뭔가가 접근해 오고 있다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당황한 카델이 해를 입기 전에 장막을 두르려 했으나, 그보다 ‘누군가’의 말이 더 빨랐다.
“누군지 알면 살아나가기 힘들 텐데. 그래도 듣고 싶어?”
“…….”
“아직은 너도, 나도, 서로의 얼굴을 몰라. 그러니까 한번 정돈 기회를 줄게. 나를 찾아온 게 맞아?”
남의 눈을 이렇게 정확하게 가려 놓고는 얼굴을 모른다고? 어이가 없는 것과는 별개로 살고는 싶었으므로, 카델은 이 정체 모를 남자와의 대화를 이어 가 보기로 했다.
“아니야. 애초에 네가 누군지는 고사하고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거든. 이동 마법을 타고 왔는데, 아무래도 목적지에서 벗어난 것 같아. 혹시 여기가 어딘지 알아?”
“어딜 가려고 했는데?”
“화이트 왕국.”
“여긴 둥켈하이야.”
“두, 둥켈하이?”
둥켈하이라면 바다 건너 자리한 왕국이 아니던가. 퀘스트 장소인 인테 설원과 가장 가깝게 붙은 나라이기도 했다.
‘둥켈하이 왕국이 화이트 왕국과 똑같은 방위에 있긴 하지만……. 설마 마력을 과하게 쓴 건가? 인원도 없는데 마력만 무식하게 부어서 너무 멀리 와 버린 걸지도.’
절망적이었다. 그대로 말문을 잃은 카델에게 남자는 다른 질문을 던졌다.
“혼자 왔어?”
“……모르겠어. 동료가 두 명 더 있긴 한데, 이곳에 떨어졌는지 다른 곳에 떨어졌는지는 몰라.”
“그럼 그 두 명이 네 동료였구나.”
“어디 있는지 아는 거야?”
“알아. 셋 중에 제일 먼저 널 찾아온 거니까.”
그나마 다행인 소식이었다. 부하들이 정말 지옥에라도 떨어졌으면 어쩌나, 내심 걱정했던 카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동시에 한 가지 사실을 확신했다.
‘이 자식, 암살자구나.’
둥켈하이는 ‘암살자의 나라’라고 불리는 왕국이었다. 유저들 사이에서는 ‘지갑 암살자’라 불리기도 했는데, 둥켈하이 출신 기사는 무조건 뽑기로밖에 획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만큼 성능이 좋기는 했다. 방금 이 남자의 접근 방식부터가 그것을 증명했다.
‘굳이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면 뒤에 있다는 것도 평생 몰랐을 거야. 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 내가 둔한 탓이라기엔 숨소리조차 안 들리잖아? 진짜 그림자라도 서 있는 기분인데.’
암살자라면 카델이 영입하고 싶어 했던 마지막 기사와 같은 포지션이었다. 보통이라면 평범하게 쾌재를 불렀겠으나, 안타깝게도 지금은 아니었다.
“네 대답에 따라서 죽일지 말지를 결정하려고 했어.”
현재 그는 동료 하나 없는 홀몸인 데다, 막 이동 마법을 사용한 탓에 몸을 방어할 마력도 녹록지 않았다.
암살자의 확실한 신분을 알지 못하는 한, 입단은커녕 평범하게 상대하는 것조차 부담스러운 입장이었다. 수틀린 암살자가 언제 공격해 올지 모르니. 그것을 방어할 최소한의 기력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아쉽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야.’
빠르게 결단을 내린 카델은 생존을 최우선으로 두기로 했다. 적어도 반과 루멘을 찾아내기 전까진 암살자를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되도록이면 죽이지 말아 줬으면 하는데. 난 네가 누군지도 모르고, 둥켈하이에 도착했다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억울한 처지거든.”
“거짓말이 아니란 건 알아. 네 심장 소리, 시끄럽긴 하지만 나름 정직하게 뛰고 있거든.”
“……심장 소리로 그런 걸 안다고?”
“많은 걸 알 수 있지. 자, 그럼 보내 줄게. 난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이지 않아.”
눈을 덮은 손이 스르륵 내려갔다. 카델은 그가 완전히 떨어지기 전에 다급히 손을 잡아챘다. 내내 나긋나긋한 목소리를 내던 남자는 카델의 돌발 행동에도 여전히 평온한 어투로 말했다.
“다시 한번 내 몸에 손대면, 넌 죽어.”
“아, 알겠어. 놓을게. 부탁 하나만 하고 싶어서 그래.”
“……말해 봐.”
“아까 내 동료들이 있는 위치를 안다고 했잖아. 날 거기까지 데려다주면 안 될까?”
“…….”
“죽고 싶어 환장한 놈처럼 보인다는 건 알겠는데, 내가 진짜 급해서 그래. 한시라도 빨리 화이트 왕국으로 가야 하거든. 원하면 돈이라도 줄게. 한 번만 부탁하자.”
잡고 있던 손을 놓자 정말이지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아서, 카델은 암살자가 그대로 떠나버린 것이 아닐지를 고민해야 했다. 그렇게 카델이 감고 있던 눈을 슬쩍 뜨려던 때. 침묵하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돈은 필요 없어. 대신 네 얼굴을 기억할게.”
“얼굴?”
“눈 뜨지 말고, 가만히 있어.”
이해할 수 없는 조건에 의아해하기가 무섭게, 카델은 갑작스레 제 얼굴을 훑는 손길을 느꼈다. 산 사람 같지 않은 차가운 손끝이 그의 이마와 눈썹, 눈꺼풀 아래 드러난 눈동자의 윤곽, 부드럽게 뻗은 콧대, 움찔거리는 입술과 좁은 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미지의 존재를 탐색하듯 꼼꼼한 손길이었다.
그냥 쳐다보면 되는 걸 왜 남의 얼굴을 만지작거리는 걸까. 목구멍까지 차오른 불만을 삼키며 얌전히 손길을 받아들이자, 이내 얼음 같던 손끝이 떨어지며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료에게 데려다줄 테니, 내가 허락하기 전까진 눈 뜨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