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3화 (203/521)

“카델, 날 이대로 떼어 놓을 셈이야? 저 냄새나는 낯선 남자한테 날 팔아넘기려는 거지? 너무해!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은근슬쩍 단장한테 엉겨 붙지 마라, 요정 놈. 그만 징징대고 썩 꺼져.”

라이돈은 카델의 뒤에 거북이 등딱지처럼 들러붙어 연신 우는소리를 냈다. 반이 날개를 잡아당겨 떼어 놓으려 해도 요지부동이었다.

“냄새나는 낯선 남자라뇨, 라이돈 경. 저만큼 청결하고 향긋한 남자가 어디 있다고. 게다가 저흰 구면인 걸로 알고 있는데.”

“괜히 자극하지 말고 조용히 계시죠.”

“루멘 경, 맡아 보십쇼. 좋은 향기가 나지 않나요?”

“더 가까이 오면 진짜 죽은 사람으로 만들어 드리는 수가 있습니다.”

카델은 몸을 짓누르는 뜨끈한 무게감과 함께 벌써부터 불화의 조짐이 보이는 부하들을 돌아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이곳의 누구보다 짙은 근심이 떠올라 있었다.

‘괜히 일만 더 심각해지는 건 아니겠지.’

기나긴 회의 끝에 그들이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라이돈의 환혹술을 통해 황혼 기사단이 가르엘의 시체를 보게 하고, 대대적으로 그의 장례까지 치르도록 유도하는 것.

세상에 ‘가르엘 몬자시’라는 인물이 완전히 죽은 사람으로 공표되게끔 만드는 것이었다.

‘가르엘이 연기만 잘해 준다면 별 탈 없을 거야.’

환혹술이라고 감촉이나 무게감까지 완벽하게 재현할 수는 없었다.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서는 가르엘이 직접 시체 행세를 해 주는 수밖에 없었다. 직접 관에 들어가진 않더라도, 그 직전까지는 라이돈이 보여 주는 환혹술에 현실감을 보태 줘야 하는 것이다.

때문에 라이돈은 한동안 가르엘과 함께 행동하며 마지막까지 그의 장례를 꾸며 주는 역할을 맡았다. 많은 사람을 속이는 일이니 무리가 갈 수도 있다는 걱정이 들었지만, 본인 입으로 제국 전체에 환혹술을 걸 수도 있다며 으스댄 전적이 있으니. 믿어 보기로 했다.

“싫어! 난 카델이랑 떨어지지 않을 거라고!”

정작 당사자는 하기 싫어 죽겠다며 생떼를 부리는 중이었지만. 카델은 한숨과 함께 라이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를 달랬다.

“이번 일만 처리하면 두 번 다시 떨어지는 일은 없을 거야. 부탁할게, 라이돈. 중요한 일이란 거 알잖아?”

“그만큼 중요하면 카델도 같이 가면 되잖아.”

“난 바로 외부 봉인 구역에 파견될 확률이 높아. 장례식 당일만큼은 지켜보고 싶지만…… 그게 가능할진 모르겠어.”

카델 역시 라이돈을 눈 밖에 놔두는 것이 불안한 것은 매한가지였다. 되도록 바로 옆에서 그의 행동을 직접적으로 관리하고 싶었으나, 카델은 제국에 귀속된 입장이었다. 봉인 관리에 비상이 걸린 때에 단원도 아닌 단장이 황제의 허락도 없이 마음대로 돌아다니기는 어려운 노릇이다. 총애받는 기사가 아닌 ‘시험받는’ 기사였기에 더더욱.

부탁한다면 가르엘의 장례식 정도는 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황제의 허락이 떨어진다 해도 외부 봉인에 이상이 생긴다면 그 즉시 힘을 보태러 떠나야 할 것이었다.

“무리한 부탁 해서 미안해. 이거 줄 테니까, 일이 잘 마무리되면 바로 찾아와. 알겠지?”

카델은 자신을 끌어안은 라이돈의 손을 떼어 검지에 ‘운명의 반지’를 끼워 주었다. 선명하게 이어진 붉은 실에 라이돈이 입술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약지에 끼워 줘.”

“응?”

“약지에. 빨리.”

어디다 끼우든 실만 잘 보이면 되는 것 아닌가. 의문을 품으면서도 카델은 순순히 라이돈의 약지에 반지를 끼워 주었다.

그제야 잠잠해진 라이돈이 카델의 머리 위로 턱을 괴며 짜증 가득한 한숨을 내쉬었다.

“가르엘 짜증 나. 그냥 죽어.”

노골적인 적의가 담긴 시선이 제게로 향했으나, 정작 가르엘은 전혀 타격 없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원래부터 죽으려고 작정한 이였으니 저런 악담쯤은 가볍게 넘길 수 있는 듯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일을 키워 놨는데 그냥 죽어 버리는 것은 카델이 용납하지 못했으므로, 그는 가르엘에게 경고 같은 주의를 두었다.

“이 계획은 라이돈 없이는 실행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괜히 심기 건들지 말고, 최대한 협조적으로 굴어요. 장례식장에서 부활하는 신화 한 편 찍고 싶은 게 아니라면 말이죠.”

“이것 참, 입단 한번 새로 하기 힘드네요.”

“동감입니다.”

이렇게까지 제 세력으로 끌어들이기가 힘들 줄이야. 게임처럼 단순하게 생각한 적도 없건만. 영입 난이도가 루멘과 엇비슷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 정도는 아닌가.’

마음고생으로 치자면 루멘이 배는 심했던 것 같기도. 카델은 왜 보냐는 듯 눈썹을 까딱하는 루멘에게서 고개를 돌려 모두에게 말했다.

“매번 힘든 일만 겪게 해서 미안하다. 하지만 가르엘 경이 입단한다면 우리 기사단은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되게 안전한 전투를 할 수 있을 거야. 그걸 위한 단장의 욕심이니, 껄끄러워도 조금만 참아 주길 바랄게.”

이번 고난만 넘긴다면 남은 스토리를 진행하는 동안 모두의 생존률은 크게 상승할 것이다. 그것만으로 이 계획은 충분한 가치가 있었다.

*

“……모들렌 경.”

가르엘을 발견했다는 요정의 환언을 듣자마자 수색을 멈추고 곧장 막사로 돌아왔다. 그러면 그렇지. 단장님이 그리 쉽게 죽었을 리 없지. 어디서 길을 헤매다 힘이 빠져 쉬고 있었던 게 틀림없다. 아무리 그래도 신호 하나 보내지 않고 사람 속을 태우다니. 정말이지 한결같이 제멋대로인 단장님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묵은 피로에도 가볍기만 한 발걸음을 놀려 돌아온 모들렌이었다.

“저희가 발견했을 땐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였습니다.”

조심스러운 카델의 목소리도, 뒤따라온 부하들의 탄식도. 모들렌에게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적막한 공간에 가르엘과 저만이 남은 것 같았다.

모들렌은 비척비척 막사 안으로 들어섰다. 깨끗한 천 위에 바로 눕혀진 가르엘은 미동도 없이 눈을 감고 있었다. 항상 하고 다니던 안대가 사라진, 모들렌으로서는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가르엘의 온전한 얼굴이었다.

가르엘의 앞으로 다가가자 절로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대로 털썩 꿇어앉아 그의 몸을 훑어보았다.

“심장 부근에 치명상이 있었어요. 치유술을 사용하기에는 몸이 따라 주지 않는 상황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리를, 비켜 주시겠습니까.”

카델은 지그시 입술을 깨문 채 웅크린 모들렌의 등을 응시했다. 작은 요정이 된 라이돈은 카델이 두른 망토 아래에 몸을 숨기고 환혹술을 전개하는 중이었다. 망설이며 주춤거리는 카델에게 라이돈은 이미 강한 환혹술을 걸어 두었으니 떠나도 상관없다고 속삭였다.

그런 이유로 망설이던 것은 아니었으나, 카델은 얌전히 막사를 벗어났다. 울음을 눌러 참듯 꽉 틀어막힌 모들렌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귓가를 맴도는 듯했다.

막사 안의 모두를 물리고 홀로 남은 모들렌이 천천히 숨을 골랐다. 미간을 구긴 채 버거운 숨을 내쉬고,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매번 단장 자리를 가지라고 하시더니. 기어코 내놓으시는군요.”

핏기 하나 없는 창백한 얼굴이, 조금도 오르내리지 않는 가슴팍이, 차갑게 식은 피부가. 지독한 악몽처럼 모들렌을 덮쳐 왔다. 그는 떨리는 손을 그러쥐며 눈을 부릅떴다.

“싫다고 했잖습니까. 단장 자리는 필요 없다고, 그 자리에 어울리는 건 가르엘 몬자시, 당신뿐이라고.”

어떻게든 눈물을 참아 보려 했으나, 노력은 무용했다. 푹 숙인 고개 아래로 눈물이 멈추지 않고 떨어졌다. 굵은 눈물방울이 나무토막처럼 딱딱하게 굳은 가르엘의 팔에 투명한 길을 만들어 냈다.

“어떻게 이러십니까…? 단장님, 단장님…….”

일그러진 입술에서 기어코 깊은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모들렌은 고개를 치켜들고 입을 틀어막았다. 바깥에는 부하들과 적린 기사단이 있을 것이다.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무너져서는 안 된다.

마음껏 슬퍼할 수 없는 처지가 한스러웠다. 그저 억울하기만 했다. 자신은 단장이 될 재목이 아니었다. 누군가를 이끌 만한 인물이 못 됐다. 그의 단장은 언제까지고 가르엘 몬자시였다. 그에게 처음으로 세상의 빛을 알려 주었던, 고귀한 성기사. 그밖에는 없었다.

“제발 돌아오세요…….”

물기 가득한 음성이 애처롭게 부서졌다. 닿지 못할 간절함은 아니었다. 가르엘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모든 이야기를 듣고 있었으니.

라이돈의 환각 속에 숨어, 가르엘은 괴로워하는 모들렌의 모습을 전부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언뜻 무던해 보였으나, 눈빛은 우울했고, 불안정했으며, 서글프게 가라앉았다.

오래전부터 단장 자리를 모들렌에게 넘길 생각이었으나, 이런 식으로 물려주게 되리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아니, 비슷한 일을 상상해 보긴 했다. 시체 행세를 하는 자신의 옆에서 소중한 부하 녀석이 울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게 될 줄은 몰랐을 뿐.

자신도 똑같이 괴로웠으나, 이것은 자신이 치러야 할 죗값이었다. 그러니 참을 수 있었고, 참아야 했다. 하지만 모들렌은 아니었다. 그는 겪지 않아도 될 고통을 겪고 있었다. 전부 못난 단장을 둔 탓이다.

‘……미안하다.’

모들렌은 그와 가장 오랫동안 함께해 온 부하였고, 가장 신뢰하는 동료였다. 그라면 이 난관을 무사히 헤쳐 나가 성장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라면 걱정 없이 자신의 소중한 기사단을 넘겨줄 수 있었다.

“가르엘 단장님…….”

그러니 이제는 보내 주어야 한다. 사랑할 자격 없는 자신이 오래도록 사랑했던, 황혼 기사단과의 작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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