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1화 (201/521)

제국의 봉인에 이상이 생겼고, 봉인의 균열에서는 카델이 알기로만 두 명의 고위 마족이 출현했다. 봉인의 중심인 제국에서 이러한 현상이 나타났다는 것은 외곽의 봉인에도 문제가 생겼다는 방증이었다.

서둘러 행동하지 않으면 고위 마족이 인간 세계로 빠져나와 활개를 치는 것은 시간문제일 터. 중요한 사안이다. 1분 1초도 허투루 쓸 수는 없었다.

예를 들어, 죽은 것이 확실한 기사단장을 실종으로 속여 얄팍한 희망을 꿈꿔 보는 행동은 피해야 했다.

“단장님은 그렇게 쉽게 죽을 분이 아니십니다. 분명 어딘가에서 몸을 숨기고 계실 거예요.”

모들렌의 눈빛에는 집착에 가까운 간절함이 맺혀 있었다. 사리 분별이 뛰어난 사내였다. 망나니 같은 단장을 대신해 기사단을 통솔하며 신성기사단의 자긍심을 지켜 온 사내였다.

카델은 그가 현 상황의 중요성을 모르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랬기에 굳이 모들렌의 안일한 처우를 비난하거나 꼬집지 않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 외에 수색에 도움이 될 만한 정보가 있습니까?”

“몹시 지친 상태일 거라는 것밖엔……. 빛줄기라도 쏘아 주셨다면 쉽게 찾을 수 있었을 텐데, 그마저도 없었습니다.”

“염두에 두죠. 저희는 미테란 산지 쪽을 수색할 테니, 황혼 기사단 분들은 세츤 강 유역을 수색해 주십쇼.”

“……고맙습니다, 카델 경.”

“인사는 가르엘 경을 찾아낸 뒤에 받는 거로 합시다.”

카델은 격려하듯 그의 어깨를 두드리고는, 곧바로 부하들에게 돌아갔다.

황혼 기사단과는 바스킨 마을에서의 만남 덕에 안면이 있는 자들이 꽤 됐다. 카델은 황혼 기사단원에게 대강의 정보를 캐내고 있는 부하들을 불러내 그들과 떨어진 곳에 모였다.

“수색에 전혀 진전이 없는 모양이던데, 대장. 뭔가 숨기고 있는 것 같긴 한데, 숨겨서 득 될 게 뭐가 있나 싶군.”

“단장, 협조하지 않는다면 굳이 도울 필요가 있을까요? 지칠 때까지 수색하라고 놔두고 하산만 돕죠. 단장도 힘드실 텐데.”

부하들 역시 소극적인 그들의 태도에 심상찮은 낌새를 눈치챈 듯했다. 카델은 뜸 들이지 않고 곧장 모들렌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달했다.

충격적인 정보에 반과 루멘의 표정은 금세 심각해졌으나, 라이돈은 아니었다. 카델은 뭐가 됐든 상관없다는 듯 심드렁한 표정을 한 라이돈을 따로 잡아끌었다.

약한 악력에도 과장되게 끌려온 그가 웃는 낯으로 입술을 들이밀었으나, 카델의 손이 망설임 없이 라이돈의 턱을 밀쳐 올렸다. 꺾인 고개 위로 억울한 표정이 드러났다.

“뽀뽀도 못 하게 하는 거야, 자기? 너무해.”

“언젠 하게 해 준 것처럼 굴고 있네. 됐고, 라이돈. 혹시 이미 눈치챘을지도 모르지만, 가르엘 경에게선—”

“응, 냄새나.”

라이돈은 카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간단히 대답하고는, 여전히 자신의 턱을 밀치고 있는 카델의 손을 슬쩍 감싸 쥐었다.

“냄새라는 건…….”

“마족 냄새 말하는 거 아니야? 처음 봤을 때부터 긴가민가했는데, 약하지만 풍기더라고. 여러 가지로 기분 나빠서 몰래 죽여 버리려고 했더니. 이렇게 된 김에 혼자 알아서 죽어 줬으면 좋겠네! 하하!”

살벌한 말을 뱉은 라이돈이 움켜쥔 카델의 손바닥에 애교스럽게 입을 맞추곤, 그 위에 제 뺨을 가져다 문질렀다. 원하는 바가 명료한 사랑스러운 행동이었다.

천사 같이 생긴 게 작정하고 애교를 부리니 귀엽기는 더럽게 귀여워서, 카델은 헛웃음을 뱉으며 붙잡힌 손을 빼냈다. 그러고는 라이돈의 반듯한 이마에 가볍게 딱밤을 때리며 말했다.

“불길한 소리 하지 말고. 그럼 그 마족 냄새를 추적할 수 있겠어?”

“흐음, 글쎄? 여기저기 마물 냄새도 풍기고, 걔한테서 나는 마족 냄새는 강하지 않거든.”

“시도는 해 볼 수 있다는 거지?”

“카델이 원한다면.”

“좋아, 그럼 해 줘. 가르엘 경한테 마족 냄새가 난다는 사실은 숨기고.”

다행히 냄새는 세츤 강이 아닌 미테란 산지 방면에서 탐지되었다. 카델은 부하들과 함께 본격적인 가르엘 수색에 돌입했다.

*

“네가 고생이 많다, 반.”

“뭘요. 어깨에 깃털 얹고 걷는 기분인데.”

“……이렇게 무거운 깃털이 어디 있어.”

“제 뒤에 있는데요?”

미테란 산지의 험한 지형은 비단 실종자인 가르엘에게만 버거운 것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호기롭게 산을 오르던 카델은, 채 10분도 지나지 못해 헐떡이기 시작했다.

먼저 업어 주겠다고 나선 것은 반으로, 카델은 그의 등판이 얼마나 편안한지 깨달은 바가 있었기에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기진맥진한 상태라면 중요한 때에 힘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라는 핑계를 대기도 했다.

반은 카델이 최대한 편안하게 업힐 수 있도록 걸음을 조심하며 나아갔다. 제 등에 닿아 오는 온기가 퍽 기분 좋은 듯, 궂은 산행에도 얼굴에선 내내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루멘은 그런 반과 카델에게서 의식적으로 신경을 돌려 앞서 날아가는 라이돈을 보았다.

“날개 달렸다고 무작정 전진하지 말고 주변을 제대로 살피면서 가. 수색 중이란 걸 잊지 말라고.”

“아하하! 루멘의 명령조, 오랜만에 들으니까 기분 더러워! 안됐지만 난 후각이 뛰어난 천재 요정이라 루멘보다 인간을 잘 찾거든.”

“가르엘 경의 냄새를 따라가고 있다는 건가? 마족 냄새나 맡을 줄 안다고 생각했는데. 탐지견이 따로 없군.”

“하하! 어디다 비교하는 거야? 죽고 싶은가 봐!”

그리 말한 라이돈은 작은 요정의 모습으로 변신하더니, 루멘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거나 뺨을 걷어찬 뒤 멀리 날아가기를 반복했다. 루멘은 도망가는 라이돈의 뒷모습을 싸늘하게 응시하며 검집에 손을 올렸다.

“한 번만 더 건드리면 날개를 베어 주지.”

“그럼 카델이 화낼 텐데?”

“양쪽 균등하게 하나씩 잘라 줄게. 비행에 무리는 없을 거다.”

“아하하! 할 수 있으면 해 보든가!”

신나게 루멘의 심기를 건드리던 라이돈은 딴짓하지 말라는 카델의 잔소리에 입술을 삐죽이며 다시 몸집을 키웠다.

“루멘이 먼저 시비 걸었는데.”

그렇게 산속을 헤집기를 한참. 쉬지 않고 날아가던 라이돈은 어느 지점에서 몸을 멈췄다. 잠시 고개를 들어 후각에 집중하던 그가 카델을 돌아보았다.

“카델, 여기가 한계야.”

한계라니? 의아한 표정을 지은 카델이 반의 등에서 내려왔다. 카델이 다가오자 라이돈은 제 코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냄새가 사방으로 퍼져 있어. 근처에 있는 것 같긴 한데, 방향을 특정 짓기는 힘들어.”

“근처에 있는 건 확실해?”

“응. 냄새가 가장 강하게 뭉쳐 있거든.”

아무래도 흩어져 찾아봐야 할 것 같았다. 카델은 루멘과 반, 라이돈에게 수색 방향을 정해 주고는, 발견 시 신호를 보내기로 약속했다.

“반이랑 루멘은 이 신호탄을 쏘고, 라이돈은 환언을 사용해. 난 불덩이를 쏘아 올릴게.”

카델은 서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가르엘이 근처에 있다는 라이돈의 판단을 믿고 멀리 가진 않을 생각이었다.

‘설마 진짜 시체로 발견되는 건 아니겠지?’

울퉁불퉁한 흙길을 나아가며, 카델은 문득 들어차는 불길한 상상을 떨쳐 내려 애썼다. 황혼 기사단이 발견했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신경 쓰이긴 했으나, 그의 마기는 어떤 상처도 재생시킨다. 만약 정말 심한 상처를 입었대도 그리 간단히 죽었을 리는 없었다.

‘……그래야 해.’

치유사를 얻느냐 마느냐의 문제 이전에, 가르엘은 카델에게 많은 도움을 준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이토록 허망하게 죽었다고는 믿고 싶지 않았다.

카델은 라이돈과 달리 마족의 냄새를 맡지도 못했고, 반이나 루멘처럼 기척에 민감하지도 않았다. 때문에 주변을 이 잡듯 들쑤시며 소리 높여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최선이었다.

“가르엘 경! 들립니까? 가르엘 경!”

나무 그늘이나 수풀 너머, 경사로 옆, 토끼굴 안쪽까지 머리를 들이밀며 찾았다. 반 덕에 비축해 둘 수 있었던 체력이 빠른 속도로 소모되고 있었다.

“가르엘 경! 들리면 대답 좀 해 보십쇼! 진짜 죽은 건 아니죠? 예?”

30분은 넘게 흐른 것 같은데도 발견될 기미가 없었다. 다른 부하들의 신호 역시 마찬가지였다. 중간에 라이돈의 환언이 들리기는 했으나, 찾기 귀찮다는 일방적인 투정일 뿐이었다.

카델은 허리에 손을 얹은 채 잠시 숨을 골랐다. 그다지 많이 걸은 것 같지도 않건만. 지형이 험해서인지 금세 숨이 찼다.

“찾기만 해 봐라. 가만 안 둬.”

이렇게 된 이상 멀쩡한 모습으로 찾아내 머리통이라도 갈겨 줘야겠다. 그런 의지를 다잡으며 수색을 재개하려던 순간.

“가만 안 두면 어떻게 할 건데요?”

카델의 바로 뒤편에서,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그의 눈앞으로 이번 사건의 원흉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야 찾아 주다니. 생각보다 오래 걸렸네요.”

가르엘 몬자시.

그는 부하들이 자신을 찾느라 속이 타들어 가고 있다는 사실 따윈 안중에도 없다는 듯, 평화로운 낯짝으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상처 하나 없이 말끔한 외관에, 은은하게 풍기는 알코올 향까지.

갑작스레 등장한 가르엘을 위아래로 훑어본 카델은 감히 자신할 수 있었다.

‘이 자식, 실종이 아니라 진짜 도망친 거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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