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0화 (200/521)

메리의 죽음 이후, 루멘은 완전히 바뀌었다. 소심하게 풀 죽어 살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완벽한 귀족의 모습을 꾸며 냈다. 아무와도 깊은 관계를 맺지 않았으나, 많은 사람을 만났다.

눈에 띄지 않고 은밀하게 살아왔던 그는 누구보다 화려하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당당하고, 우아하게. 기품 있는 그의 행동과 수려한 외모는 도미닉 가문에서의 루멘의 입지를 부각시켰다. 파티를 싫어한다던 소년은 크고 작은 파티를 가리지 않고 참석했고, 초대에도 부지런히 응했다.

“정말 뛰어난 아드님을 두셨군요. 부럽습니다, 프로치 경.”

프로치가 만나는 사람마다 루멘의 칭찬을 쏟아 내기 바빴다. 그들은 프로치가 쉽게 처리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니었으므로, 그는 어색한 미소와 함께 본인을 ‘행운아’라 칭해야 했다.

루멘의 검술 역시 날이 갈수록 일취월장했다. 그는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식사 시간도 줄여 가며 훈련에 매진했다. 국왕에게 직접 부탁해 유능한 검사들을 소개받아 가르침을 얻었다.

한계에 부딪혔음이 명백할 때에도, 혹사당한 근육이 경련할 때에도. 루멘은 멈추지 않았다. 그의 눈에는 나이에 맞지 않는 시퍼런 독기가 어려 있었다.

카델은 그런 루멘에게 안쓰러움을 느꼈다. 언제나 여유롭고 오만하던 그의 태도가 사실은 철저하게 계산된 꾸며진 모습이었다는 것이. 중요한 때에 답답하게 군다며 화를 내었던 자신 없는 태도가, 사실은 그의 본 모습이었다는 것이.

가장 뜨거운 복수심의 옆에서 문드러졌을 어린 마음이 안타까웠다.

그가 주위의 주목을 받고, 칭송을 받고, 선망의 대상이 되었을 때에도. 전혀 기뻐 보이지 않는 루멘의 모습이 먹먹하게 슬펐다.

“귀족으로 사는 거, 꽤 재밌더군. 예상외로 적성에 맞았던 것 같아. 한 번 당당하게 사는 법을 배우니 이젠 전으론 못 돌아가겠어. 이 모습을 당신이 봤어야 하는데.”

빠르게 흐른 장면의 끝에서, 루멘은 카델이 알고 있는 훤칠한 청년으로 자라나 있었다.

“……오늘 떠날 거야.”

그는 허리를 숙여 하얀 비석 앞에 꽃 한 송이를 내려 두었다. 비석을 바라보는 푸른 눈동자에서는 숨기지 못한 그리움이 물결처럼 일렁였다.

“하지만 다시 돌아올 거야. 내 소중한 것들은 전부 이곳에 묻혔으니까. 앞으로도 이 묘지가 나의 전부일 테니까. ……돌아올 수밖에 없어, 메리.”

그는 거친 비석의 표면을 조심스럽게 문지르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마지막 유언 정돈 들어주고 싶었는데. 너무 어려운 걸 부탁해서…… 지키진 못할 것 같다.”

몸을 바로 세운 그는 내려 두었던 짐 가방을 들고 천천히 묘지를 빠져나갔다. 새벽빛이 밝아 오는 흐린 하늘 아래, 한밤보다 어둡게 가라앉은 시선이 정면을 향했다.

카델의 시야는 더 이상 그를 따라가지 못했다. 스토리가 끝나가는 것이다. 엉성한 묘지 사이를 가로지르며 점점 멀어지는 루멘의 등을 눈에 담은 채, 카델은 전에 없이 침통한 기분을 느꼈다.

‘내가… 내가 정말, 저 사람들을 대신할 수 있는 거야? 루멘.’

그가 미친 듯이 구르며 얻어 낸 명예를, 그 흙투성이의 바람을. 고작 한 남자를 위해 떨쳐 내도 좋은 것일까. 자신에게 정말 그런 가치가 있는 것일까.

루멘이 버린 것은 말 그대로 그의 모든 과거였다. 과거에 당했던 모든 치욕을, 느꼈던 분노를, 품었던 증오를. 다시 주울 수도 없이 태워 버린 것이다.

그것이 그의 선택임을 알았다. 동시에 자신이 그런 선택지를 쥐여 줬다는 것도 알았다.

카델은 복수를 위한 삶이 옳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나, 자신이 그보다 반짝거리는 것을 줄 수 있다고도 여기지 않았다.

메리가 말했던 다정하고, 아름답고, 귀한 것이. 자신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루멘이 마땅히 가져야 할 것을, 자신은 줄 수 없었다.

그랬기에 두려웠고, 서글펐다.

[루멘 도미닉의 기억 – 과거 스토리(호감도 70 돌파)의 시청을 완료하였습니다.]

[피로 회복도가 50% 감소합니다. 육체 피로도에 유의하십시오.]

눈을 뜨자마자 물약을 마셨다. 힘없던 몸은 금세 활력을 찾았으나, 카델의 눈빛은 그리 맑지 못했다.

“……가야지. 가르엘 찾으러.”

주섬주섬 나갈 채비를 하고 방문을 열자, 복도에 모여 있던 부하들의 모습이 보였다. 하품을 쩍쩍하며 반쯤 눈을 감고 있는 라이돈과, 자꾸만 몸을 기대 오는 라이돈을 팔꿈치로 찍어 내는 반. 그리고 그들을 한심스럽게 바라보는 루멘까지.

예상치 못한 풍경에 카델이 문고리를 잡고 멈춰 있자, 그를 발견한 시선들이 움직였다.

“드디어 나왔군. 계속 안 나오면 깨우러 들어가려 했다고, 대장.”

루멘은 지난밤의 일은 전부 잊은 것처럼 자연스럽게 말을 붙여 왔다. 카델은 그런 루멘을 가만히 응시하다, 마찬가지로 어색함 없는 태도를 보였다.

“난 튼튼한 너희랑 달리 기력이 쇠해. 이 정도면 부지런한 편이지.”

“단장, 아직 회복이 덜 된 거예요? 그럼 제 물약 드세요. 필요할까 봐 안 마시고 남겨 뒀거든요.”

“음? 그럼 그거 나 줘, 반!”

단장이 합류하기가 무섭게 배로 시끄러워진 부하들의 틈에서, 카델은 묘한 기분을 느꼈다. 조금 전까지 루멘의 어두운 과거를 보고 왔기 때문일까. 그의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장면이, 이 떠들썩한 분위기가. 영 어색했다.

‘진짜 꿈을 꾼 것 같기도 하고.’

루멘은 지금 어떤 기분을 느끼고 있을까. 그가 새롭게 찾아낸 소중한 것이 바로 이곳에 있는 걸까.

그렇다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한 가지뿐이었다. 루멘이 더 이상 소중한 것을 잃지 않도록, 그를 둘러싼 모든 것을 지켜 주는 것.

그가 새롭게 선택한 미래가, 누구의 손에도 부서지지 않도록 보호하는 것.

“나가자, 대장. 바깥에 이동 마법진을 준비해 뒀대.”

그게 루멘의 충성에 보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면, 카델은 모든 걸 걸어서라도 해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래. 가자.”

*

제국의 봉인이 위치한 제4구역, 미테란 산지.

적린 기사단은 준비된 이동 마법을 통해 황혼 기사단이 임시 주둔지를 세운 키바 고원으로 이동했다.

도착했을 때만 해도 카델은 ‘가르엘의 실종’에 대해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의심 때문이었다. 그의 실종이 황혼 기사단장이라는 지위를 버리기 위한 극단적인 선택일지도 모른다는 의심.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건 아니건, 둘만의 약속을 알 리 없는 황혼 기사단에게 단장의 실종은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모들렌 경. 오랜만입니다.”

“……아, 카델 경. 이런 곳에서 이런 불미스러운 일로 다시 뵙게 될 줄은 몰랐네요.”

오랜만에 본 모들렌은 카델의 마지막 기억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피로해 보였다. 짙은 다크서클은 물론 충혈된 눈이나 지저분하게 자란 수염까지. 예전의 건실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초췌함만이 남았다.

카델은 억지로 반가운 미소를 짓는 모들렌에게 은근한 죄책감을 느꼈다. 진짜 실종일 경우 이 일엔 카델의 책임이 조금도 없었으나, 아니었을 경우 그는 원치 않게 공범이 되는 것이니. 못 할 짓이었다.

“수색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요?”

“마지막으로 마족을 소탕했던 곳이 미테란 산지와 세츤 강 중간 부근이라, 그곳을 중심으로 밤낮없이 흔적을 찾고 있습니다만…….”

“발견된 게 있었나요?”

무언가를 망설이듯 입술을 달싹이던 모들렌은 결국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의심쩍은 행동이었으나, 그는 카델이 더 캐묻기 전에 다른 정보를 내세워 입을 막았다.

“저희가 토벌한 적은 ‘래세’라는 고위 마족으로, 마기로 이루어진 가스를 뿜어내는 놈이었습니다. 결정타를 먹일 당시에 단장님과 래세가 기사단과 떨어져 있었는데, 래세의 가스 때문에 이쪽에선 시야 확보가 어려웠어요. 래세의 시체는 확인했지만 놈이 어떤 식으로 죽었는지 알 수 없었고, 그걸 아는 유일한 인물인 단장님의 모습조차 완전히 사라졌었습니다. 그래서 저희도 수색에 애를 먹고 있는 거고요.”

“가스라……. 마기로 이루어진 가스라면 가르엘 경의 몸에도 스며들었을 텐데. 흔적이 아예 남지 않았단 말입니까?”

“운 나쁘게도 얼마 안 가 비가 왔거든요. 최악의 타이밍이었죠.”

누군가에겐 최고의 타이밍이었을지도.

카델은 당시 가르엘이 어떤 상황에 부닥쳐 있었는지는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그들이 상대한 ‘래세’라는 고위 마족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레이드 이벤트에서 적으로 등장했던 놈이야. 확실히 가스를 사용하긴 했지. 적에게 자기 체취를 묻혀 어그로를 무시하고 찾아가 때리는 놈이기도 했고.’

일명 [가스 추적]이라 불리는 래세의 스킬은 어떤 물약과 스킬로도 떨쳐 낼 수 없었다. 할 수 있는 대응이라곤 추적 대상에게 보호막을 걸거나, 치유술을 사용해 한 번에 죽지 않도록 관리하는 것뿐.

‘그런데 빗물 하나로 그 가스가 지워졌다고?’

어쩌면 래세가 죽었기 때문에 가스의 힘이 약해졌을 수도 있다. 마기가 포함된 가스이니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카델은 의심쩍은 얼굴로 모들렌을 바라보았다. 피곤에 찌든 눈빛은 카델을 똑바로 마주 보지 못했다. 평소 정직하고 건실한 모들렌답지 않은 태도였다.

“……모들렌 경. 혹시 제게 숨기는 게 있으십니까?”

“숨기는 거라니요?”

“수색 정황을 제대로 공유해 주셔야 저희 기사단도 시간 낭비하는 일 없이 가르엘 경을 찾을 수 있습니다. 남김없이 알려 주셔야 해요.”

카델의 차분한 시선에 모들렌은 괜한 입술만 잘근거렸다. 그는 심신이 전부 지쳐 보였고, 곧 쓰러져도 이상할 것이 없어 보였다. 고된 전투에 이어 단장을 잃은 데다, 수색마저 애를 먹고 있으니. 충직한 부하인 그의 마음이 어떨지 짐작이 갔다.

“제게도 가르엘 경은 은인이나 다름없는 분입니다. 어떻게든 찾아내고 싶어요. 특히 미테란 산지는 지형이 험해서, 마물을 마주치지 않더라도 사고를 당할 위험이 큰 곳입니다. 아무리 가르엘 경이라도 지친 몸으로 몇 날 며칠 버티기엔 무리가 있죠. 어서 발견해야 합니다.”

“……한 가지만 약속해 주십쇼.”

“약속이요…? ……일단 알겠습니다. 가르엘 경의 안전과 관련된 약속이라면, 하죠.”

모들렌은 떨리는 한숨과 함께 수척해진 뺨을 느리게 문지르고는, 벌겋게 충혈된 눈을 카델에게로 고정했다.

“사실은 수색 첫날, 가스를 추적해 간 장소에서 단장님의 것으로 추정되는 망토를 발견했습니다.”

핏물로 흥건해진 망토와 이어진 핏자국의 끝에는, 무언가 터져 죽은 것처럼 대량의 피가 튀어 오른 거목 하나가 자리하고 있었다고. 모들렌은 힘겹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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