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7화 (197/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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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으로 살아야 한다, 루멘. 가문을 잇게 될 네 형의 뒤를 지키며, 고요하게 살 거라.”

시야가 밝아지기 전,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중후한 남성의 목소리로, 삶의 방식을 운운하는 것치곤 건조하고도 강압적인 어투였다.

“어떤 것도 욕심내서는 안 된다. 네 위치를 기억하거라.”

경고 같은 마지막 말과 함께 눈앞이 밝아졌다. 보이는 것은 넓은 저택의 복도 한가운데로, 그곳에는 누가 봐도 루멘의 어린 시절인 소년 한 명이 걸어가고 있었다.

‘와, 이 이기적인 자식. 어린 애 맞아?’

별생각 없이 어린 루멘의 얼굴을 확인한 카델이 혀를 내둘렀다. 고급스러운 흑발도, 우아한 청안도 한결같은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보다 작고 선이 얇은 소년에게선 청순한 분위기마저 흘렀다. 루멘에게 청순이라니. 전혀 어울리지 않는 수식어 같음에도 그랬다.

흑발과 대조되는 흰 피부와 작은 얼굴을 꽉 채운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는, 반이 빈정대던 대로 ‘고생 없이 귀하게 자란 귀족 도련님’의 모습 그 자체였다.

반의 어린 시절도 부아가 치밀 만큼 부조리한 미소년이었으나, 루멘은 그와는 느낌이 조금 달랐다. 지금의 무심함과 싸늘함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온순한 얼굴. 누군가 어깨를 치고 가도 예의 있는 미소로 괜찮다는 답을 해 줄 것만 같은 온유함이 흘러넘쳤다.

카델은 어린 루멘의 모습을 꼼꼼히 뜯어 살피며 연신 분노에 가까운 감탄을 내뱉었다.

‘한 14살쯤 됐으려나. 얼굴은 딱 그 나이대긴 한데 키가 커서…….’

한창 성장 중인 듯 길쭉한 신장이 그의 나이를 가늠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그나저나 루멘은 어딜 향하고 있는 걸까. 눈을 뜨면 목소리의 주인이 보일 거라 생각했는데, 복도에는 루멘 외에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긴 다리를 휘적여 저택을 빠져나간 루멘이 도착한 곳은, 널찍한 후원에 자리한 훈련장이었다. 도미닉가 저택의 웅장함과 고급스러움에 취해 관광 온 사람처럼 곳곳을 구경하던 카델은 들려오는 음성에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아, 루멘 도련님. 오늘도 오셨군요?”

“수련을 빼먹을 순 없으니까요. 혹시 바쁘시다면 일이 끝날 때까지 혼자 연습하고 있을게요.”

“하하! 아닙니다, 도련님. 도련님의 훈련보다 중요한 건 없죠. 자, 그럼 검을 가지고 들어오세요.”

도미닉가의 기사일까. 스물 후반쯤 되어 보이는 사내였다. 그는 성실한 루멘이 기특하다는 듯 흐뭇한 미소를 머금은 채 훈련장 안쪽으로 그를 이끌었다.

“오늘도 ‘찌르기’의 기본자세를 연습할 겁니다. 검술의 기초이니 완벽한 자세를 취할 수 있을 때까지 진행할 거예요.”

“네. 잘 부탁드립니다, 코버 경.”

루멘의 깍듯한 인사와 함께 훈련이 시작됐다. 완벽할 때까지 ‘찌르기’의 자세를 연마한다더니, 둘은 정말로 보는 카델이 지겨워질 만큼 끊임없이 한 자세만을 반복했다.

‘뒷발에 실었던 체중을 한 번에 앞쪽으로 기울이면서 팔을 꼿꼿하게 팍! 아오, 팍, 해야지, 팍! 루멘! 평생 여기서 찌르기만 연습할 거야? 왜 이렇게 몸에 맥아리가 없어?’

이젠 카델이 코버라 불리는 남자의 가르침을 달달 외울 지경이었다. 그는 스포츠 경기를 관람하는 팬의 심경으로 여기저기 딴지를 걸어 가며 지루한 훈련 시간을 버텨 냈다.

그렇게 몇 시간이 흘렀을까. 땀으로 샤워를 한 루멘이 마지막 힘을 짜내어 검을 내지르고. 일순, 뭉툭한 검 끝으로 푸른빛의 섬광이 맺혔다 사라졌다.

‘……응? 저건 그거잖아.’

검기. 카델은 한 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루멘의 발도술은 언제나 푸른 섬광과도 같은 검기를 남겼으니까. 미래에 주구장창 사용할 검기가 처음 발현된 시점인 모양이었다.

작은 검기의 출현은 카델에겐 귀여운 발견일 뿐이었지만, 어린 루멘과 코버에게는 아닌 모양이었다. 루멘은 제가 만든 작은 검기에 놀라 굳었고, 코버의 눈은 튀어나올 것처럼 크게 벌어졌다.

그래도 연장자는 연장자인지, 코버가 먼저 정신을 차리기는 했다.

“검기를 발현하셨군요, 도련님! 대단하십니다.”

“제가 검기를…….”

“13살의 나이에 검기를 발현했다는 건 엄청난 재능이 있다는 방증이죠. 현재 최연소 7성 검사도 14살 생일에 첫 검기를 발현했다고 했으니, 도련님은 그보다도 1년을 앞선 거예요.”

코버는 본인이 더 들뜬 듯 자꾸만 격해지는 목소리를 억누르려 애쓰며 루멘의 어깨를 쥐었다. 루멘은 여전히 얼떨떨한 듯했으나, 계속되는 코버의 칭찬에 곧 기대감에 찬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버지께 말씀드려야겠어요. 분명 기뻐하시겠죠?”

푸른 눈동자가 기쁨에 차 반짝거렸다. 하지만 그를 마주한 코버의 표정엔 얕은 균열이 번졌다. 루멘은 눈치채지 못한 듯했으나, 카델은 알아볼 수 있었다.

“후작님께 알리는 건…… 나중으로 미루는 게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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