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린 기사단은 황실이 제공해 준 별관의 숙소를 사용하고 있었다. 평범한 제국의 기사라면 제국에 있는 본인의 거처에서 숙식을 처리했겠으나, 적린 기사단은 사정이 달랐기 때문이다.
카델은 제국 출신이긴 했으나 멸문을 당한 처지였고, 반은 집 없는 떠돌이인 데다 루멘은 마이뉴 왕국 출신이었다. 심지어 라이돈은 아예 종족이 달랐으니.
제국에는 그들이 묵을 수 있는 마땅한 거처가 없었다. 그렇다고 제국의 기사가 여관방이나 전전하며 다닐 수도 없는 노릇. 결국 그들의 처지를 고려한 황제가 직접 숙소를 내어 준 것이다.
‘길이 어디더라. 저쪽 정원을 지나면 나왔던 것 같은데.’
카델은 자신의 새로운 숙소를 향해 걸음을 서둘렀다. 부하들의 방은 전부 한 층에 붙어 있어서, 한꺼번에 불러 모아 다음 임무를 설명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별관에 도착하기 전, 누군가의 모습이 카델의 발목을 붙들었다.
별관과 이어진 작은 정원의 중앙을 차지한 커다란 석상.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새하얀 석상은 제국이 숭배하는 세븐 나이츠 ‘쟈닌’의 수호신, ‘켈리건’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었다.
켈리건은 자애로운 미소를 띤 채 눈을 감고, 양손을 곱게 모아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고 있었다.
은은한 달빛이 섬세한 조각상을 어루만지듯 쏟아졌다. 그리고 그 앞에 선 한 남자. 그림자처럼 어둠 속에 녹아든 그의 어깨 위로도 한 줄기의 달빛이 스며들었다.
‘……루멘?’
서 있는 자세에서부터 귀족적인 기품이 물씬 풍기는 사내였다. 단숨에 그의 정체를 알아본 카델이 걸음을 옮기자, 기척을 느낀 루멘의 고개가 돌아갔다.
“……대장.”
“이런 데서 뭐 하고 있어?”
“보다시피 석상을 구경하고 있지.”
켈리건의 석상을 가리킨 루멘이 가볍게 눈을 휘었다. 그의 옆으로 다가간 카델이 함께 석상을 올려보았다.
“갑자기 신앙심이라도 생긴 건가. 이런 늦은 밤에 굳이 제국의 수호신을 보러 나온 거야?”
“갑자기라니. 난 언제나 신앙심 넘치는 사람이었어. 기억 안 나? 환혹의 숲에 들어가기 전에도 난 대장을 위해 기도했었다고.”
“……그러고 보니 그런 일도 있었지.”
“그때는 마이뉴 왕국과 화이트 왕국의 신에게 기도했었는데. 이제부터는 제국의 신에게 기도해야 하나?”
농담 같은 질문이었으나, 그리 말하는 루멘의 얼굴엔 옅은 수심이 번져 있었다. 카델은 시선을 옮겨 루멘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언제나처럼 조각같이 아름다운 얼굴이었으나, 근심에 쌓인 표정과 더불어 분위기는 한층 어두워져 있었다.
근심이라니. 루멘은 뭘 걱정하고 있는 걸까.
문득, 카델은 불안감을 느꼈다. 루멘은 분명 본인의 진심을 전했다. 카델의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고, 그러기 위해 모든 걸 버리겠노라 약속했다. 그 진심을 의심하진 않는다. 하지만 본인의 모든 것을 내던지고 제국을 찾아온 지금. 그는 여전히, 본인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을까?
‘……아직도 안 뜨네. 시스템 창.’
감감무소식인 루멘의 입단 알림이 혹시라도 그의 그늘진 표정과 연관이 있을까 봐. 카델은 재회의 기쁨마저 날아갈 깊은 불안감을 느꼈다.
그는 괜스레 제 손바닥을 손톱으로 꾹꾹 짓누르며 괴롭혔다. 켈리건의 석상을 눈에 담았다가, 참지 못하고 다시 루멘을 돌아보았다. 여전히 석상을 올려 보는 루멘의 아름다운 얼굴은 깊은 상념에 잠긴 듯 카델의 진득한 시선에도 그를 바라봐 주지 않았다.
“후회하지 마.”
그래서 카델은 불쑥 속내를 내비쳤다. 선택을 후회하냐는 물음도 아니었고, 하지 말아 달라는 애원도 아니었다. 그저 후회 따위 입에 담지도 말라는, 투정에 가까운 명령이었다.
그제야 루멘의 시선이 움직였다. 그의 푸른 눈동자에는 약간의 놀라움과 당황, 그리고 일렁이는 웃음기가 담겨 있었다.
“갑자기?”
“가진 걸 전부 버려야 했던 건 네 쪽이고, 솔직히 말해서 난 얻는 것밖에 없어. 일일이 손익을 따지자면 볼 것도 없이 네가 훨씬 손해야. 손해 보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충분히 억울하다고 느낄 수는 있는데, 그래도……. 그래도 후회하지는 마.”
카델은 루멘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누군가 심장을 바늘로 콕콕 찌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안절부절못하게 되었으나, 티 내지 않으려 애썼다.
“……안 해. 후회 같은 거.”
루멘은 버릇처럼 검집 위로 손을 올렸다. 그리고 간질거리는 감정을 드러내듯 손끝을 세워 툭툭 건드렸다. 굳게 다물렸던 입매가 은은한 호선을 그렸다.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군. 내가 후회하는 것처럼 보였나?”
“청승 떠는 것처럼 보였거든.”
“오해야, 대장. 생긴 게 이렇다 보니 길가의 개미만 쳐다봐도 우수에 차 있다는 소리를 듣거든. 이번에도 그런 거겠지.”
“……재수 없어.”
차마 부정은 할 수 없어 인상만 구기자,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루멘은 잠시 눈을 내리깐 채 입술을 달싹이다, 조심스러운 속내를 꺼내 보였다.
“조금 걱정되는 건 있었어.”
“걱정?”
“어떻게든 전부 떨쳐 내고 애써 도망쳐 왔는데, 내가 그만한 가치를 보이지 못한다면. 가문은 대장이 날 망쳤다며 매도하려 들 테고, 대장은 내게 실망하겠지. 그다지 대단하지도 않은 놈을 기다리느라 시간만 낭비했다고 생각할지도 몰라.”
어울리지 않는 소심한 걱정은 루멘의 표정을 흐리게 만들었다. 여전히 그림같이 우아하고 흠잡을 곳 하나 없는 얼굴에 떠오른 어두운 감정은, 낯설었기에 소중했고, 그답지 않았기에 바로잡아 주고 싶었다.
매번 어떤 위험 속에서도 자신감을 잃지 않던 루멘이, 이런 사소한 걱정 때문에 판단력이 흐려진다는 사실이. 카델은 답답하면서도 꽤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이런 야심한 밤에 남의 나라 신이나 쳐다보면서 고민하고 있었던 거야? 결론은 냈고?”
“아직.”
그를 공격하는 진득한 의문과 기분 나쁜 의심은, 전부 혼자만의 힘으론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다. 간절히 손을 뻗어도 그 손을 잡아 주는 이가 없다면 속절없이 수렁에 빠져들 뿐이다. 이 놀랍도록 고고하고 오만한 남자는, 어이없을 정도로 늘 확신이 없었다.
카델은 비싼 값을 치러 그 사실을 배웠기에, 이번에는 실수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럼 내가 결론 내 줄게.”
카델은 루멘의 검으로 손을 뻗었다. 반사적으로 물러서려는 루멘을 무시하고 그대로 검을 뽑아 들었다. 달빛을 반사하는 날 선 검을 가볍게 돌려 보곤, 루멘의 의아한 낯에 내고 말했다.
“임명식, 이렇게 하는 거 맞나?”
대충 검을 어깨에 대고 그럴듯한 말을 하던데. 중얼거리는 카델의 모습에 그제야 의도를 파악한 루멘의 입술이 작게 벌어졌다. 잠시 멈칫하며 망설이던 표정에선 파문처럼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루멘은 카델의 뜻을 따라 정원의 잔디밭 위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정갈하게 예를 갖춘 자세로, 엄숙하게 카델을 올려보았다.
카델 역시 어설픈 행동과는 다른 진지한 눈빛을 하곤 루멘의 어깨 위로 장검의 면을 올렸다.
“그대가 내게 충성과 명예, 삶의 모든 투쟁을 바친다면, 나는 그대에게—”
“…….”
“……뭘 줄까?”
자연스럽게 이어 가고 싶었지만, 역시 즉흥 임명식은 어려웠다. 카델은 제법 장엄해져 가던 분위기를 깨뜨린 것이 멋쩍었으나 짐짓 표정을 굳히며 뻔뻔하게 굴었다.
“원하는 게 있다면 들어주지.”
“……이건 잘 쳐줘도 소꿉놀이 같은데, 대장.”
“시끄러워. 한 번밖에 못 본 걸 어떡해. 대충 장단 맞춰.”
“세상에 임명식에서 거래를 제안하는 사람이 어딨어.”
“아, 싫으면 관둬. 어쨌든 너는 누가 뭐래도 내 기사니까, 청승 떨 시간에—”
루멘은 엉망진창의 임명식이 허접한 끝을 맺도록 놔두지 않았다. 그는 꿇었던 무릎을 세우고, 검을 든 카델의 팔을 밀어 냈다. 그리고 한 손으로는 카델의 허리를, 다른 한 손으로는 카델의 뒷머리를 받친 채 그대로 고개를 꺾어 입술을 포갰다.
물 흐르듯 이어진 일련의 동작에, 카델은 제가 무슨 일을 당했는지도 인지하지 못한 채 눈을 끔뻑였다. 바로 코앞에 드리운 긴 속눈썹과 반쯤 내리깐 푸른 눈동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입술을 벌리며 들어서는 뜨끈한 열감에 뒤늦게야 깨달을 수 있었다.
툭. 떨어진 검이 잔디밭을 뒹굴고. 루멘이 한 걸음 다가가면, 카델은 한 걸음 물러났다. 하지만 그의 허리를 감싼 단단한 팔은 조금의 거리도 용납할 수 없다는 듯 매번 그를 바짝 조여 왔다.
단단한 콧등이 카델의 뺨과 광대에 가볍게 눌렸다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부드러운 입술이 거칠게 몸을 문대고, 거침없이 혀를 넣어 치열을 훑었다. 루멘은 이를 세워 카델의 입술을 잘근거리다가도 아파하는 그를 달래듯 살살 빨아들이는 등 종잡을 수 없이 태세를 바꿨다.
어찌할 바를 모른 채 허둥거리는 손을 쥐어 제 어깨 위로 올린 루멘이 카델의 머리칼을 쓸어내리며 그의 매끈한 귓바퀴를 매만졌다.
여유 없는 손길이 내내 카델의 귀에 박혀 있던 귀걸이를 뽑아냈다. 입맞춤에 몰입하던 루멘의 눈빛에 이채가 스쳤다. 그의 시선이 서서히 색이 바뀌어 가는 카델의 눈동자에 못 박혔다. 느릿하게 입술을 빨며 짙은 회색의 눈동자가 선명한 고동색으로 물드는 모습을 홀린 듯 지켜보았다.
그는 동요하는 카델의 눈빛을 받아 내며 뻣뻣하게 굳은 그의 혀를 휘감고, 조금 더 깊숙이 입술을 파묻었다. 물기 가득한 야릇한 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카델은 그를 밀어 내지 않았으나, 온전히 받아 주지도 못했다. 그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열정이 버겁다는 듯 겁먹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것이 서운하다거나, 서럽지는 않았다. 그저 사랑스러울 뿐이었다. 그렇게 경계하면서도 끝내 자신을 밀어 내지 않는, 카델의 조심스러운 애정이.
달뜬 호흡이 점차 소리를 높여 서로의 체온을 달궜다. 루멘의 어깨를 쥔 손에는 바짝 힘이 들어갔고, 망부석처럼 굳어 있던 몸에선 슬슬 여유가 생겼다. 카델은 정면으로 고정됐던 고개를 슬며시 비틀며 조금 더 편안하게 입술이 포개질 수 있도록 유도했다.
그에 내내 카델을 먹어 치울 듯 집요한 입맞춤을 이어 가던 루멘이 움찔하며 행동을 멈췄다. 그는 어느샌가 꽉 감긴 카델의 눈꺼풀을 바라보다, 천천히 입술을 떨어뜨렸다.
작게 벌어진 입술 새로 실처럼 얇은 타액이 늘어졌다. 루멘은 단단한 엄지로 카델의 아랫입술을 훑고는, 작게 헐떡이는 그의 모습을 눈에 담아냈다. 바르르 떨리는 눈가에 입을 맞추니 조심스럽게 올라간 눈꺼풀 아래로 다시금 고동색의 눈동자가 드러났다.
그가 그토록 기다렸던, 그토록 갈망했던. 모든 것을 버리고서라도 얻고 싶었던, 애타는 눈길이었다.
“아무것도 주지 않아도 돼.”
“무슨…….”
“대장은, 그냥 날 봐 주기만 하면 돼. 나의 충성, 명예, 삶의 모든 투쟁까지도…… 전부. 똑바로 지켜보면 돼.”
그저 지켜봐 주기만 한다면. 그는 언제까지고 카델의 옆을 지킬 자신이 있었다. 어이없을 만큼 손해 보는 장사였고, 어리석을 만큼 쉽게 모든 것을 내어 준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더 이상 멈출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