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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막 안의 기사들에게 명령을 하달한 소린이 드레프, 루멘과 함께 봉인의 앞에 섰다.
울룩불룩하게 다듬어진 근육질의 팔. 기름이 낀 것처럼 번들거리는 거무죽죽한 피부와 그 아래서 바글거리는 흡혈충.
고작 팔 하나가 빠져나왔을 뿐임에도 순간 기가 질릴 만큼 범상치 않은 힘이 느껴졌다. 아쉬브카는 고위 마족 중에서도 유독 끔찍한 일화들이 많이 기록된 편이었다. 그 이유를 알 것도 같다고, 루멘은 막연히 생각했다.
“제가 벌어 드릴 수 있는 시간은 길어야 5초 남짓입니다. 체감상으로는 3초도 되지 않을 테니, 완벽한 협공이 아니라면 실패라고 봐야 하겠죠.”
“그쯤은 이쪽도 알아. 완벽하지 않으면 시도도 안 할 거라고.”
드레프는 툴툴거리며 쌍검을 그러쥐었고, 루멘은 그런 드레프를 가만히 내려보았다.
‘예의 없는 녀석이군.’
소린이야 쌓인 연차에 경력, 지위까지 있는 데다 말투 자체에 남을 하대하는 느낌은 없기에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지만, 드레프는 아니었다.
갓 성인을 넘겼거나 그 언저리에 불과해 보이는 외모. 들은 바로는 경력도 얼마 되지 않았고, 심지어는 실력도 자신보다 뒤떨어졌다.
호계 기사단처럼 위계 뚜렷한 대규모 집단은 보통 실력이나 지위보단 경력의 기간을 따지는 편일 텐데. 정작 드레프의 불쾌한 말투를 가장 직접적으로 받아 내는 소린은 별다른 제지도 하지 않고 있었다.
‘끝내주는 뒷배가 있는 건지, 봐주고 있는 건지.’
이런 때에 남의 흠에 신경을 쏟고 싶진 않았으나, 호기심이 일기는 했다. 호계 기사단의 대대장이란 자리가 오로지 뒷배만으로 오를 수 있는 곳은 아니니. 소린이 봐주고 있다는 가정이 가능성은 높을 테다.
나름의 결론을 내린 루멘은 드레프의 건방진 태도를 무시하기로 결정했다. 어차피 건방짐의 정도로 따지자면 반이나 라이돈에 비할 바가 못 됐다.
“그럼 시작하죠.”
그리 말한 루멘의 신형이 단숨에 모습을 감췄다. 만약 그의 목표가 아쉬브카의 팔임을 알지 못했더라면 움직임을 따라잡는 것이 불가능했을 테다.
드레프는 바짝 긴장한 채 봉인을 주시했다. 루멘의 기척을 포착한 아쉬브카는 그의 기운이 느껴지는 방면의 피부를 팽창시켰다. 그리고 루멘이 아쉬브카의 팔꿈치를 디뎌 공중으로 몸을 물린 순간.
부르르르!
수백 마리의 흡혈충이 발사되듯 루멘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와 동시에, 루멘의 세계는 짧게 정지했다.
모든 소리가 사라진 정적인 공간 속에서, 그의 기다란 날숨만이 시간의 흐름을 알려 주는 전부였다.
극한까지 발휘된 동력은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자신에게 달려드는 흡혈충의 수와 위치를 완벽하게 파악했다. 어느새 검집에서 빠져나온 검날은 마치 검무를 추듯 공중에 현란하고도 유연한 궤적을 그려 넣었다. 그 세밀한 궤적을 피해간 흡혈충은 단 한 마리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할 일을 마친 그의 검이 본래의 위치로 되돌아갔을 때.
“지금!”
정지했던 세계가 다시금 박동했다. 루멘은 뒤로 허리를 꺾어 흡혈충의 습격을 피하고는, 그대로 몸을 회전해 바닥으로 착지했다.
5초.
드레프가 지체 없이 조준점을 노렸다. 교차한 황금색의 검기가 조금 전 아쉬브카가 흡혈충을 배출했던 팔꿈치 위쪽을 파고들고.
4초.
상처를 남긴 검기는 빠르게 사라졌다. 충격을 느낀 아쉬브카의 팔이 다시 한번 흡혈충을 배출하기 위해 부글거리자, 쌍검을 직각으로 치켜든 드레프가 조금씩 뒷걸음질 쳤다.
3초.
거리를 벌린 그는 다시 검기를 쏘는 대신, 검기가 남긴 상처의 중앙점을 향해 두 자루의 검을 창처럼 쏘아 날렸다.
2초.
아쉬브카의 살갗을 뚫고 처박힌 쌍검이 부르르 떨리고. 소린은 최대치로 끌어 올린 각력을 바탕으로 쌍검의 높이까지 뛰어올랐다. 그의 손에 들린 해머가 낮은 공명음을 울렸다.
1초.
소린은 한계까지 뒤튼 허리를 바로 세우며 힘 있게 해머를 휘둘렀다. 쿵, 소리와 함께 해머가 가격한 쌍검이 못처럼 깊숙이 처박히며, 그 위로 황금색 빛이 일렁였다. 미리 반대편으로 이동해 있던 드레프가 소린의 공격 시점을 맞춰 검을 소환한 것이다.
0초.
아쉬브카는 해머의 충격파도, 송곳처럼 날카롭게 팔을 관통하는 쌍검의 움직임도 막지 못했다.
쿠웅—
쌍검에 찢겨 나간 거대한 팔이 지면을 향해 추락하기 시작했다. 루멘은 계획의 성공을 가늠하기도 전, 흡혈충 장막을 향해 달려 나가며 외쳤다.
“반! 시작해라!”
*
흡혈충 장막의 좁은 구멍 사이로 기사들이 우르르 빠져나오고 있었다. 한 번 뚫린 구멍은 기사들의 이동으로 인해 쉽게 여물지 못했다. 카델은 그들의 탈출이 무언가의 전조라는 것을 감지했다.
‘아쉬브카의 힘이 약해졌어. 안쪽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줄 알았는데……. 대체 뭘 준비하길래 전력을 전부 바깥으로 빼내는 거지?’
이곳에서 장막에 흠을 낼 수 있는 사람은 루멘뿐이었다. 그러니 빠져나갈 구멍을 만든 루멘이라면 전말을 알고 있으리라. 그를 찾아 시선을 옮기자, 빠져나오는 기사들의 근처에 선 루멘의 모습이 보였다.
카델의 부름을 들은 루멘이 곧장 달려왔다.
“루멘, 안쪽에선 뭘 하려는 거야? 반은 어딨고?”
“남자다운 한 방을 준비 중이지.”
“남자다운…… 뭐?”
“장막을 강화하는 게 좋을 거야, 대장.”
카델은 고개를 치켜들어 아득히 높은 상공을 뒤덮은 흡혈충 장막을 올려 보았다. 루멘이 만든 틈새를 제외하고는 조금의 균열도 보이지 않는 탄탄한 장막이었다.
‘……그 기술을 쓸 생각인 건가.’
현재 반이 가진 기술 중 장막을 무너뜨릴 만한 큰 한 방이라면 [사자의 강]뿐이었다.
‘그거라면 내부의 인원까지 피해를 입을 수 있겠지. 그래서 전부 내보낸 건가.’
그럴듯한 추론에 카델의 미간이 작게 구겨졌다. 그는 급히 라이돈을 불렀다.
“라이돈! 봉인에서 빠져. 내 장막을 거둘 테니까, 네가 대신 전군을 감싸는 장막을 만들어 줘. 할 수 있지?”
“간단하지. 루멘은 못하는 일이지만, 난 아주 쉽고 빠르게 잘할 수 있다고.”
라이돈은 헛웃음을 뱉는 루멘을 흘기며 그대로 날아올랐다. 카델은 망설임 없이 마법사들을 보호하던 장막을 거뒀다. 때맞춰 달려들던 흡혈충은 순식간에 재생성된 얼음 장막에 가로막혔다.
그리고 그다음 순간.
마지막으로 장막에서 빠져나온 소린의 외침이 전장을 울렸다.
“전군! 몸을 보호하라!”
쿠구구구—
대지가 진동했다. 동시에 물씬 풍겨 오는 지독한 피 냄새는, 카델의 예상이 적중했음을 알리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몸을 감싼 얼음 장막 너머를 응시하며, 흡혈충의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빼곡하고 촘촘하게 드리웠던 흡혈충 장막은, 안에서부터 팽창하는 힘을 버티듯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미세하게 벌어진 좁은 틈새로 새어 나오는 붉은 기운.
마치 핏물처럼 장막 곳곳에 넘쳐흐른 가느다란 오라가 흡혈충을 붉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부화 직전의 알처럼, 얇아진 껍질이 부풀고 조여들기를 반복했다. 흡혈충의 날갯소리는 점점 거세어졌지만, 그럴수록 대지의 떨림과 피비린내는 진해져만 갔다.
‘온다.’
폭발 직전의 기운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카델은 라이돈에게 방어를 맡긴 채, 자신의 모든 마력을 봉인진 위로 쏟아부었다.
그와 동시에.
콰아아아—
흡혈충의 장막이, 폭발했다.
기어코 장막을 뚫고 나온 핏물이 범람하며 거센 파도처럼 지면을 덮쳤다. 억지로 압축되었던 오라는 막혀 있던 울분을 토하듯 맹렬하게 질주했고, 흐르며 닿는 모든 것들을 날을 세운 채 쓸어내렸다.
그 공격을 감당하는 이는 라이돈 하나였다.
“아하하! 무식한 힘이잖아, 반!”
라이돈은 상공에 떠올라 전군을 아우르는 얼음 장막을 유지했다. 빠르게 깎여 나가는 장막을 끝없이 보수하고, 카델의 장막에는 특별히 힘을 더 써 주었다.
밑 깨진 독처럼 빠져나가는 마력의 감각은 그에게 있어 절정 때의 흥분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라이돈은 아낌없이 마력을 부어 반의 공격을 감당했다.
장막을 깨뜨리며 뿜어지는 핏물은 막 개화하는 붉은 꽃봉오리를 닮아 있었다. 바닥에 붙어 해일 같은 핏물을 마주하고 있는 기사들에겐 전혀 공감을 얻지 못할 감상이었지만, 적어도 라이돈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붉은 꽃잎이 만개한 순간. 알리티스에 적막이 찾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