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2화 (192/521)

*

“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거래? 참… 존재감 한번 더럽게 뚜렷하네.”

드레프는 거칠어진 숨을 고르며 미간을 좁혔다. 그의 시야 속으로 흡혈충 사이를 가로지르는 푸른 섬광의 잔상이 어지럽게 새겨졌다.

루멘 도미닉.

소리 소문 없이 합류한 마이뉴 왕국 출신의 검사는, 아주 찰나의 순간 흐릿한 신형만을 남긴 채 봉인진 곳곳을 들쑤시는 중이었다.

눈으로 좇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속도. 그의 발이 바닥에 닿는 순간, 푸른 섬광의 선을 따라 흡혈충의 몸뚱이가 양단됐다. 그에 놀라 눈을 깜빡이면 겨우 찾아냈던 루멘은 다시금 사라졌고, 대신 전혀 다른 방향에서 또 다른 섬광이 새겨졌다.

말도 안 되는 움직임이었다. 사람의 것이라고는 도저히 믿기 힘든 스피드와 날쌘 발도술은 깔끔하다 못해 살벌하기까지 했다.

드레프 역시 어디 가서 속도로 밀리지 않는 검사였으나, 루멘은 격이 달랐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마이뉴 왕실에서 오랫동안 탐내던 인재라고 했다. 이번에 제국의 기사가 되지 않았더라면 왕국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겠지.”

함께 그의 움직임을 지켜보던 소린이 말했다. 그 또한 드레프처럼 루멘의 경이로운 발도술에 감탄하고 있었으나, 그보다 눈에 띄는 것은 따로 있었다.

‘오라의 힘인가. 점점 강해지고 있군.’

지금까지 별다른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던 적린 기사단의 광전사. 그의 오라가 빠른 속도로 증폭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관문 수호 당시, 셀레브의 몸을 직접 타고 올라 공격을 박아 넣는 거친 전투법을 구사하던 사내였다. 고위 마족의 마기를 밀어 낼 만큼 어마어마했던 오라를 기억한다.

‘저 힘으로 화이트 왕국의 마물 군단을 격퇴한 전적도 있다고 했지. ……잘만 한다면.’

적린 기사단의 구성원에 대해선 이미 조사를 끝마친 바였다. 그들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알아낼 순 없더라도, 전력에 관해서라면 확실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소린은 필사적으로 흡혈충 무리를 상대하는 호계 기사단을 둘러보며 빠르게 계획을 정돈했다.

한편, 그들의 생각을 알 리 없는 루멘과 반. 두 남자는 착착 진행되는 작업의 마무리를 짓고 있었다.

“이 정도면 충분해.”

혈류검을 개방한 반은 팽창한 오라를 느끼며 그 힘을 조절 가능한 범위까지 끌어 올렸다.

‘화이트 왕국에서 사용했던 것만큼 범위를 늘릴 순 없겠지만, 봉인진 내부를 채울 만큼은 될 거다. 그 정도면 이 흡혈충들을 모조리 쓸어버릴 수 있어.’

흡혈충들이 아쉬브카에게 돌아갈 수 없도록 만들어야 했다. 문제는 봉인진을 가득 채우고 있는 호계 기사단이 어떻게 [사자의 강]을 피하는가인데.

고민하는 반의 곁으로 루멘이 다가왔다. 그는 살짝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봉인의 균열을 올려보았다. 어깨까지 빠져나온 아쉬브카의 팔에선 여전히 흡혈충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으나, 그 수는 현저히 적었다.

흡혈충이 바닥났기 때문은 아니었다.

‘다른 뭔가를 준비하고 있는 건가. 움직임이 거의 없는 걸 보면 시간이 필요한 큰 공격인 것 같은데.’

무엇이든 실행되도록 놔둬선 안 된다. 놈이 공격에 집중할 수 없도록 무시 못 할 타격을 입혀야 했다.

“이봐. 네 냄새나는 공격으로 아쉬브카의 팔까지 잘라 낼 수 있겠어?”

“힘을 분산시킨 범위 공격이야. 아무리 많은 오라를 사용한대도 같은 양의 오라를 일격에 담은 위력은 못 돼.”

“그렇군.”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루멘이 반의 불친절한 얼굴을 돌아보았다.

“그럼 네 계획은 뒤로 미룬다.”

“뭐?”

“봉인 밖으로 빠져나온 놈의 팔을 잘라 낸 뒤, 거기서 나온 흡혈충까지 한꺼번에 쓸어버리는 계획으로 가자고.”

“두 가지를 한 번에 해치울 만큼 많은 피가 모인 건 아니야. 더 모을 시간도 없다고.”

“아무리 내가 반갑다지만 너무 나만 보진 말지 그래. 거북한데.”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냐.”

루멘은 금세 살기를 띤 반을 무시하며 맞은편을 턱짓했다. 그곳에는 내내 반의 염두에는 들지도 못한 호계 기사단의 인원이 포진해 있었다.

“넌 힘을 아껴 둬. 난 저쪽 기사들과 아쉬브카의 팔을 잘라 보도록 하지.”

있는 전력은 최대한 활용해야지 않겠는가. 반과 라이돈이라면 몰라도, 루멘은 집단생활에 제법 면역이 있는 사내였다.

“아쉬브카에게 접근하는 즉시 흡혈충이 달려들겠지만, 그것만 넘기면 다음 흡혈충을 배출하기 전까지 짧은 틈이 생깁니다. 그때를 노려 본체에 일격을 날린다면 팔을 잘라 낼 수 있어요.”

소린은 루멘의 계획을 전해 들으며 내심 놀라워했다. 그의 생각이 자신과 흡사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광전사의 힘을 이용해 흡혈충 장막을 부술 생각이었으나, 아쉬브카의 정적인 움직임에 의문을 느꼈다. 그의 본능은 아쉬브카의 육체를 이 이상 방치해선 안 된다고 외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아쉬브카의 팔을 베어 낸 뒤, 광전사의 힘으로 떨어진 팔과 흡혈충을 한 번에 쓸어버리자는 루멘의 계획은 제법 구미가 당기는 이야기였다.

“괜찮은 계획이군. 경의 발도술이라면 흡혈충이 움직이는 즉시 베어 낼 수 있겠지. 나와 드레프가 협동해 빈틈을 노리겠네.”

“기회는 한 번뿐입니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즉시 장막의 일부를 베어 내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 테니, 기사들을 이동시켜 주시죠.”

성공할 때까지 수차례 공격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무리였다. 계획의 성공을 위해 무모한 선택을 하면서까지 밀어붙이고 싶지는 않았다.

루멘은 드레프와 협동을 논하는 소린에게서 시선을 돌려 너머에 자리한 반을 보았다.

그는 최소한의 오라로 달려드는 흡혈충을 몰아내며 기운을 끌어 올리는 중이었다. 루멘이 아무리 많은 흡혈충을 베어 주었다 한들, 벌레에게서 나온 피의 양은 그리 많지 않다. 제한된 피의 양으로 최대치의 힘을 끌어내야 하는 것이다.

‘그동안 놀고 있던 게 아니면 성공하겠지.’

루멘은 반을 걱정하고 싶지 않았다. 믿고 있다기보다는, 그것조차 못하면 상종할 가치가 없다고 느낀다는 것이 옳았다.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일 테니. 루멘은 자신이 야박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어서 끝내고 싶군. 기껏 만나러 왔더니 얼굴 한번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시도 때도 없이 아른거리던 짙은 고동색의 눈동자. 너무도 그리웠던 카델의 또렷한 눈동자는 기대완 달리 잿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는 대충 짐작이 갔지만, 아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다시 원래 모습을 볼 수 있겠지. 그러니 대장과의 재회를 방해하는 저 성가신 마족을 완벽하게 봉인한 뒤, 다시 그를 찾아가야 했다. 자신을 기다려 준 단 한 명의 사람을.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