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계 기사단 측에도 쾌검을 구사하는 검사는 몇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루멘의 속도에 비할 바는 못 됐다.
그들의 검은 흡혈충의 움직임을 따라잡지 못했다. 운이 좋으면 베어 내고, 보통은 꽁무니를 쫓는 데서 그쳤다. 그것조차 다른 검사들에 비하면 상당히 빠른 축에 속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루멘은 달랐다. 그의 발도술은 검기의 잔상이 남은 후에야 베였다는 것을 깨달을 만큼 재빨랐다. 그것은 흡혈충이라고 다를 게 없어서, 놈들은 자신이 베였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한 채 검기의 잔상을 피해 흩어졌다가, 반 잘린 몸뚱어리를 후드득 떨어뜨렸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스피드. 흡혈충은 루멘을 저지하기는커녕 가닿지도 못한 채 차례차례 절명해 갔다.
대단한 기세였지만, 그렇다고 그 홀로 흡혈충 장막을 모조리 베어 낼 수는 없었다. 루멘의 속도 만큼이나 아쉬브카가 내뱉는 흡혈충의 물량 역시 어마어마했기 때문이다.
“오랜만이군, 반 헤르도스.”
그러나 루멘 한 사람이 파고 들어갈 만한 틈을 만들어 내기엔 충분했다.
“네 녀석이 여길 어떻게…….”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은 그만두지 그래.”
반은 흡혈충 장막을 뚫고 나타난 루멘의 모습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머릿속을 가득 메우고 있던 카델에 대한 걱정을 일시적으로나마 밀어 낼 만큼 충격적인 등장이었다.
루멘은 그런 반을 한 번 비웃어 주고는, 봉인진 내부를 채운 아군의 전력을 살펴보았다.
‘호계 기사단과 함께 움직인다는 얘긴 들었지만, 소린 살라모가 이끄는 대대일 줄은 몰랐군.’
기사들은 지쳐 보였으나, 다치거나 쓰러진 사람은 없었다. 그것은 그들의 실력을 증명하는 것과 동시에 소린의 지휘력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했다.
호계 기사단의 단장에 버금가는 실력자라더니. 과장된 소문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대로 소린을 찾아 지휘 내용을 전해 들을 수도 있었지만, 루멘은 그러지 않았다.
그의 대장은 소린 살라모가 아닌 카델 라이토스였으므로. 정보를 듣는다면 소린보단 반이 나았다.
“바로 견적 나오는군. 네 둔한 대검으로는 저 벌레들을 공격할 수 없으니, 피도 힘도 얻을 수 없었던 거지?”
“그래. 날파리처럼 성가신 네 검은 벌레를 상대하는 데 딱이겠지만, 내 대검은 남자답게 한 방 먹이는 데 특화돼 있거든.”
“벌레 한 마리 못 잡고 허우적대는 게 남자다운 건가? 놀랍군. 새로운 사실을 배웠어.”
다만 두 남자는 서로에게 무엇이 급한지 알고 있음에도 서로의 성질을 긁는 것이 더 중요한 자들이었다.
한참 쓸데없는 대거리를 하던 둘은 서로의 불쾌함이 극에 달했을 때서야 슬슬 본론을 꺼내 들었다.
“그러니까, 장막을 허물어뜨릴 만한 범위 공격을 시도해 보겠다?”
“네놈도 봤던 공격이다. 바스킨 마을을 쓸었을 때 사용했던 기술이지.”
“알아. 냄새나는 기술이라 기억해.”
“고상한 귀족 도련님은 피 냄새만 맡아도 비위가 상하시겠지. 어쨌든, 그 기술의 실행을 위해서는 흡혈충의 피가 필요하다. 네놈의 날파리 검술로 내 검에 피를 좀 먹여 봐.”
“마녀 때처럼 말인가? 이번에는 고생해 주는 보람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서로 숨 쉬듯 시비를 걸어 가며 겨우 목표를 통일한 그들은, 더 미룰 것 없이 작업을 개시했다.
*
루멘 도미닉의 등장은 전장의 무수한 흐름을 바꾸기에 적합했으나, 카델의 정신 상태만큼 크게 변화시키진 못할 것이었다.
루멘이 이곳 알리티스에 존재한다는 것. 그가 흡혈충에게 포위된 반의 옆에 있다는 것. 언제든 부르면 대답할 거리에 있다는 사실이, 카델의 심신을 크게 안정시켰다.
돌발 퀘스트가 실패하여 스토리 진행이 엉망이 될지라도, 그 고난을 뚫지 못해 좌절하는 일은 없으리라는 확신이 피어날 정도였다. 루멘은 카델에게 그런 의미였다.
처음부터 그렇게나 애간장을 녹여 대 카델을 고통스럽게 했음에도 그랬다.
“카델, 루멘이 안 왔어도 카델은 내가 구해줬을 거야. 알아? 알지? 꼭 알아 둬야 해.”
루멘의 도움으로 멀쩡히 빠져나온 카델은 다시금 마법사들을 보호하는 장막을 둘렀다. 자연스럽게 라이돈은 봉인 복구 작업에 합류하게 됐으나, 그에겐 다가온 카델에게 본인을 어필하는 일이 더욱 중요해 보였다.
10분만 지났어도 카델은 자신이 구해 줬을 터인데. 그 짧은 시간을 앞지른 루멘이 퍽 아니꼬운 듯, 그의 등장이 반가운 기색조차 없었다.
카델은 그런 라이돈을 다독이며 옆에 있는 마틴에게 봉인의 진행도를 물었다.
“절반 이상은 진행됐습니다만, 아쉬브카의 힘이 점점 강해지고 있어요. 장막 안쪽에서 아쉬브카의 체력을 조금이라도 깎아 줘야 봉인을 무사히 마무리 지을 수 있을 겁니다.”
쉽지 않을 것이다. 흡혈충의 스피드를 따라잡지 못한다면 범위로라도 압도해야 하는데, 기사들의 검기로는 한계가 있었다. 애초에 기사단 전력에 검사와 마법사를 섞는 것은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보강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마법사가 전력에서 아예 제외된 상황이라면, 전투의 진행은 더뎌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마법사들의 장막을 유지해야 하고, 라이돈은 봉인 작업에 착수하면서 내 보조까지 맡아 줘야 해. 아쉬브카 견제에 합류하긴 힘들다.’
기대를 걸어 볼 만한 것은 흡혈충의 속도를 웃도는 루멘의 검기와 반의 광범위 공격.
‘소린과 드레프까지 힘을 보탤 수 있다면 아쉬브카의 힘을 억누르는 것도 불가능은 아닐 텐데.’
그것이 막연히 바란다고 이루어지는 일은 아니었으니. 지금은 봉인진 내부의 아군을 믿고 봉인을 지속하는 수밖에 없었다.
“다들 아쉬브카의 위험성은 충분히 인지하고 있을 겁니다. 믿어 보죠. 지금부터는 저도 봉인 복구에 힘을 보태겠습니다.”
“……마력에 여유가 있겠습니까?”
“내부 인원에게 둘렀던 장막이 해제됐어요. 저쪽에겐 좋지 못한 일이지만, 덕분에 남는 마력이 생겼습니다. 마력이 고갈될 때까지 버틸 생각은 없으니 걱정 마시죠.”
마틴의 염려를 깔끔하게 떨쳐 낸 카델이 봉인진 외곽에 제대로 자리를 잡았다.
‘내가 여기서 할 수 있는 건 부하들을 믿고 맡은 일을 완벽하게 해내는 것뿐이야.’
그의 부하들은 언제나 그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으니. 이번에도 그러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