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9화 (189/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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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계 기사단과 합류한 카델은 소린에게 아쉬브카와 흡혈충에 관한 정보를 전했고, 그 즉시 아군은 전술을 수정했다.

‘도무지 줄어들 기미가 안 보이는군.’

아무리 검을 휘둘러도 흡혈충의 수는 꾸준히 아군을 압도했다. 소린은 장막을 두들기는 흡혈충 무리를 사납게 베어 내며 전황을 살폈다.

봉인진 위에는 드레프와 반을 포함한 검사들이 장막을 두른 채 흡혈충을 소탕하고 있었다. 바깥에는 마틴과 카델, 라이돈을 포함한 마법사들이 최소한의 보조를 진행 중이었고.

한시라도 빨리 흡혈충을 소탕해야 저들이 봉인진을 복구할 수 있다. 속도가 늦춰질수록 복구는 점점 힘들어질 것이다. 지금과 같은 대규모의 적이라면 대형 마법을 난사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소탕법이었으나, 이번에는 마법사들의 마력을 최대한 아껴 두는 것이 중요했다.

봉인에 난 균열의 크기가 크기인 만큼, 그 너머에 버티고 있는 것이 고위 마족인 만큼. 복구에 들어갈 마력 역시 만만치 않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흡혈충의 속도를 따라잡을 만한 전력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지.’

그나마 기동성 좋은 드레프의 부대가 힘을 쓰고는 있지만, 그들만으로 거대한 봉인진을 가득 메운 흡혈충의 증식을 막는 데엔 무리가 있었다. 뛰어난 광전사인 반 헤르도스 역시 그 힘의 원천인 ‘피’를 얻는 데에 어려움이 있는 듯하니.

골머리 아픈 상황에서도 꿋꿋하게 검을 휘둘러야 했다. 그런 소린의 괴로운 싸움을 지켜보며, 카델은 함께 대기 중인 마법사들에게 한 가지 방도를 제안했다.

“제가 기사단 전원을 보호할 장막을 생성할 테니, 곧바로 복구 작업에 착수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쉬브카를 죽이거나 균열을 틀어막지 않는 한, 흡혈충의 수는 절대로 줄어들지 않는다. 이대로 전투를 이어 가 봤자 균열만 심해질 뿐이었다. 그러니 최선은 지금 당장 마법사들을 투입해 봉인을 재구성하는 것이었고, 그를 위해선 마법사들이 작업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야 했다.

나름대로 타당한 이유였으나, 마틴은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들었다는 듯 오만상을 찌푸렸다.

“카델 경 혼자 장막에 들어가는 마력을 전부 감당하겠다는 겁니까?”

“예. 한 명이 빠진 만큼 복구 작업에 구멍이 생기긴 하겠지만, 지금은 균열이 이 이상 커지기 전에 막는 게 더 중요합니다.”

“그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경의 계획은 위험하고 무모해요. 실력을 폄하하려는 건 아니지만, 기사단 전체를 아우르는 장막은 실현할 수 있을지언정 오래가진 못할 겁니다. 봉인 복구가 얼마나 걸릴지도 모르는데, 유지조차 불확실한 장막 하나만을 믿고 사지로 걸어갈 순 없죠. 작은 실수로 장막에 구멍이라도 뚫렸다간 소중한 전력을 상실하게 될 테니까요.”

카델이라고 마틴의 걱정을 염두에 두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다른 때였다면 그도 순순히 물러섰을지 모른다. 마틴의 말대로 위험 부담이 너무나 큰 계획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나한텐 다른 대책이 생길 때까지 낭비할 시간이 없다고.’

이곳에서 아쉬브카를 막지 못한다면 스토리에 어떤 지장이 갈지 모른다. 안 그래도 가물가물한 스토리의 흐름이 뒤바뀐다면, 그가 알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결말을 맞이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 카델은 균열을 막지 못해 아쉬브카가 인세에 등장하고 만다는, 그 최악의 상황을 어떻게든 모면해야 했다.

“결과가 성공일지 실패일지는 해 봐야 아는 겁니다.”

대규모 장막을 만들어 본 경험은 없지만, 그렇다고 시도조차 하지 않고 포기할 수는 없다. 카델은 2속성의 마력으로 마력의 손실을 최소화한 뒤, 마법사들의 위로 원형 장막을 둘렀다. 본체는 불이되, 불꽃을 휘감는 나선형의 바람을 엮어 시야를 확보한 독특한 장막이었다.

마틴은 영창도 없이 갑작스레 생성된 장막에 놀라 흠칫했고, 라이돈은 제게도 장막이 둘러졌다는 사실에 즐거워했다.

“장막의 마력이 위태로워진다면 제 부하인 라이돈이 가장 먼저 알아챌 겁니다. 그 즉시 환언을 통해 여러분에게 경고할 테니, 그 전까진 봉인 복구에만 집중해 주시면 됩니다.”

“카델, 내 의견은?”

“더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는 건 마틴 경도 잘 알고 계실 텐데요.”

카델의 진중한 시선에 마틴이 침음했다. 그 역시 여기서 더 시간을 끌었다간 봉인 복구 자체가 어려워지리란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카델의 계획이 성공하기만 한다면, 최선의 결과를 낼 수 있을 테다.

고민하던 마틴은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고, 카델은 그 즉시 아군 전체를 아우르는 장막을 생성했다.

“8대대! 지금부터 대열을 맞춰 봉인진을 둘러싼다. 각자의 위치를 기억하고, 자리를 찾는 즉시 복구 작업에 착수하도록!”

마틴의 명령에 8대대의 마법사들이 서둘러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카델은, 제자리에 멀뚱히 선 라이돈에게 말했다.

“들었지? 너도 따라가서 봉인 복구해. 내 마력의 흐름이 조금이라도 이상해졌다 싶으면 환언으로 경고해 주고.”

“……좋아하니까 해 주는 거야, 카델. 명심해 둬.”

“나도 좋아하니까 시키는 거야. 새겨 둬.”

“아하하! 뻔뻔해라!”

뻔뻔하다면서도 카델의 대답이 썩 마음에 들었는지, 라이돈은 군말 없이 봉인진 사이로 날아갔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카델은 떨리는 숨을 가다듬었다.

“벌써부터 죽을 맛이로군.”

자신이 저지른 일이니 어떻게든 성공시켜야 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빌어먹을 돌발 퀘스트를 무사히 클리어하리라. 결연해진 시선이 전방을 응시했다.

붉어진 눈동자가 날카롭게 사위를 훑어 내렸다. 무리 지은 흡혈충의 날갯짓은 골을 울릴 만큼 극악한 소음이 되어 기사들의 집중력을 흩뜨렸으나, 반에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지금 그에게 있어 ‘피를 모으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었으니.

쐐애액!

응축된 검기가 바람처럼 굽이치는 흡혈충 무리를 노렸다. 정확히 무리의 중심을 가로지르는 공격이었으나.

“……젠장.”

검기에 닿기 직전, 촘촘히 뭉쳐 있던 흡혈충이 두 갈래로 갈라졌다. 여유롭게 검기를 회피한 흡혈충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뭉쳐 먹잇감을 찾아 나섰다.

전투에 돌입한 후부터 계속 이런 식이었다. 반의 검기는 결코 느리지 않았으나, 흡혈충의 움직임은 그를 상회했다. 수천 마리나 뭉쳐 있으니 몇백 정도는 당해 줄 법도 한데. 놈들은 하나의 자아를 가진 것처럼 절도 있고도 통일된 움직임을 보였다.

‘피가 부족해.’

덕분에 반은 수도 없이 검기를 날려 댔음에도 아직까지 [혈류검] 상태에 돌입하지 못했다. 그나마 근처에 있던 마물도 흡혈충의 먹이가 된 지 오래. 이곳에서 반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대검을 휘둘러 흡혈충을 멀리 내쫓는 것뿐이었다.

이런 무력감이라니. 언데드 무리를 상대할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자신의 공격이 아무런 타격도 입히지 못함을 인지할 때마다, 자신을 둘러싼 화풍(火風)의 장막의 주인을 떠올리게 됐다.

전군을 아우르는 화풍의 장막. 계획에 없던 움직임을 보이는 마법사들. 정확한 사정은 몰라도, 누구에 의해 계획이 변동됐는지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이런 광범위한 마법을 멀쩡하게 유지할 수 있을 리 없어. 이대로라면 단장이 또 위험해진다.’

흡혈충에게 유효타를 먹일 방법은 크게 두 가지였다. 놈들을 웃도는 공속으로 움직임을 압도하거나, 놈들의 행동반경을 포괄하는 광범위 공격을 난사하는 것.

안타깝게도 두 방법 모두 반에게는 무리였다. 애초에 그는 속도로 밀어붙이는 타입이 아닌 데다, 광역 공격을 위해서는 충분한 양의 피를 모아야 했다.

‘사자의 강이라면 봉인진을 쓸어버릴 수 있을 텐데.’

그걸 할 수 없으니 미칠 지경이었다. 카델이 쓰러지는 꼴을 두 번은 볼 수 없었고, 그 비극을 막기 위해서라면 목숨을 바칠 각오까지 되어 있었으나. 각오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다시금 자신의 한계를 절감하자 저절로 과거의 감각이 떠올랐다. 그날, 그때, 그 순간. 카델의 손을 잡고 진창을 빠져나와, 앞을 가로막은 거대한 벽을 깨부쉈던, 그 짜릿한 감각을.

‘다시 한번 느낄 순 없는 건가.’

간절함이라면 지금도 뒤지지 않았고, 수련 또한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새로운 벽은 나타났으며, 이전보다 훨씬 드높고 아득하기만 했다. 적어도 지금 여기서 간단히 부수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 절망적인 감정을 담아 대검을 휘두르던 때.

콰과가각.

단단한 암석이 쪼개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소린의 외침이 전장을 울렸다.

“균열이 벌어졌다! 전군! 마법사 보호를 최우선으로! 놈이 봉인을 방해하게 두지 마라!”

반사적으로 움직인 시선이 중앙에 떠오른 봉인에 닿았다. 팔 한쪽만이 간신히 빠져나와 있던 녀석의 몸뚱이가 이제는 어깨와 한쪽 가슴팍까지 드러나 있었다. 늘어난 면적을 따라 아쉬브카의 흡혈충 역시 수를 늘렸다. 부글거리며 끓어오르는 살갗 아래에서부터 파생되는 무수한 흡혈충.

이를 악문 그가 다시금 검기를 응축했다.

‘시간을 끌수록 단장의 상태가 위험해질 거야. 방법이 없대도 해내야 한다.’

그러나 새롭게 태어난 흡혈충의 움직임은 이상한 구석이 있었다. 처음엔 상대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달려들던 놈들이, 지금은 무언가를 탐색하듯 공중을 배회했다.

저들끼리 새까맣게 뭉친 흡혈충은 자리를 잡듯 조금씩 이동하기 시작했다. 단단하게 뭉친 흡혈충은 벌레 떼라기보단 하나의 운석처럼 보였고, 실제로도 운석처럼 빠르고 묵직하게 하강했다.

“무슨……!”

수백 마리씩 무리 지은 흡혈충 덩어리가 각기 다른 방향을 향해 쏘아졌다. 잔상이 남을 만큼 재빠른 움직임에 놈들을 상대하던 기사들의 눈빛이 황망해졌다.

흡혈충은 더 이상 기사들을 노리지 않았다. 그들은 봉인진을 둘러싼 마법사를 향해 달려들었다.

“뭣들 하고 있어! 마법사를 보호하라는 말 안 들려!”

드레프의 성난 외침에 흡혈충의 움직임을 좇던 기사들이 서둘러 태세를 전환했다. 그들은 마법사들의 위로 우박처럼 떨어져 내리는 흡혈충을 향해 검기를 날렸다. 당연하게도 검기는 흡혈충 무리를 흩뜨리는 데서 그쳤지만, 그렇게라도 해야 했다.

그들의 사이에서, 반은 가장 먼저 카델을 찾았다. 카델은 봉인진 바깥에 정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그의 주위로도 장막은 둘러져 있었으나, 아군의 것에 비해 그 두께와 크기가 보잘것없었다.

흡혈충은 봉인진을 둘러싼 마법사들만 노렸지만, 언제 노선을 틀어 바깥의 카델을 공격하려 들지 몰랐다.

‘내가 지켜야 해.’

처음부터 그는 제국에 충성하지 않았다. 그가 충성하는 것은 오로지 카델뿐이었고, 자신의 목숨보다 우선시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 또한 카델이었다. 때문에 그는 마법사들을 보호하려 고군분투하는 기사들을 헤치며 카델에게로 달려 나갔다.

그러나 그가 정확히 열 걸음을 뻗은 순간.

솨아아악—

뭉쳐 있던 흡혈충이 단숨에 흩어져, 봉인진을 통째로 휘감고 올랐다. 봉인진의 경계를 따라 원형으로 솟구친 놈들이 뚜껑을 덮듯 내부를 차단했다.

봉인진 내부의 기사들과 외곽의 마법사들을 격리한 것이다.

“이런 빌어먹을 벌레 새끼들이!”

예상치 못한 상황에 가장 먼저 드레프가 욕설을 지껄였고, 소린은 혼란한 부하들을 진정시켰으며, 반은 그저 망연히. 흡혈충이 만들어 낸 돔 형태의 장막을 올려다보았다.

‘……안 돼.’

서늘한 예감이 등줄기를 타고 올랐다. 아쉬브카는 봉인이 재개되고 있음을 눈치챘다. 그렇기에 마법사를 격리해 아군의 도움을 받지 못하도록 유도했다. 몸이 절반도 채 빠져나오지 못한 상태로, 최대의 효율을 뽑아낸 것이다.

놈은 영리했다. 그 말인즉슨, 이 봉인 작업을 지탱하고 보호하는 이가 누구인지 분별해 낼 머리를 갖췄다는 소리였다.

아쉬브카의 목표가 카델이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으리라.

모든 신경이 바싹 조여졌다. 조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정신이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반은 어떻게든 평정을 되찾으려 애썼다. 그래야만 카델을 구할 수 있으리란 본능에서였다.

‘바깥에는 라이돈이 있다. 녀석이라면…… 단장을 도울 수 있을 거야.’

그렇게 믿어야 했다. 죽이고 싶을 만큼 거슬리지만, 그만큼 뛰어난 실력자이기도 했으니. 반은 간절한 바람과 함께 대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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