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6화 (186/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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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인 상태는 멀쩡한 모양이네. 다행이지. 그렇게 규모 큰 봉인에 문제가 생기면 골치 꽤 아팠을 텐데. 안 그래, 소린?”

“그래. 다른 봉인에도 이상이 없다면 좋겠군.”

카델의 신호를 확인한 뒤, 호계 기사단은 곧장 봉인진을 향해 진군했다. 드레프는 소린과 함께 전열의 선두에서 말을 몰며 입술을 삐죽였다.

“좋기는. 제국 봉인에 이상이 없으면 다음은 외부잖아. 외부 봉인 구역 환경이 그렇게 척박하다며? 가 본 적 있어?”

“없다. 그래도 제국인들이 위험 속에서 살아가는 것보단 우리가 고생하는 게 나아.”

“잘나셨네요.”

드레프의 빈정거림에 그들과 가까이 있던 마틴이 딴지를 걸었다.

“드레프 경, 지휘관인 소린 경에게 그게 대체 무슨 태돕니까? 아무리 가까운 사이래도 그렇지, 그렇게 위아래 없이 굴면 다른 기사들이 뭘 보고 배우겠냐고요.”

“배우긴 뭘 배워. 내가 알려 줄 수 있는 건 검술뿐이야. 예의 같은 건 본인들 가문에서 알아서 배워 오라고 해.”

“소린 경! 가만히 있지 말고 관리 좀 하십쇼. 드레프 경 때문에 말 나온 게 한두 번이 아니잖습니까. 이렇게 다른 기사단과 협력할 때까지 일관적으로 예의 없이 구니, 어디 가서 고개 들기가 부끄럽습니다.”

마틴이 도움을 요청하듯 소린을 보았지만, 드레프는 소린이 입을 열기도 전에 코웃음을 쳤다.

“부끄럽기는. 남의 기사단에 찾아가서 시비나 거는 네 부하들 관리나 해라.”

“뭐, 뭐라고요?”

“부끄러워 죽겠어, 아주.”

드레프와 마틴은 날 선 대화를 주고받으며 언성을 높였다. 소린 역시 끼어들 생각이 없어 보였기에, 둘의 언쟁은 봉인진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되는 듯싶었으나.

“……뭐야?”

그들이 넘는 언덕 너머로, 보여선 안 될 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늘을 가로지르며 발사되는 화염구. 거대한 화염구가 태양처럼 강렬한 빛을 발하며 호계 기사단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그를 발견한 드레프가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신호가 번복됐잖아.”

사건 발생 10분 전.

카델은 봉인진 활성화에 성공했다. 구역의 마물 수가 적다는 것은 봉인에 문제가 없다는 것을 의미했고, 그렇다면 아군이 오길 멀뚱히 기다리는 것보단 미리 일을 진행해 두는 편이 나았기 때문이다.

“이게 봉인이군요. 생각보다…… 훨씬 거대하네.”

반은 한껏 목을 꺾어 마법진 한가운데에 떠오른 거대한 타원형의 ‘봉인’을 올려다보았다. 실체화된 봉인은 오로라 같은 자연 현상에 가까워 보였다. 비틀린 공간의 틈새처럼 보이기도 했다.

또한 봉인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묘한 색을 가졌는데, 다양한 색의 기름을 풀어 혼탁하게 오염된 호수처럼 비치기도 했다.

그렇게 반이 한마디로 정의 내릴 수 없는 신비로운 봉인의 모습에 감탄하고 있을 무렵. 함께 그것을 지켜보던 카델은 깔끔한 결론을 내렸다.

‘그냥 게이트잖아. 만화 같은 데서 자주 봤지.’

이쪽은 드나드는 통로가 아니라 통로를 막는 자물쇠라는 점이 다르긴 했지만, 너머에 괴물이 있다는 부분은 상통했다.

“어쨌든, 게이트…… 아니, 봉인에 이상은 없는 것 같네. 균열도 안 보이고, 마력 흐름도 정상적이야. 이대로 아군을 기다리다가 강화 작업만 하면 되겠어.”

“지루해, 카델. 고작 이런 냄새 나는 봉인을 보려고 먼 길을 날아왔다니. 인간들의 선택은 항상 실망스러워.”

“미안한데 나도 인간이거든.”

“아하하! 그래서 카델이 특별한 거야!”

공중에서 무료하게 몸을 늘어뜨리던 라이돈이 카델에게 달려들자, 반이 그 앞을 가로막으며 으르렁거렸다. 카델은 쉬지도 않고 반복되는 두 남자의 싸움에 질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 문득, 이상한 점을 느꼈다.

“……라이돈.”

“응?”

“이 봉인에서 냄새가 나?”

“응. 마족 냄새가 나. 지독해서 코를 뜯어 버리고 싶을 정도야. 점점 심해지는 것도 같고?”

냄새가 왜 나지?

봉인은 마계를 인간계로부터 완전히 단절해 고립시키기 위한 용도였다. 단 한 마리의 마족도 인간계에 발을 들이지 못하도록, 숨구멍까지 틀어막은 것이다. 그 봉인엔 분명 이상이 없다.

그러니 상식적으로, 이곳에선 마족의 냄새 비스무리한 것도 맡아져서는 안 됐다.

‘설마 주변에 마족이 숨어 있나?’

상공에서 내려다보았을 때는 마물밖에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마족이 있었다면 라이돈이 가장 먼저 알아차렸을 것이다. 지금도 그는 ‘봉인에서’ 냄새가 난다고 하지 않는가.

급격히 어두워진 카델의 안색을 따라 반과 라이돈의 표정도 변화했다. 반은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끼며 천천히 대검을 그러쥐었고, 라이돈은 애매한 미소를 머금은 채 봉인을 응시했다.

“같은 게 아니라 점점 심해지네. 카델, 뭔가가…… 오고 있나 본데?”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쩍. 쩌저적.

두꺼운 유리창에 금이 가듯, 봉인의 하단부에서부터 미세한 균열이 번지기 시작했다. 얇은 균열 사이로 빛줄기처럼 번지는 검은 기운이 새어 나왔다. 그를 발견한 카델이 기겁하며 봉인진 위로 손을 올렸다.

“지금 장난해?”

방금까지 멀쩡히 버티고 있던 봉인이 하필 지금 파괴되고 있다. 심지어 아직 아군도 도착하지 않은 이 시점에.

카델은 봉인진 위에 마력을 불어넣으며 서둘러 봉인의 복구를 시도했다.

“라이돈! 너도 와서 도와!”

“이제 좀 재밌어지는 것 같아!”

“재미는 무슨!”

금세 신이 난 라이돈이 카델의 옆자리로 내려갔다. 그렇게 봉인의 균열을 저지하려는 두 마법사의 사이에서, 유일한 검사인 반은 균열을 주시하고 있었다.

균열의 틈새에서 반갑지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그 기운의 정체를 알아내는 데엔 그리 큰 힘이 들지 않았다.

“……또 마기인가.”

아직 개방하지도 않은 오라가 봉인 너머의 기운에 반응하고 있었다. 단순히 마계의 기운이 넘어오고 있기 때문인지, 균열의 주인이 범상치 않은 마기의 소유자이기 때문인지. 확실한 것은 없었지만, 둘 중 어느 것도 달갑지 않았다.

‘저번처럼 감화되면 곤란한데.’

셀레브라는 고위 마족과의 전투는 반에게 많은 깨달음을 안겨 주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오라 운용의 한계’였다. 그는 분명 에르고와의 전투에서 한 단계 높은 경지에 올라섰으나, 그럼에도 여전히 오라를 완벽하게 다룰 수 없었다.

‘완벽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어. 단장을 지키지 못하는 힘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어떤 상황에서든, 어떤 적을 맞닥뜨리든. 완벽하게 오라를 다룰 수 있어야 했다. 문제는 아직 그 방법을 알아내지 못했다는 점이다.

‘거인화 한 셀레브를 상대했을 때는 오라의 통제가 수월했어. 하지만 내가 의도적으로 힘을 다스린 건 아니었지.’

그때의 감각조차 가물가물했다. 수련을 게을리한 것도 아니건만. 아무리 노력해도 그날을 제대로 복기해 낼 수는 없었다. 반은 짜증스레 혀를 차며 제멋대로 개방되려는 오라를 억눌렀다. 그러나 바로 그때.

콰가각—

아슬아슬하던 균열이 벌어지며, 그 안에서부터 기이한 형태의 손아귀가 튀어나왔다.

“……!”

반사적으로 몸을 물린 반이 바로 코앞으로 드리운 날카로운 손톱에 눈을 부릅떴다.

갈고리처럼 기다랗게 휜 노르스름한 손톱과 쭈글쭈글한 암녹색의 피부, 엄지 없이 네 개뿐인 손가락. 그 모든 것을 제치고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바로 손의 크기였다.

황당할 정도로 거대한 손이었다. 손이라기보단 하나의 위협적인 무기처럼 보였다. 그것도 오우거들이나 들고 다닐 법한 무식한 크기의 무기.

“반! 괜찮아?”

“이쪽은 걱정하지 마세요, 단—”

뒤로 물러서며 카델을 안심시키려던 반은, 정체불명의 손 너머로 펼쳐진 장면에 그대로 말문을 잃었다.

좀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넓게 벌어진 균열의 틈새로, 수십 개의 눈알이 덕지덕지 달라붙어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끔찍한 광경이었다. 반은 되도록 저것들이 튀어나오지 않고 그대로 다시 봉인되기를 바랐으나, 안타깝게도 그의 희망은 빠르게 멀어져 가는 중이었다.

“이런 씨, 왜 마력을 부어도 부어도 그대로야!”

“카델, 그렇게 성질낸다고 일이 해결되진 않아. 포기하고 저기서 튀어나오는 마물이나 잡자?”

“싫어! 안 잡아! 안 싸울 거라고!”

괜히 봉인 관리에 대대 단위의 마법사를 투입한 게 아니었다. 카델과 라이돈이라는 천재 수준의 마법사가 온 마력을 쏟아붓고 있음에도, 흐트러진 봉인의 기운은 되돌아갈 낌새를 보이지 않았다.

필사적인 노력 끝에, 카델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자신은 이번 임무에서조차 더러운 꼴을 보게 되었다는 걸.

‘일이 이따위로 흘러가도 되는 거야?’

절망한 그가 미련이 덕지덕지 남은 동작으로 봉인진에서 손을 떼어 냈다. 라이돈 역시 포기를 외치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카아아악!

균열이 사방으로 번지며, 끔찍한 울음소리가 대기를 울렸다. 카델은 반쯤 울 것 같은 기분이 되어 하늘을 올려보았다.

“……쉽게 끝날 거라 기대한 내가 바보지.”

짙은 한숨과 함께 거대한 화염구가 하늘을 가로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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