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엘은 입단하지 않았다. 하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는 여전히 황혼 기사단의 단장이었고, 봉인을 위해 제국에 파견된 상태이니.
때문에 시스템 상으로 가르엘 몬자시는 카델의 기사가 아니었으나. 카델은 그날 밤, 가르엘의 충성을 손에 넣었다.
‘자기 신분은 알아서 잘 정리하고 돌아오겠다고 했지만……. 대체 뭘 어떻게 할 생각인지.’
가르엘은 카델의 사람이 되겠노라 맹세했다. 또한 자신의 방식대로 일을 처리한 뒤, 짊어진 것 없는 깨끗한 몸으로 입단하겠다는 약속을 하기도 했다.
정확한 방법을 말해 주지 않으니 어떤 식으로 일을 처리할지는 알 도리가 없었으나, 카델은 가르엘을 믿어 보기로 했다.
믿는 수밖에 없었다. 기약 없는 출정은, 카델과 가르엘을 아주 먼 곳으로 찢어 두었으니까.
“오늘 밤은 이곳에서 보낸다. 각 대대는 인원을 추려 돌아가며 보초를 서고, 해가 뜨는 대로 이동할 테니 늦지 않게 준비해 두도록.”
제국의 봉인이 위치한 제10구역, 구릉 지대 알리티스.
그곳에서 카델은 호계 기사단 측의 지휘관 소린 살라모, 대대장 드레프 엔티, 마틴 피커와 함께 내일의 일정을 논의했다.
막사 안에 모인 네 남자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소린은 테이블 위로 알리티스의 지형이 그려진 지도를 펼치며 말했다.
“제10구역의 봉인은 제국의 봉인 중 규모가 가장 큰 만큼, 이상이 생겼다면 상당수의 마물이 발견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니 내일 날이 밝는 대로 봉인과 가까운 서쪽 언덕으로 향한 뒤, 기사를 선별해 정찰을 보내도록 하지.”
“은밀하게 움직이는 게 중요하겠네. 만약 마물이 포진해 있다면 들키는 즉시 포위당할 테니까.”
유심히 지도를 들여다보던 드레프가 턱을 문질렀다. 봉인 구역의 상태를 살피는 건 중요한 작업이다. 섣불리 전군을 이끌었다간 기습을 당할 우려가 동반되고, 아무런 정보도 없이 몰아치는 마물을 상대하느라 체력을 낭비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요한 만큼 위험한 일이기도 했다.
봉인이 완벽한 상태라 주변이 안전하다면 몰라도, 마물이 포진해 있다면 함정에 빠질 위험이 컸다. 하지만 은밀한 정찰을 위해서는 소수 인원이 필수였으니. 이 작전은 ‘정찰 인원’이 어떤 인물로 구성될 것인지. 그것을 명확하게 정하는 것이 키포인트였다.
“곤란하군요. 그림자 기사단이라면 몰라도 저희 쪽엔 은신에 능한 암살자가 없으니. 몸이 날쌘 기사를 추리는 게 최선이 아닐지…….”
마틴은 말꼬리를 늘이며 드레프의 눈치를 살폈다. 현재 호계 기사단에서 가장 기동성이 뛰어나다고 평가되는 대대는 드레프가 이끄는 제5대대였다.
드레프가 은근슬쩍 남의 부하를 추천하는 마틴을 바라보자, 마틴은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리며 입꼬리를 올렸다.
“아시다시피 저희 쪽 대원들은 봉인 활성화 및 복구 작업을 위해 투입된 마법사가 대다수인지라. 정찰에는 적합하지 않거든요.”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니고 그냥 정찰인데. 가는 김에 봉인도 활성화하면 일석이조 아니겠어?”
“만일이라는 게 있으니까요. 여기까지 왔는데 마법사들이 다치기라도 하면 누가 봉인을 관리합니까?”
“그러니까 위험한 일은 귀한 마법사 대신 무식하게 몸 쓰는 너희가 맡아라?”
“드레프 경, 그 천박한 말투 좀 고치면 안 되겠습니까? 나이가 어려 혈기 넘치는 건 알겠는데, 우린 황제 폐하를 모시는 명예로운 기사단입니다. 최소한의 예의는 갖춰야…….”
“내가 왜 폐하도 아닌 8대대의 대장에게 일일이 예의를 갖춰야 하지?”
분위기가 점점 사나워졌으나, 소린은 익숙하다는 듯 둘의 언쟁을 무시하며 지도를 들여다보았다. 드레프와 마틴의 다툼이 끝날 때까지 기다릴 심산인 듯했다.
하지만 카델은 아니었다. 여태껏 침묵을 지키며 그들의 대화를 경청하던 카델은, 과열되는 분위기를 가르며 조용히 말했다.
“정찰은 적린 기사단이 맡죠.”
나직한 발언에 금방이라도 욕설을 뱉을 기세던 드레프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그를 상대하던 마틴 역시 말을 멈춘 채 카델을 돌아보았다.
“지금 그쪽 기사단은 인원이 셋뿐인 걸로 알고 있는데.”
“예. 소수 정예 기사단이라.”
“……카델 경을 제외하면 두 명입니다. 고작 두 명의 기사에게 정찰을 맡기겠다고요? 아니면, 다른 대대에서 인원을 충당할 생각입니까?”
“저를 포함한 세 명의 인원으로 정찰할 생각입니다만.”
덤덤히 말하자 마틴의 표정이 기묘하게 구겨졌다.
“카델 경은 정찰이 아니라 마법진의 복구를 도와야지요. 황제 폐하께서 인정한 마법사라기에 많은 기대를 했는데 말입니다. 낄 데 안 낄 데를 가려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글쎄요. 방금 드레프 경도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카델은 드레프를 가볍게 턱짓하며 말을 이었다.
“가는 김에 봉인도 활성화하면 일석이조 아니겠냐고. 제가 또 효율에 환장하는 편이라. 놓치기 힘든 발언이었어요.”
“그건 그냥 드레프 경이 비꼬려고……!”
어이없다는 듯 언성을 높이던 마틴을 가로막은 것은 소린이었다. 소린은 마틴의 가슴을 짚어 그가 나서지 못하도록 저지하고는, 카델을 응시했다.
“가능하겠나?”
“예. 만약 포위당한다 해도 즉시 지원 요청을 보낼 수 있고, 지원이 올 때까지 버틸 자신도 있습니다. 뭐, 혹시 궁지에 몰린다면 라이돈의 환혹술로 빠져나갈 길을 만들면 되니. 저희가 가겠습니다.”
“……부탁하지. 그럼 정찰 결과에 따른 몇 가지 경우의 수를 나열해 보겠네.”
마틴은 부드럽게 흘러가는 대화의 흐름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소린을 쳐다보았으나, 소린은 정정하는 일 없이 계획을 밀고 나갔다. 그 옆의 드레프만이 코웃음 치며 마틴을 흘길 뿐이었다.
*
그렇게 카델이 작전 회의에 한창이던 때.
바깥의 부하들에게도 나름의 사건이 일어났다.
“맛없어, 반. 나한테 이딴 걸 먹이다니. 인간들이 단체로 미친 걸까?”
라이돈은 막사 앞 모닥불 근처에 앉아 따뜻한 스튜가 든 나무 그릇을 두들기며 투덜거렸다. 그 맞은편엔 싸늘하게 굳은 얼굴을 한 반이 통에서 끓고 있는 스튜를 휘젓는 중이었다.
“닥치고 처먹어.”
“사실 반이 끓이고 있어서 맛이 없다든가?”
“스튜로 목욕하고 싶지 않으면 닥쳐.”
“음식엔 애정이 필요하댔어, 반. 반은 애정이 메말라서 스튜가 맛이 없었던 거야!”
끊임없이 성질을 긁어 대는 라이돈에 반이 스튜를 젓던 국자를 내팽개쳤다.
“못 해 먹겠군. 하필 동료라는 게…….”
회의에 들어간 카델에게 라이돈을 관리해 줄 것을 부탁받아 꾸역꾸역 밥까지 해 먹였건만. 스튜에 야채 대신 라이돈을 넣어 끓이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하기만 했다.
입맛이 뚝 떨어진 반은 스튜가 튀었다며 엄살을 피워 대는 라이돈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가 바라보는 곳은 카델이 들어간 커다란 막사였다.
‘단장은 저기서 맛있는 걸 먹었으면 좋겠는데.’
솔직히 스튜가 맛이 없는 것은 사실이었다. 반은 카델이 똑같은 스튜로 배를 채우지 않기를 바랐다. 그리 생각하며 천천히 분노를 가라앉히려는데, 문득 주위의 시선이 느껴졌다.
‘……또 시작이군.’
알리티스를 향하는 내내 느낀 관심이었다. 새롭게 임명된 황실 직속 기사단이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역시 라이돈의 종족과 자신의 출신이 더 문제였다.
기사들은 살면서 처음 보는 요정이라는 존재에 무례한 호기심을 표했고, 평민 출신 기사 반 헤르도스에게는 무시 섞인 흥미를 보였다. 그나마 함께 싸워 봤던 소린과 드레프 쪽의 대대원들은 덜했으나, 새로 만난 마틴 피커의 대대는 그 호기심을 숨길 의지조차 없어 보였다.
‘성가셔.’
원래 성격대로라면 거슬리는 즉시 처단했을 테지만, 카델과의 약속이 있기에 참았다. 사실 카델만 건드리지 않는다면 자신을 향한 관심이야 적당히 무시할 수도 있었고.
그리 생각하기가 무섭게, 무리 지은 기사들이 반과 라이돈의 근처로 다가왔다. 그들은 서로 눈짓하며 묘한 미소를 보이다, 호의라고는 티끌만큼도 보이지 않는 반을 향해 말했다.
“적린 기사단에게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말이야. 대답해 줄 수 있겠나?”
꺼지라는 말이 목 끝까지 튀어나왔으나, 반은 초인적인 힘으로 참아 냈다. 여기서 소란을 일으켜 봤자 손해는 카델이 볼 테니. 반이 대답 대신 질문한 기사를 빤히 바라보자, 그가 머쓱한 듯 목을 가다듬었다.
“그쪽 단장에 관한 소문인데. 들리는 말로는 그분이 흑마법사의 후예라고 하더군. 사실인가?”
“……뭐?”
“아니, 그렇지 않은가. 무영창 무시전의 다속성 마법사라니. 그게 평범한 인간의 유전자에서 나올 수 있는 힘이냔 말이야. 그래서 흑마법의 힘을 빌려 태어난 돌연변이가 아닌가, 그런 소문이 도는 거지.”
어이가 없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반은 대꾸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 채 헛웃음을 뱉었고, 기사는 그 반응에 힘을 얻어 계속해서 떠들어 댔다.
“여기 요정도 흑마법에 당해 정신이 조종당한 거라는 소문이 돈다고. 그렇지 않고서야 내내 숲에 은둔하던 요정이 인세로 나올 이유가 없잖아. 뭐가 아쉽다고. 그렇지 않나, 라이돈 경?”
기사가 가벼운 농담을 던지듯 실없이 웃었다. 라이돈은 반과 마찬가지로 굳이 대답해 주지 않았는데, 다른 점이라면 항상 해맑던 얼굴에서 웃음기가 완전히 가셨다는 점이었다.
라이돈은 맛없는 스튜 그릇을 바닥에 내려 두고, 무언가를 고민하듯 작게 침음했다. 그리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라이돈을 내려다보던 기사들의 고개가 서서히 위로 젖혀졌다. 라이돈은 희미한 긴장감이 엿보이는 그들의 낯을 가만히 훑어보고는, 말을 꺼냈던 기사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보석처럼 아름다우면서도 동시에 섬뜩한 분위기를 풍기는 붉은 눈동자가 온전히 자신을 향하자, 기사는 저절로 경직되는 몸을 느꼈다. 그리고 잠시 뒤. 선명한 냉기가 그의 몸을 타고 올랐다.
“무, 무슨…!”
라이돈의 짓이었다. 그는 아무런 전조도 없이 기사의 손과 발을 얼리고 있었다. 난데없는 마법에 기사의 동료들이 당황하며 검을 빼 들었다. 하지만 라이돈은 자신을 포위한 검에도 끄떡하지 않았고, 반은 짜증스레 미간을 구길 뿐이었다.
“미친 건가? 감히 호계 기사단의 기사를 공격하다니, 요정이라고 봐줄 줄 알았다면 큰 오산이야! 죽고 싶지 않으면 빌어먹을 마법 치우게!”
“이상하네. 이 빌어먹을 마법을 안 치우면 죽는 건 너일 텐데. 왜 큰소리지.”
심드렁하게 말하자 기사의 표정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날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응.”
짧은 대답과 함께 무표정하던 라이돈의 얼굴 위로 장난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얼음이 덮인 기사의 어깨를 감싸 쥐며 그의 앞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죽일 생각이야. 짜증 나는 김에 네 뒤에 있는 인간들도 싹 다 죽여 버리려고. 나한텐 굉장히 간단한 일이니까.”
“이, 이런 미친놈이…….”
“그런데 왜 아직도 네가 살아 있을까? 난 죽이고 싶으면 바로 죽이는 스타일인데. 왜 너처럼 재미없고 짜증만 나는 놈이 계속 살아 숨 쉬고 있냔 말이야. ……으응, 그래. 그건 카델이 그러지 말라고 해서야. 함부로 이곳 인간을 죽이지 말라고 했거든.”
라이돈은 힘 있게 주무르던 기사의 어깨를 놓아 주는 동시에, 그의 몸뚱이를 절반이나 얼렸던 마법을 해제했다. 그러고는 자신을 노리는 검날 하나를 가볍게 올려 치며 말했다.
“그러니까 까불지 말자? 봐주는 데도 한계가 있어.”
발언과 상반되는 산뜻한 미소에 기사들은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반면, 그 모습을 전부 지켜보던 반은 즐거운 웃음을 터뜨렸다.
“처음으로 마음에 드는 짓을 하는군.”